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의 연애론 - 새롭게 쓰는
스탕달 지음, 권지현 옮김 / 삼성출판사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스탕달이란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이외수 씨의 추천사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계발서만큼이나 많이 쏟아지는 것이 연애론들이 아닌가 말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연애론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들을 반복하거나 비현실적인 관념적 수다에 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지하게 독서에 몰입할 수도, 현실에 응용해 볼 수도 없는 무가치성의 한계를 드러내고야 만다. 그에 비해 스탕달의 연애론은 깊이가 있되 관념에만 치우치지는 않는다. 이것이 쓰여진 때로부터 한 세기 이상을 훌쩍 뛰어넘은 시대에 살고 있는, 다분히 까다로운 나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잘 보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잘 보이려고 꾸미지 않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며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솔직함으로 다가서야 상대도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솔직하게 응대하기 때문에 말이나 행동에 가식이 들어차면 여자는 마음을 닫아버린다. 더 이상 감동하지도,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는다. (...) 물론 여자들 중에는 '매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신조를 운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 역시 자연의 법칙 중 하나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려면 결정적인 한 걸음은 최대한 늦추어야 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자제심을 잃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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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종종 사랑하는 여인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 사랑을 알았을 때 나는 이 미묘한 감정에 시달렸다.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뒤늦게야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겁함 때문이었다. 전쟁터의 군인들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 오히려 이를 악물고 포화 속으로 뛰어들 듯, 사랑을 외면하는 것 역시 사랑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의 반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단지 말을 하기 위해 말을 하며 떠벌렸던 어리석은 말들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이처럼 그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가며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심리, 철학적 통찰과 객관, 주관적 경험의 토대 위에서 짜여져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안타깝게도, 연약하고 의심이 많다. 이런 현상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일수록 더하다. 이런 작용은 무의식 속에서 나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유라면 그저 우리의 삶 속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기만과 배신, 실망과 상처가 그 섬세한 영혼에 여기저기 생채기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탕달은 연애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 말은 여자와 남자,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서 사랑은 청춘이었을 때보다 더 풍부하고 신선한 감정의 샘물을 솟아오르게 한다네. 젊었을 때는 막연하고 광적이면서도 항상 산만한 희망이 있었네. 헌신은 존재하지 않았지. 지속적이고 깊은 욕망도 없었어. 언제나 가볍기만 했던 영혼은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며 어제 사랑했던 것을 오늘은 무시했다네. 사랑의 결정 작용만큼 명상적이고 신비로우며 그 대상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것은 없네. 젊었을 때는 유쾌한 것들만 마음을 기쁘게 해줄 수 있었고, 그것도 단 한순간뿐이었네. 그런데 지금은 사랑하는 대상과 관계가 있는 모든 것, 아주 하찮은 것조차도 깊은 감동을 준다네.


그에 더해, 위에 소개한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 쓰는 자의 섬세한 감성이 고스란히 잘 담겨 있다. 이것은 읽는 감동과 재미를 배가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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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광산에서 꺼낸 소금 결정들로 뒤덮인 나뭇가지에 빗대어, 스탕달은 사랑을 콩깍지라고 말한다. 흥분과 도취 상태라 한다. 환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환상을 강화시키고 지속시킬 수 있는 방편들을 일러준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환상을 현실도피적인 환상, 위험한 환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환상은 사랑의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대상과 세계에서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강력한 힘이 되어준다. 이 환상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것으로 그는 게임과 전쟁을 들고 있다. 사랑은 밀고 당기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밀고 당기기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연스러움. 내가 나답고 너는 너다워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스러움이 결여된 연애는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사랑은 느낌을 따라가면 돼. 이것저것 재어가면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야.’이런 것을 자연스러움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모든 일에는 배움이 필요한 법이다. 배움의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랑에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싸우고 상처 주고 저주하며 헤어지고 절망하는 과정들 속에서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부모를 비롯한 타인들의 사랑을 지켜보며 배울 수도 있다. 어떤 배움의 길을 택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나는 진정 아끼는 사람들에게 스탕달의 연애론을 권하고 싶다. 현재의 사랑이나 앞으로 다가올 사랑을 위해 사랑의 기술을 익히는 일이야말로 사랑의 대상을 보다 성숙하게 사랑하리라는 각오이자 실천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러움으로 통하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것이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사랑할 사람들이여, 무조건 읽어라! 강추(강력추천)한다. 

