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비밀의 부채 1
리사 시 지음, 양선아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델마와 루이스>의 델마와 루이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잇지와 루스...그녀들을 떠올려본다.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과 환경과 관습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를 추구했던 그녀들.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녀들의 우정과 사랑에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특히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 경찰의 추격 끝에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된 델마와 루이스. 델마는 루이스에게 앞으로 계속 달려가자고 얘기하고...맞잡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든 둘은 벼랑 끝으로 질주한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찔하고 안타까운 이 장면이 난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내 마음속엔 새로운 여인 두 명이 자리를 잡았다. <소녀와 비밀의 부채>의 두 주인공, 나리와 설화! 

델마와 루이스가 마치 투쟁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면 나리와 설화는 그 반대...안으로 안으로 조용히 잠겨드는 삶을 살았다. 중국에 관한 지식이 얕았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됐다.

우선 전족에 관해서다. 전족을 단순히 작을 발을 추구했던 여인네들이 자신의 발을 동여맸던 무척 잔혹한 풍습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19세기 당시 중국에선 발크기가 얼마나 좋은 결혼을 할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략 엄지손가락 길이인 7센티가 이상적이라는 전족을 만들기 위해 뼈가 부러지는 고통도 감내해야했던 것이다.

<인생에서는 금련이 예쁜 얼굴보다 훨씬 중요하지. 예쁜 얼굴이야 하늘의 선물이지만 작은 발은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으니까> 42쪽

<내 작은 발은 미래의 내 시댁 사람들에게 출산의 고통뿐만 아니라 어떤 불행에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나의 자제심과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터였다.

내 작은 발은 세상 사람들에게 친정 식구들, 특히 친정어머니에게 내가 순종했음을 보여주고, 이는 장래 내 시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게 될 터였다....내가 다섯 아이를 낳은 후에도...내 발을 쳐다보고 손에 쥐고 싶은 그의 욕망은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 결코 줄어들지 않을 터였다> 68~69쪽.

그리고 누슈...여자들만이 썼다는 누슈는 남자의 글자를 흘려쓴 것이었다고 한다. 또 한글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뜻이 아니라 발음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어서 ‘배’가 먹는 ‘배’일수도 있지만 타는 ‘배’일수도 있고 신체의 일부인 ‘배’일수도 있어서 문맥에 따라 신중히 해석을 해야했다고 한다.

< “모든 단어의 뜻은 문맥 속에서 찾아야 해”

숙모는 매일 수업이 끝날때쯤 이 말을 강조했다.

“잘못 읽으면 비극이 생기거든”> 134~135쪽.

하지만 무엇보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라오통’이었다.

<라오통이란 의자매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여러 소녀들이 함께 의자매를 맺었다가 시집가면 해체되는 것과는 달리 라오통은 전혀 다른 마을에 사는 두 소녀가 일생동안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44쪽

이렇게 전족, 라오통, 누슈 이 세 가지가 씨실과 날실처럼 어우러져 탄생된 <소녀와 비밀의 부채>는 여든살의 여인 나리가 지난 날을 돌아보고 자신의 라오통이었던 여인 설화를 댕기머리 딸내미였던 시절, 머리를 얹은 처녀시절, 시집살이 시절, 조용히 앉아서 보낸 시절에 걸쳐 회고하는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가난한 농부의 딸인 나리는 전족을 할 나이가 됐을 때 중매쟁이로부터 지체높은 집안의 딸과 라오통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받는다. 나리의 신체적인 조건이 전족을 했을 때 완벽한 금련의 발을 나올 것이란 예상에서였다. 라오통을 맺은 소녀에게서 상류층의 풍습과 예의범절을 배우면 자연히 좋은 집안과 혼인을 할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렇게해서 설화와 만나 라오통 계약을 맺고 한가족처럼 지내면서 둘은 서로를 한 쌍의 원앙새처럼 사랑하고 아끼게 된다. 하지만 나리가 결혼을 하면서 둘의 운명은 엇갈리게 되는데 바로 설화의 집안이 이미 몰락한 상태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둘의 운명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부유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설화가 결혼을 하면서 남편과 시댁식구들에게 폭력과 학대를 당하는 등 계속된 불행에 나리의 충고는 무거운 짐이 되었고 급기야 둘의 라오통이 깨어지는데 설화가 나리에게 보낸 누슈의 글귀를 나리가 잘못 해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나리와 설화가 다시 재회하지만 그때 이미 설화의 몸은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자신의 오해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왔는지 깨달은 나리는 남은 생을 괴로워하고 후회하며 지낸다. 자신에게 설화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오직 한 사람만이 내게 진정으로 중요했건만, 나는 그녀의 남편보나 더 야멸차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내게 자기 자식들의 이모가 되어달라고 부탁한 후에 설화는 말했다. 이 말이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너만큼 착하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우리가 만날 것이라고 믿어.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을거야.”> 243쪽


이 책은 다 읽었다고 해서 그냥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가슴에 꼭 끌어안고 한참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했던 책이었다. 나리와 설화의 삶이, 그녀들의 우정과 사랑을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기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가슴아픈 것이었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19세기의 중국을 모두 다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부모나 자식이죽었을때 무릎걸음으로 무덤까지 가는 것이나 결혼을 했더라도 자식을 낳기 전엔 친정에서 머물러야하는 것 등 내겐 생소한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나 과정을 다룰때 실제 누슈문자를 사진으로 소개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자도 눈에 띄었다.

<요즘같이 먹고 살기 위해서 땅을 처분해야 하는 마당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 84쪽

<--- 있겠소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옥의 티에 불과하다. ‘영원히 함께 하고 같이 늙어간다’는 ‘라오통’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절친한 사람들과 맺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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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05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 라오통, 새롭게 알게된 중국의 관습이네요.
님의 리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