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에 대해 잊히지 않는 장면의 기억이 있다. 갓 시집온 며느리(이승연)가 시댁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설거지를 하는 며느리가 낡은 후라이팬을 닦는데, 많은 홈드라마가 그러하듯이 나이 든 어른 여자(이모할머니였던가, 시어머니였던가)가 숟가락으로 기름때를 긁어서 떼어내면 된다고 알려준다. 그렇게 닦던 며느리가 '버리고 새로 사요'라고 말하는데, 그 어른 여자가 '나도 늙고 쓸모없으면 내다 버리겠구나'라고 응수하는 장면이다.(https://ko.wikipedia.org/wiki/%EB%82%B4%EC%82%AC%EB%9E%91_%EB%88%84%EA%B5%B4%EA%B9%8C)
날카롭게 콱 박힌 기억이라 언젠가 한 번은 쓰고 싶었다.
왜 그렇게 콱 박혔을까. 그 연결이 생경해서, 혹은 그 말이 너무 공격적이어서, 내가 그 젊은 며느리와 다를 바 없어서? 

버리는 일을 힘들어하는 지금의 나는 그 할머니 같다. 물건을 나 자신처럼 생각하고 있다. 스터프를 읽고 (https://blog.aladin.co.kr/hahayo/7043654) 만든 많은 변명들을 더하기 까지 해서, 더 못 버리는 지경이기도 하다. 철학책을 읽는 중에 물건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서, 현대인이 좀 더 결핍을 많이 느낀다는 대목을 읽고도 또 고개를 주억거리는 거다. 

청소하기 싫다,는 말을 청소가 도대체 뭐야, 여기서 저기로 옮겨놓는 것 뿐이잖아?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나는 버리기보다 태우고 싶다.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더 쉽게 버릴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신박한 정리를 보고 있다. 어디 있는지, 어디에 쓸지, 과연 쓸지 알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 찬 집들이 버리고 버리고 버린 와중에 집 꼴을 갖춘다.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집에서 울컥한 사람들을 보고 있다. 인생의 어떤 순간들을 흘러가게 둘 수 있어야 가능하다. 아직도 흘려보내지 못한 어떤 순간들이 쌓여 있다. 마음과 집, 나와 물건, 나와 자연, 나와 지구, 그 무엇도 칼로 자르듯 베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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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서 가족이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린이가 입을 뾰족 내밀고 '나는 병아리콩이 좋은데'라고 말한다. 식탁에 있던 어른 남자(강하늘)가 벌떡 일어나 식탁을 아마도 쾅 쳤던가. '오늘부터 밥은 각자 햇반한다'라고 선언한다. 광고를 보는데, 주부의 심정으로 깊이 분노했다. 

햇반, 밀키트, 간편식, 그래 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식탁이 차려졌고, 모두 밥을 한 그릇씩 앞에 두고 앉았는데!!! 그 식탁에서 병아리콩이 든 밥이 좋다고 말하는데 그게 수용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먹을 게 없는데, 라며 식탁에 앉는 아들놈에게 생기는 분노가 티비 광고 속 강하늘에게 뻗쳤다. 모든 욕망이 다 채워져야 하는 게 아니다. 

아니, 엄마, 내가 해 먹을게, 내가 먹고 싶은 병아리콩 햇반으로 내가 돌려 먹는다니까.

아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수고 때문만은 아니다. 햇반을 먹고 나면, 쓰레기가 나온다고. 

각자의 모든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더 많은 것들을 버린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게 시간이건 수고건, 누가 너보고 하래, 왜 그래, 누가 하던지 총량이 늘잖아. 쓰레기도 늘고, 수고도 늘고. 심지어 자원도 늘어. 취향을 전시하는 세상 가운데, 무언가 특별한 양 전시하는 취향 가운데 수고하는 엄마-그래, 나는 따로 아들 놈의 비빔면을 삶았다-가 있고, 더 많이 생겨버린 쓰레기가 있고, 장거리를 달려온 음식들이 있다. 

취향을 존중한다는 건, 자신이 해먹는 자신의 밥에나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는 지경이다. 독재자 엄마가 되어 '주는 대로 먹어!'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순간마다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내가 한 어떤 젊은 날의 불편함의 토로가 부당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날들이다. 

밥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데도 쌀을 사기보다 햇반을 사는 와중에 삶을 유지하는 비용이 늘고, 쓰레기도 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햇반은 혼자 들어온 쓸쓸한 저녁, 밥솥에 밥이 딱 떨어진 날, 긴급하게 돌려서 먹는 그런 식사로는 수요가 부족했던 것일까. 

배가 고프지 않은 다음에야 취향이라도 남는 건 또 아닌가. 이미 우리는 배고프지 않아서 취향을 주장하는 건 줄은 알지만, 그런 취향 때문에 방법을 잃을까봐 두려운 마음이 있다. 아무리 내팽개쳐져도 산과 들을 뒤져서 먹을 걸 찾아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 편리함 가운데 사라질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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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서 선물도 하고, 나중에 아이에게 읽게 하려고 다시 산 책에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청소년 소설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2220098)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죽은 친구의 일기를 읽는 소녀의 이야기다. 읽으면서 많이 운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잔소리하는 엄마를 용서하는 소년의 삶의 태도가 대단하다고 남편과 이야기했다. 당장 내일 내가 죽어도, 당장 내일 내 눈 앞에 당신이 죽어도, 지금 나의 이 말이, 행동이 후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티비에서 이 광고를 봤을 때 너무 놀랐다. 