                                                                                                          H07090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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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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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작가의 소설은 <논개>가 처음이다. 그리고 <논개> 서평은 두 번째다.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주관적인 감상 위주로 채워진 것 같아서 다시 쓰기로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김별아 작가를 주목하는 독자들이 많고, 그만큼 그의 작품 <논개>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 혹은 비난의 말들도 많은 모양이니 그렇다. <논개>를 아직 읽지 못한 사람들의 <논개> 선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논개> 책 소개글을 본 순간부터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논개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우리가 위인전이나 역사책에서 만나는 위엄 있는 위인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기생인 줄로 알았다. 기생은 나라 위해 몸 바치지 말란 법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 특수한 신분과 그보다 더 특수한 죽음에 매혹된 것이 사실이다. 

 

 

소설은 ‘논개’의 죽음의 순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날아올라, 가마아득한 허공에 몸을 부렸다. (중략) 죽음이 두려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이 더 두려운가. (중략) 물속은 지옥의 밑바닥같이 추웠다. (중략) 공포, 싸늘하고 후끈한 두려움, 그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신조차 곧 사라지고 말리라는 생생한 깨달음. 멈추었던 호흡의 벽이 무너지며 멱통으로 담수가 밀려들었다. 갑자기 팽창된 핏줄은 불똥을 맞은 뱀처럼 요동쳤다. (중략) 죽기 싫다. 살고 싶다. (중략) 들이치는 핏물과 솟구치는 토혈이 한데 뒤엉켜 그녀의 입을 막는다. 향기로운 입이 끈끈한 피로 가득 찬다. 역한 비린내에도 불구하고 내치는 힘보다 들이치는 힘이 강하니 핏물은 좁은 목구멍을 찢을 기세로 꿀꺽꿀꺽 밀려든다. 온몸의 통점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눈을 홉뜬다. 어딘가가 산산이 부서져 가는 모양이다. 갈가리 찢기는 모양이다. (중략) 그와 함께 흐르고 흘러 끝끝내 영원의 바다에 닿으리라. 그녀는 춥고 어둡고 강압한 심연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이 첫 장을 읽으면서,‘춥고 어둡고 강압한 심연’속에 떠 있는 듯 숨이 차올랐다. 산산이 부서지고 갈가리 찢겨가는 논개와 함께 나도 죽어갔다. 이처럼 실감적인 묘사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가히 충격적이었다. 죽음의 묘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죽음의 묘사는 논개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작가가 논개의 죽음의 순간으로 소설의 문을 연 것은 어쩌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 아니었을까. 역사가 규정한‘순국열사, 논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죽음 앞에서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생에 대한 미련에 몸부림하였던 나약한 인간존재. 그렇다. 소설, <논개>에서 나는‘위인, 논개’가 아니라 ‘인간, 논개’혹은‘여성, 논개’를 만났다. 김별아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논개는‘꽃과 나무를 사랑하여 아끼고, 매어놓은 개의 배를 걷어질러 분풀이로 삼지 않고, 주인 없는 고양이와 밥찌끼를 나누는’고운 마음 씀씀이를 지녔다. 억울하게, 혼인 빙자에 연루되어 노예 신세로 전락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고달픈 운명을 원망하지 않는다. 여린 몸으로 감당하기 괴로운 힘든 일도 꿋꿋하게 해낸다.‘신세가 곤고해서 입을 열면 쏟아지는 말이 시비하거나 남을 헐뜯는’사람들 사이에서도 논개는 마음의 우물을 더럽히지 않는다. 모두가 피하고 싫어하는‘업이’에게도 진심을 준다. 이처럼, 작가가 묘사하는 논개는 흠 없는 완벽한 인간성의 소유자다. 이러한 평면적 인물 묘사는 전형적인 위인전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작가는‘위인, 논개’를‘인간, 논개’로 그리고자 시도했지만, 결국 작가 자신도‘위인, 논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인다. 논개가 사랑한‘최경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도 대개 이처럼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논개>의 테마는‘사랑과 죽음’이라 하였다. 여기서,‘사랑’이라 함은 최경회와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인데, 최경회와 논개의 사랑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사랑하는 자의 복수를 위해 죽음을 택할 정도라면 그 사랑의 과정에 분명 뭔가 특별하고 절절한 사연이나 마음이 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이 부분이 무척 빈약하게 처리되어 있다.

