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니는 내 죽었다캐도 오지마라!!”




친정자매 중에 성격이 유난히 불같은 언니가 있다. 그 불의 원조격인 또 다른 불, 친정엄마가 간혹 외나무 다리에서 부딪힌다. 화르륵 화르르륵.... 한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히 맞서서 활활 타오르던 불의 전투는 항상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내 다시는 이 집 대문 넘나봐라.” “오냐, 그래. 니는 내 죽었다캐도 오지마라!!”




친정엄마와 언니, 그 둘의 접전을 곁에서 만류하거나 나중에 전해 들으면 항상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족끼리 언제나 사랑하며 지내면 정말 좋겠지만 때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걸까. 그것도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책은 열 살인 소년, 나 가즈시의 서술로 진행된다. 또각또각...... 깊은밤 어머니가 손톱을 깎는다. 아이에겐 한밤중에 손톱을 깎으면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고 호통을 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매일밤 또각또각 손톱을 깎고 발톱을 깎는다. 마치 누구에게 들으라고 시위라도 하듯이.




1970년 봄, 이혼한 어머니와 가즈시가 사는 집에 낯선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바로 어머니의 아버지이자 가즈시의 외할아버지 ‘짱구영감’이었다. 오래전에 가족들 곁을 떠나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선 좁은 집 방의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자리를 잡는다. 어머니는 그런 짱구영감을 반가워하지도, 구박이나 괴롭힘도 아닌 알 수 없는 태도를 보인다.




그들이 서로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어머니가 앓아서 누워버린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들바들 떠는 어머니. 그 며칠 뒤 느닷없이 짱구영감이 사라진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지도록 짱구영감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어머니가 찾으러 나서려던 찰라, 짱구영감이 집에 들어선다.  양손에 들고 있는 새빨간 양동이엔 피조개가 가득했다. 온종일 짱구영감이 뻘에서 캔 피조개를 먹고 어머니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지만 그에 비해 짱구영감은 점점 더 쪼그라들더니 급기야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그때 이미 짱구영감의 몸은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는데....




“죽으면 안돼요.....” 말투는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그때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아직, 아직 조금만 더.......다음 순간,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짱구영감이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다. “알고 있다.” - 119~120쪽.




엄마와 아들, 그 둘만의 조용한 일상이 짱구영감의 등장으로 인해 일어나는 크고 작은 파문을 담은 소설 <저녁놀 지는 마을>. 저자 유모토 가즈미는 이 책에서 가족에 대해 말한다. 어느 누구보다 서로를 믿고 사랑했기에 미움은 더 깊어지고 서로의 가슴에 맺힌 상처를 멍에처럼 품고 살아가는 가족. 그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겪는 사랑과 미움, 이해와 용서, 삶과 죽음 속에서 가족이란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지 독자로 하여금 돌아보게 한다.




무척이나 얇은 책이었다. 두께가 1센티미터나 될까?...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동은 실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가 아니라 봄날의 가랑비 같았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담담한 문체로 풀어낸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가즈시 가족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짧막한 이야기지만 울림과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 책이었다. 붉게 타오르며 서쪽으로 저무는 태양을 향해 어깨에 양동이를 지고 힘겨운 걸음을 내딛는 짱구영감의 뒤로 길게 늘어진 표지의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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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8-1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쉽게 화해가 되고 용서가 될까요? 난 너무 의심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