4년이나, 저러면서 살 수 있어? 게다가 그 상황들은 남자에게 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쉬겠다는데 나가자고 바지를 잡아당기는 아내, 나가려고 준비를 마치고 이제 나가자는데 여전히 옷을 고르다가 '안 가'라고 말하는 아내, 변기뚜껑을 내리지 않았다고 드라이기로 이상한 데를 말린다고 화를 내는 아내, 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제 자라고 코드를 뽑아버리는 아내. 광고를 보는 아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는걸 싶었다. 

결혼은 문명의 충돌이 맞지만 -아, 나는 문명의 충돌,을 못 읽는구나.- 누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은 서로 다른 문명이 부딪쳐 만드는 것이 맞지만, 일방적일 수는 없다. 좋은 말들을, 서로에 대한 감사를 조금씩 조금씩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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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은 동경하게 되는 걸까.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하는 일에 뚱한 마음이 점점 커지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는 마음이 자꾸 커지는 걸까. 자신이 가진 것에 행복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삼시세끼 어촌편6을 보는데,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엄마랑 늘 가깝다고 생각했었지만, 회사에 들어가면서 아빠를 이해했다. 내내 학생이었다가 직장인이었던 그 순간에 아빠의 수고를 이해하면서 엄마를 조금은 노는 사람처럼 생각도 한 거 같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아이를 기르면서야 엄마의 수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서로를 고마워했었는지도 떠올랐다. 가족들끼리의 원망이나 다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그 안에서 서로의 역할을 존중했다. 

삼시세끼는 남자들만 나와서 그저 세 끼 밥을 먹는 거 뿐이지만, 보고 있으면 어떤 일이 더 가치있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 생각하게 된다. 단순화시킨 하루의 일상이다.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삶. 고기를 잡았으면 그걸로 먹고, 못 잡았으면 다른 걸로 어떻게든 먹는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이 가지는 그 단순함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내가 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낚시를 나가는 유해진과 요리를 하는 차승원, 불을 피우고 요리를 보조하는 손호준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모습으로 서로의 일들을 존중한다. 낚시를 같이 나갔다 들어온 저녁, 유해진을 고생했다면서 토닥이는 차승원은, 자신은 못 할 일이라며 고마워한다. 하나도 낚지 못한 어떤 날이나, 큰 고기를 잡고 어깨를 쫙 펴고 들어온 어떤 날이나, 그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다르지 않다. 늘 끼니를 걱정하면서 종종거리면서 요리를 척척 해내는 차승원에게 유해진이 전하는 고마움도 다르지 않다. 자신이 하지 못할 일을 해내는 서로에게 전하는 감사함이 전해졌다. 저녁 먹은 다음에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고 말하는 손호준에게서도 도움이 되고 있어서 좋은 그 마음이 느껴진다. 어떤 자신의 수고도 다른 사람에게 원망이 되지 않는다. 

더 중하고 덜 중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맡은 일 가운데 서로를 고마워하면서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다.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를 고마워하는 것처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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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지니 광고( https://www.youtube.com/watch?v=isIGE_tudCo )를 보고 있었다. 

"엄마 말은 안 듣는 얘가 기가지니 말을 듣네"라는 내 말에 남편이 "어이구, 좋댄다"라고 추임새를 넣어서 빵 터졌다. 

엄마 말을 안 듣는 아이가 기계가 하는 말은 듣는가? 애초에 그 자체에 의문이 드는데 이런 광고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사람과 말할 때는 눈을 보고 말하고, 화가 나서 말이 안 나올 때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상대가 반응하는 걸 보면서 말의 톤을 조정하고, 말의 투를 조정하고, 이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아이들은 어디서 배운단 말인가.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거야,라는 다음의 예측이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가족 안에서 배워야, 위험을 피하고, 위협을 감지하고, 상대를 분별하고, 가족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피곤한 나는, 기가지니에게 예절을 배우는 어린이가 걱정스럽다.


꽤 오래 전에 삼성의 패밀리 허브 광고를 보면서도 불편한 심사를 써놓은 게 있어서 퍼 놓는다. 기가지니와 대화하고 냉장고와 대화하는 것은 어쩌면 혼자 사는 쓸쓸함 가운데 필요할텐데, 아이와 엄마, 단란한 가족 가운데에서는 영 어색한 이야기만이 생긴다. 


삼성 패밀리 허브 광고, 가
- 사람들 눈에 저게 행복의 묘사인가, 이런 생각을
남편이 산 비싼 글러브가, 아내를 화나게 한다. 화난 아내를 살피며 분리수거도, 청소도 열심인 남편이 묘사된다. 남편이 아니라, 냉장고에게 말 거는 아내는 남편이 거의 포기할 즈음, '칼국수 먹을래'라고 질문한다.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질문했다는 게 기쁜 남편은 자기가 하겠다며, 냉장고의 설명에 따라 요리를 한다. 칼국수를 끓여 아이와 아내가 함께 먹는다. 나는 묘사 하나하나가 다 무섭다. 남편도 아이도 있는데, 냉장고에 말거는 아내-라디오 좀 켜 줄래-, 비싼 가격이 찍힌 영수증을 보면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아내, 혼자 노는 아이. 그저 저런 묘사를 못 보겠다. 냉장고라니, 요리를 보여주고, 속을 보여주고, 라디오도 나오는 냉장고가 '가족을 이어주는'이라니 끔찍해서. 아마도 사물 인터넷으로 다른 것들까지 연결했겠지만 역시 나는 아주 끔찍해서 못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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