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아이들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로버트 스윈델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어둠이 내린 거리, 냉기가 감도는 벽돌담에 한 아이가 기대어 앉아 있다. 최대한 웅크리고 앉아서 팔로 무릎을 감싸고 고개마저 숙인 소년. 그의 모습이 곧 사라질 듯 테두리만 남아있다. 거기에 소년을 바라보는 것 같은 고양이의 그림자. <사라지는 아이들> 표지만 봐도 암울함이 감돈다. 실낱같은 빛 한줄기조차 비치지 않는 그 모습에 괜시리 울적하고 쓸쓸해진다.




소설은 시작부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곧잘 잊는다.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나는 링크다. 물론 진짜 이름은 아니다.’ ‘쉘터. 그거야. 맘에 들어.’ 이 대목을 무심코 넘겼다가 20쪽쯤에서 ‘아니, 이야기 진행이 왜 이래?’하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알게 됐다. 책은 구성이나 진행이 좀 독특하다. ‘링크’라는 소년과 ‘쉘터’란 연쇄살인범이 각각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방식이다.




아무개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극히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링크는 열 네 살 때 부모의 이혼과 새아빠의 폭력으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차디찬 거리로 내몰린다. 고향을 떠나 무작정 런던에 도착한 링크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직업소개소와 사회보장국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자발적 노숙자’에겐 어떤 혜택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만 듣는다. 주머니엔 잔돈 몇 푼밖에 없는 상황에 그나마 머물던 숙소에서까지 어이없이 쫓겨난 그는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며 거리의 구석진 곳을 찾아다닌다. 우연히 진저라는 또래의 노숙자소년을 만나 구걸하는 방법이나 요령을 배우기도 하고 서로 의지하며 지내던 어느날 갑자기 진저가 사라진다.




쉘터. 의학적인 사유로 군대에서 강제 퇴역당한 그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지 못한 군대에 분노하면서 알콜 중독자나 노숙자로 나라를 더럽히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인간쓰레기가 온 거리를 어지럽히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대상자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노숙자들을 한명씩 꼬여낸 다음 순식간에 살해하는데 그런 일련의 과정이 마치 정당한 행위인양 ‘근무일지’란 형식을 빌어 노트에 적는다. 더불어 자신의 살인행각, 행동이 오히려 고맙지 않냐고 비웃듯이 되묻는다. 그런 그가 어느날 거리에서 마주친 진저와 링크를 처리해야할 적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잡기 위해 철저한 작전을 세우는데....




링크와 쉘터, 가정내의 폭력으로 가출하여 노숙자가 된 소년과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의 얘기가 번갈아 진행되는 방식은 책을 읽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전해줬다. 특히 진저를 간단하게 속이고 살해한 쉘터가 링크마저 잡으려고 할 때,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자신의 목을 조이려는 손이 시시각각 다가가는데 정작 링크가 눈앞에 있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할 때의 아슬아슬함은 스릴 넘치는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긴박감이나 스릴이 아니다. 오늘, 지금 이 시간에도 거리를 방황하는 수많은 이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고 그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한번쯤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그럭저럭 구걸해서 오늘은 버텼지만 그들에게 보장된 내일은 없다. 어떤 희망이나 삶의 의욕도 상실한 채, 버젓이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일까. 끝없이 빠져드는 절망의 늪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책에서 게일이 떠날 때 링크의 손에 돈을 쥐어준 것처럼 돈이 해결책일까?




얘기가 어긋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란 에니메이션이 생각난다. 낯선 동네로 이사가던 치히로의 가족이 길을 잘못 들어 찾아간 곳에서 부모님은 돼지로 변하고 치히로 역시 몸이 사라질 듯 서서히 투명해진다. 그때 하쿠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지만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센’이라고 불리며 온천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자신을 줄곧 지켜주고 돌봐주던 부모조차 없는 상황 속에서 치히로는 매사에 심드렁하고 짜증내기 잘하던 소녀에서 서툴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로 거듭나고 결국 부모님도 다시 찾게 되는데...만약 링크에게 ‘하쿠’와 같은 인물, 위기에서 구해주고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링크의 오늘은, 다가올 미래는 이렇게 암담하진 않았을텐데...란 생각이 들었다.




영국 런던의 거리,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벌어지는 노숙자들의 삶을 얘기한 160여쪽의 짧은 이 책은 무척 쉽게 금방 읽혀진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이나 개운함보다 봐선 안 되는 물건, 판도라의 상자를 몰래 들춰보기라도 한 듯 두려움과 암울함, 깊은 절망감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야기가 벌어진 장소는 영국 런던이 아니라 대한민국 내가 사는 도시이며  책 속의 미치광이 살인마 쉘터는 바로 나의 또 다른 나였다. 어둠 속에 숨겨진 나의 내면을 마주한 듯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게 끝이 아니란 거다. 책에서 링크가 그랬듯이 나 역시 희망한다. 이 책이 시발점이 되어 내 속에 잠재해있던 겹겹이 쌓인 편견을 벗어던질 수 있길, 지금까지 그들을 외면하거나 차갑게 바라봤던 시선이 조금씩 따스함을 띌 수 있길...






<기억에 남는 대목....>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 두 시간. 잠깐씩 졸기도 한다. 아주 잠깐. 너무 춥고 두렵고 또 아파서 결국엔 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도한다. 너무 지칠지라도, 내일 또한 어제와 똑같이 가혹할지라도. 무엇보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힘겹다. --- 72쪽.




몇 년 전만 해도 그 애 역시 어여쁜 아기였겠지....그 애의 부모 역시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을테고...우리 아기는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까, 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그런데 그 예쁜 아기가 자라 비닐봉다리라고 불리며 먹다 남긴 음식으로 연명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지만, 신경 쓰는 이 하나 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 90쪽.




나는 희망한다. 루이즈와 개빈이 기사를 쓸 때, 진실을 담아 줄 것을 희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를 읽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편견을 벗고 진실을 바라보기를 희망하며, 조금이나마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되는 시발점이 될 수 만 있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 난 그저 내가 아직 이곳에 있을 때, 희망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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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8-24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거운 주제군요. 예전에 아이들에게 너희 집 옆에 노숙자 쉼터 같은게 만들어진다고 하면 너희들은 어떤 생각이 들겠니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아이들의 생각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어른들의 생각을 딱 닮았더군요. 위험할 것 같다. 무서울것 같다. 심지어 집값 떨어진다까지... 이 책 주제가 상당히 무거울 것 같지만 관심이 가네요.

몽당연필 2008-08-24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고 금방 읽히는데 비해 읽고나서 무척 무거운 느낌을 주는 책이었어요.
아이들이 어른의 생각을 닮게 되는건 아마도 부모나 주변 어른들의 영향이 아닐까...싶어요. 아이에게 잘못 심어준 편견이나 선입견이 나중에 아이가 성장했을때도 영향을 줄거라 생각하면 순간 아찔해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