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요정 이야기
바바라 G.워커 지음, 박혜란 옮김 / 뜨인돌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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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을 택해서 입밖으로 내어놓은 다음 순간, 내가 어느 편에 서있는지 놀라면서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이전까지 으레 익숙한 감상들로 읽게 되던 동화에서 어느 순간 나쁜 냄새가 난다고 느껴져서 더이상 읽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차곡차곡 쌓은 관습이나 고정된 사고방식이 그저 역겹기만 해서, 옴싹달싹 할 수 없을 때 상상하는 것은 올바른 것,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고, 아무도 억압하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행복한 어떤 것이다.

익숙한 편견들에 눈을 맡기지 않은 것, '괴물'로 묘사되던 것이나, '마녀'로 묘사되던 것을 다르게 보는 것, 혹은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는 것. 아이나 소녀에게 백마탄 왕자를 상상하지 않게 하고, 타인을 대할 때 흔한 편견에 자기를 맡기지 않게 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또한 행동하게도 하는 것. 소박하더라도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 모든 게 이 동화를 쓴 그녀나 내가 함께 바라는 게 아닐까. 매끄럽지 않아도, 한 걸음 내딛었으니 다음 걸음도 이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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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 너구리와 백석 동화나라 - 빛나는 어린이 문학 2 빛나는 어린이 문학 2
백석 지음 / 웅진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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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시이면서 동화니까, 소리내어 읽으세요. 그림을 함께 보고 소리내어 읽는다면 정말 좋답니다. 재미있는 말들이 매끄럽게 읽히는데다가, 함께 나누고 서로 돕는 즐거움이 있고, 정당하게 요구하고 용감하게 맞서는 얘기도 있고, ~체 하다가 웃음거리가 되는 얘기도 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면 이걸 두고 하는 얘길겁니다. 우리 말이 얼마나 듣기 좋고 재미있는지 알게 할 수 있고, 공연히 예쁜 공주나 왕자를 꿈꾸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동화지요.

자연을 책으로만 아는 아이들이 게가 밥을 짓는다는 묘사를 이해할런지, 묘사되는 동물들을 삽화이상으로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알지 못한다면 너무 멀거예요. 논도 개구리도 많은 나라에서 밀밭풍경을 상상하는 아이들뿐일 수도 있잖아요.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만을 상상하는 아이들은 슬프다구요. 가까운데 귀기울이고, 눈길을 주는 섬세한 말글이라 더 반가웠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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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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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요시모토 바나나가 좋다. 간결해서 좋고, 감정이 풍부해서 좋고, 신비로와서 좋다.

바나나의 짧은 소설들에 익숙하다가, '암리타'를 읽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읽으면서 '이러이러한' 소설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추상적인 따뜻함을 느낀다. 이상하게도 설명하려면 갑자기 소름이 돋는 전율도 또 느끼고, 무심함도 느낀다.

'반만 죽'은 건 암리타의 화자가 한참을 누리게 되는 상태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단에서 굴러 반쪽의 기억을 잃은 그녀의 상태를 '영혼을 보는'여자가 묘사하는 말이다. 힘들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면서.

여동생이 자살하고, 남동생이 '영혼을 듣고', 엄마가 이혼했고, 사촌과 엄마친구로 꾸려지는 유사가족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 좋다'고 말하는 화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는 어른들이 보기에 한없이 가볍게만 보일 젊음이다. 내가 동화되는 감수성이란 그런 것, 욕망이나 야망이 없다고 어른들에게는 가벼워 보여도 진지했던 어른들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기운들. 좀 더 섬세한 상처를 느끼는 감수성, 나와 닮고도 다른 것들.

그러고도 삶을 살아내는 간절히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을 보면서 따뜻하고도 소름끼치고, 무심하고, 또 마음이 가고.

간절히 행복하고 싶어 하는, 타인에게 관대한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서, 생명의 감로수를 삼키듯 바나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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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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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노란색의 새나, 선명한 자주색의 꽃이나, 투명하게 맑은 지나친 파란색의 풀물을 보면 놀란다. 자연에서 비롯하지 않는 그 무엇도 상상해낼 수 없는 인간이면서도, 인공의 색들에 익숙해져서 그 인공의 색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도리어 잊고는 '수박이 냉장고에 산다'고 말하는 꼬맹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된다. 연애소설읽는 노인과 나는 그만큼 다르다.

그래서, 노인이 사라진 밀림이 걱정된다. 자연을 건너건너 이해하는 지금의 내가 숲속의 사냥꾼처럼 이유없는 살육을 '이유있다'고 믿으며 어느날 닥치는 복수에 무방비로 놓일까봐 걱정이 된다.

노인도 처음부터 나와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밀림을 개간하겠다고 고향을 떠나던 젊은 날의 노인은 나처럼 자연을 취하면서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이유있다 믿고 있었다. 먹고 입고 자는 하나하나가 직접이 아니라 간접으로 내게 도달할 때, 난 '생존'을 위해 활동하면서도 그걸 느낄 수 없다. 그 모든 간접적 경로가 차단된 공간에서 노인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생존'의 방법,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배운다. 강변의 마을사람들은 맹수에 죽임당한 시체를 보면서, 단지 맹수를 두려워할 뿐이지만, 노인은 맹수를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행동한다. 간접으로 '생존'하고 있는 문명속의 내가 할 수 없는 방식을 삶으로 터득하고 있다.

어떤 선언보다 간결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노인의 소설읽을 시간을 빼앗고 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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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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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사라지고 싶을 거야. 뼈가 하얗게 드러나는 상처따위 볼 수 없는 척, 내 손으로 내 살을 도려내고 싶을 거야. 머릿속은 텅비고, 손은 내 손이 아닌 것처럼 지독한 관성으로 움직일 수도 있을 거야. 아픔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거야.

책장을 덮으면서, 그래도 여전히 아무일 없던 듯 지속될 수 있는 거라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던 마음이 비죽비죽 솟았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무 일 없던 듯'이란 걸 안다.

극심한 마음 속의 갈등들이 아예 없던 것이 되는 순간,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여전히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아프고, 몸도 아프고, 서운하고, 슬프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는 도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존재해 온 것인가 말이다. 내가 알던 사람들, 갑자기 모르던 사람이 되고, 내가 디디고 서 있던 그 견고한 바닥이 일순 무너져 버린다면, 나는 그런데도 여전히 '나'라고 계속 '아무일 없던 듯' 살아질까. 자신이 없다.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 내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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