 

 

최경회의 표정과 말은 예사로웠다. 하지만 논개는 단박에 그의 의중을 파악했다. 정작 그가 하려는 말은 그가 하지 않은 말들 중에 있다. 논개가 하고픈 말 역시 언제나 자신이 하지 못한 말들 중에 있었다. 넘치는 마음을 담기에 말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감정 묘사는 작가의 목소리 대신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야 했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들의 넘치는 마음을 독자에게 전하기에는 등장인물들의 말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또한 논개와 최경회의 만남의 순간들은 토막토막 짧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어서 독자의 감정이입에 어려움을 준다. 반면, 임진왜란의 상황 묘사는 활발하게 되어 있다.


긴장을 푼 채 낄낄거리며 음탕한 농을 지껄이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썩은 볏단처럼 나가쓰러졌다. 황진의 서슬 푸른 칼날이 빛날 때마다 일본 병사의 목이 두부마냥 섬벅섬벅 베어졌다. 순식간에 몸이 떨어진 머리통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흙바닥에 굴렀다. 창에 맞아 삐져나온 내장을 끌며 달아나다가 자기 내장에 발이 걸려 자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논개는 지아비 최경회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일본의 장수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는 은인이면서 정인이면서 세상을 향해 트인 창문이었고, 그를 사랑하는 그녀 자신이기도 하였으므로.’분명 어떤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한낱 사랑에 목 맨 여인, 그래, 논개를 고작 이렇게 그려냈느냐고.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대단한 애국자이거나 사랑과 죽음을 경멸해서 그렇기보다는, 앞서 내가 말한 논개와 최경회의 사랑의 묘사에 대한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설 <논개>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김별아 작가는 많은 애를 썼을 것 같다. 많은 참고 문헌들을 읽은 것은 차치하고 - ‘논개’는 이미 하나의 이미지로 우리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역사적 인물이다. 본래의 이미지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새로운 이미지를 잘 완성시켰더라도, 원래의 이미지를 품고 있던 사람들을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많은 고민을 하여 썼을 것이다. 이런 설득력 없는 말은 거두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소설을 읽어볼 만한 것으로 가치를 높이는 요소는 그녀의 뛰어난 어휘력에 있다. 글쓰기 실력이 뛰어난 작가다. 지나친 수식어의 사용은 문장의 단박한 맛을 해치는 면이 없지 않지만, 느슨한 마음으로 읽으면 오히려 읽는 즐거움을 더해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글쓰기 실력만으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논개>에는 빛나는 글솜씨는 있지만, 정작 작가가 테마로 삼았던‘사랑’은 결핍되어 있다. 이러한 결핍과 과잉의 요소들로 인해 <논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지만, 아쉬움만큼 애정이 많이 가는 것은 작품 곳곳에 녹아 있는 감동적인 문장들 때문일까.


<논개>에 대한 평이 좋지 않다는 말이 들려 이렇게 서평을 쓰는 것인데, 별로 설득력이 없는 글이 된 것 같다. 오히려 논개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키우는 작용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처럼 <논개>의 소소한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소설 속,‘논개’의 말로 이 부족한 글을 마친다. 

 

 

나는, 나를 모르면서 하는 사람들의 말 따위는 상관없다. 

