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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 값싼 위로, 위악의 독설은 가라!
김별아 지음 / 문학의문학 / 2009년 2월
평점 :
김별아. 그녀를 알지 못한다. 그녀의 작품을 아직 읽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이 책이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이다.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하다> 제목이 참 의미심장하다. 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을까. 이미 몇 편의 소설을 출간한 작가의 산문집. 그녀의 내면과 생각, 삶, 생활들을 엿볼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선택한 책이었다. 그런데 제목이 ‘모욕의 매뉴얼’이라니. 나 같은 평범한 아줌마가 아니라 그녀처럼 유명작가도 모욕을 받을만한 일이 있을까. 순하고 아름다우면서 고분고분한 내용이 아니라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놀랐다. 김별아. 그녀와 난 의외로 비슷한 점이 참 많았다. 그녀는 유명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이 사회의 2등 인간인 여자이고, 홀몸으로 움치고 뛸 수 없는 애 딸린 아줌마’였다. 거기다 성격마저 비슷했다. 나 역시 그녀처럼 외향적으로 보이면서도 의외로 소극적이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봐 고심하고 때론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그냥 넘어가버리는 ‘제 밥그릇도 제대로 못 챙기는 헛똑똑이’였다. 누군가와 다툼이나 논쟁을 하거나 시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나의 생각과 의견을 조목조목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다 나중에, 그것도 잠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그제서야 아이고 이 바보야 그땐 이렇게 대꾸했어야지...하며 가슴을 치고 후회하지만 상황은 물 건너갔고 버스는 이미 떠났다. 어쩔수 없이 나 혼자서 가슴에 담아두고 끙끙 앓는 수밖에.
그녀는 달랐다. 더 이상 '싸우지 않을 수는 없다. 모욕을 참고 견디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며 ‘당장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지나지 않더라도’ 싸워서 ‘작은 결실이라도 축적’해야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싸우려면 잘 싸워야 한다. 싸움은 이기기 위해 해야 한다’면서.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옷을 보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옷 꼬라지 운운하는 할아버지에게 대뜸 쏘아붙인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을 때의 매뉴얼대로 ‘남이 뭘 입든 무슨 상관이냐’고. 지하철에서 책을 읽던 난 그녀의 통쾌한 대답에 순간 ‘그렇지! 잘했어’라며 큰소리를 칠 뻔했다. 지금까지 내뱉지 못하고 내내 막혀있던 말들이 터져나온 기분이었다. 또 낯선 것에서 불편하고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인생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어 아이를 떼어놓고 인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부자 되기를 꿈꾸는 세태 속에 무엇이 진정한 부자인지 꼬집고 인간의 오만함이 저지른 실수를 안타까워한다. 그런가하면 ‘고전이라니까 읽고, 유명하다니까 읽고, 읽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니까 읽’었던 자신의 독서를 의무방어적이었다고 고백하는 글에선 나의 책읽기를 돌아보게 했다.
짧막한 글이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생각지 못했던 부분, 입으로 내뱉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얘길 하고 있었다. 그냥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아줌만데 내가 무슨...하며 모른척 외면해왔던 일들을 그럼 안된다고 ‘세상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당하게 모욕해 올 때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적절하게 맞받아칠 수 있는지 고민’해보라며 말을 건네는 기분이 들었다. 불혹을 맞은 여인이 막 불혹을 넘긴 또 한명의 여인의 손을 잡고 생각의 방식을 바꿔보고 때론 오롯이 외로워할 줄도 알아야 불행해지지 않는다며 일깨워줬다. 통쾌함을 선사했다. 첫 만남을 기념하는 선물이라도 하듯. 나도 할 수 있을까. 그녀처럼 나도 모욕의 매뉴얼을 준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