 
                                                                              . H07082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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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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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탓에 역사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얕다. 그래서 더욱 역사를 다룬 책은 다음에 읽자, 하고 미루게 된다. 그런데 ‘역사 속 인물’ <논개>가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지극히 단순한 이유였다. 바로 그녀의 죽음이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낀 두 손으로 일본의 장수를 포박한 채 남강 절벽에 몸을 던진 그녀의 죽음은 얼마나 소설적인가. 만 열아홉, 꽃다운 나이의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사는 논개를 순국열사라 한다. 그러나 김별아 작가의 말처럼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 역사는 사실보다는 관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역사’는 ‘뒤돌아보기’이기 때문이다. ‘그림자 쫓기’이기 때문이다. 이 관념은 시대의 현실과, 각기 다른 관점을 취하는 사람들 속에서 조금씩 변모한다. 그래서 역사를 시대의 그림자라고도 한다. 김별아 작가는 바로 지금의 시대 위에 논개라는 역사 속 여성의 죽음을 놓고 재조명한 것인데, 나라를 향한 사랑보다는 ‘지아비를 향한 사랑’에 초점을 맞춰 논개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고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훌륭한 논개의 정신을 손상시켰다고 흠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산홍’이 비웃었듯,  ‘그깟 사랑 타령’하는 여인으로 전락시켜 놓았다고. 그런 사람은 ‘소설’을 읽을 자격이 없다. ‘소설’은 상상하는 자들의 놀이터니까. 아울러, 앞서 내가 말한 ‘역사’에 대한 개념에 비춰 보면 역사 또한 상상의 산물이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역사 또한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수정되고 변형된다. 소설, <논개>에서 ‘순국열사 논개’를 만났다면 나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역사책이 아니라 소설책을 읽은 거니까. 지금의 시대에 ‘애국’ 운운하는 소설을 누가 흥미있게 읽겠는가. 하지만 ‘사랑’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이의 공감을 자아내는 주제다. 요즘 시대에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논개의 그 순정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논개의 죽음은 고통스러웠던 생에 대한 보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녀의 죽음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축복해주고 싶다. 그녀의 죽음을!

 김별아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풍부한 어휘 사용에 감탄했다. 문장 곳곳에서 반짝이는 화려한 수식어의 남용에는 다소 요란스럽다고 느껴져 읽는 감동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이러한 문체는 김별아 작가만의 개성이 아닌가 한다.

 

                                                                                                 .  H07082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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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8-2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 놓고도 읽지 못한 책인데, 님의 친절한 리뷰에 대략 이해하고 갑니다.
'소설은 상상하는 자들의 놀이터'라는 말~~~~ 아 멋집니다!!
 
새벽예찬
장석주 지음 / 예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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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뜨겁습니다. 집요한 태양의 시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왜틀비틀합니다. 매미는 짧은 생을 울고, 앞집 선미네 집에서는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는가 봅니다. 즐거운 환호성이 매미 울음에 어우러집니다. 여름의 소리지요. 온종일 작열하던 태양이 장렬하게 죽어가면서 자줏빛 피로 하늘을 물들이면, 짧은 낮잠에서 깨어나 뒤뜰에 있는 토끼집 앞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 ‘새벽예찬’도 그렇게, 토끼집 앞에서 읽히곤 했지요. 이 책에는 사계(四季)가 담겨 있습니다. 여름날의 독서, 장마, 태풍, 매미울음, 앵두, 복숭아, 호박잎 쌈, 검푸른 여름 숲의 그늘과 향기, 가을날의 안개, 불면, 고독, 겨울밤의 회상, 봄날의 뻐꾸기 울음, 라일락 나무 아래 묻힌 강아지의 시체...... 시인의 잔잔한 목소리로 이런 것들이 그려지지요.

 

 

새벽의 문들은 닫혀 있습니다. 안개는 무엇인가를 배달할 게 있다는 듯 그 닫힌 문들을 일일이 두드립니다. 안개는 염병. 안개 속에는 죽어가는 누군가의 신음이 섞여 있습니다. 안개는 아직도 금생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떠나지 못한 채 머뭇대는 망자의 혼입니다. 때로 안개는 군화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몰려오는 진압군이지요.

                                                    - <안개, 안개> 중에서

청춘의 무모한 열정과 방황, 무의미를 거치고 이제는 고요한 평화의 숲에서 호흡하는 작가의 감상이 신선한 새벽 공기처럼 행간을 떠다닙니다. 읽는 이의 지쳐있는 정신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지요. 일상의 소소한 것들 속에서 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순수한 기쁨을 느끼며 웃는 시인의 삶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자연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두고 그 안에서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시인은 자연을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먹는 일’에 정성을 많이 들입니다. 손수 음식을 만들어서 맛있게 먹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몸을 돌보는 일이 곧 마음을 돌보는 일이라고.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 치고 마음을 가꾸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에 덧붙여 저의 짧은 소견을 덧붙이자면,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곧 자연과 삶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자세겠지요. ‘먹는 일’의 귀중함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어린 별 두엇 뜬 초저녁 하늘을 등지고 부엌에 들어가 혼자 먹을 저녁밥을 짓습니다. 그렇잖아도 뭘 먹을까, 하던 참에 윗집 태정이 어머니가 텃밭에서 딴 애호박 두 덩이를 갖고 어둑어둑한 대문 길을 밟으며 내려왔습니다. 오늘 저녁 반찬은 호박젓국이지요. 애호박 썰어 참기름 두른 냄비에 볶은 뒤, 마늘 한 숟갈, 새우젓 한 숟갈, 고춧가루 약간, 물 한 컵 넣고 자작자작 졸아들 때까지 끓입니다. 날 궂어 창호지 바른 문짝에 싸락싸락 싸락눈 부딪치는 초겨울 저녁나절 쌀뜨물 받아 새우젓 풀어 끓인 어머니의 호박젓국이 제 피를 만들고 뼈를 키웠지요...... 비린 게 생각이 나서 고등어를 구웠습니다. 모시조개를 넣은 시금치 된장국이 끓는 동안 전기밥통에서 김이 오릅니다. 생쌀들은 전기밥통 속에서 눈 감고 열반에 드는 것이지요. 오호라, 밥 먹는 것은 아직 열반에 들지 못한 자가 이미 열반에 든 것들을 몸 안으로 모시는 일이었구나!

                                                      

                                                          - <호박젓국> 중에서 

장석주 시인은 노자와 장자와 공자 읽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글의 어귀마다 노자와 공자의 말씀을 심어 놓았는데, 그 말씀에 담긴 뜻과 시인의 글이 맞춤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흠모하여 좇아왔던 삶의 이상, 평화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합니다. 

팔월이면 행복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행복하게 하는 건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있다는 것. 살갗 위에 촛농처럼 떨어져 내리는 태양의 빛들, 그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 가끔 숨넘어가게 웃을 수 있다는 것. 맛있는 소보로 빵 같은 추억들을 갖고 있다는 것.

                                                           

                                                                   - <팔월> 중에서 

 

그 값진 평화의 날들 속에서 시인은 시를 쓰고 책을 읽습니다. 반찬을 만들고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밥알을 씹어 음미하듯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합니다. 

 

불같이 지나간 사랑, 단 한 번의 사랑이 왜 없겠습니까! 그것 없이 시를 써왔다면 제 시는 종이에 그린 유치찬란한 무지개, 혹은 헛된 백일몽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터이겠지요. 어느 날 ‘새’가 삭막한 가슴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새’는 스물한 살이고, 저는 스물일곱 살이었지요. ‘새’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이었지요. 저는 그 앞에서 이미 너무 늙은 듯싶었지요.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의 극단에는 늘 죽음이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 <카프카를 읽던 시절> 중에서

 

그렇게 책 속에 계절이 흐르고 시인의 시간이 흐르고 생의 숨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매미울음이 잦아드는 듯합니다. 또 이렇게 한 계절이 스러지려나 봅니다. 가만히, 책을 덮습니다. 
                                                                                                       

                                                                                                                         .   H07082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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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문화의 지형도
김기봉 외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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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기 전,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면서 어떤 정의를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인터넷 국어사전 검색창에 ‘문화’라고 적어 넣었다. 

문화(文化) 


1.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문화. ‘사회적 공동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몸을 매개로 하여 사회적 관계의 망을 이루는 것’, 이 책의 서문에서는 문화의 정의를 이렇게 규정해 놓고 있다. 이러한 정의들을 두고 볼 때 ‘문화’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에게는 ‘삶의 가치와 보람’에 밀접하게 잇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이런 딱딱한 정의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더라도 이 시대, 우리들의 일상은 다양한 문화의 물결 속에서 흘러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현재를 살피고 아울러 미래를 바라보려면, 우리가 형성하고 우리를 형성시키는 문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겠다

 

 

이 책은 29개의 열쇳말(key word)에서 과거의 문화적 성취와 오늘의 문화를 짚어보고 나아가 10년 후 한국 문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비언어 퍼포먼스 / 미술품 쇼핑 / 마니아 문화 / 신화 / 독립영화 / 현대사진 / 인터넷 만화 / 공공디자인 / 놀이 / 탈민족 /  종교 / 노장 / 양성평등문화 / 미래의 가족 / 드라마 /  익스트림 스포츠 / 먹거리 / 잘 죽음 / 미래의 문학 / 집 / 행복산업 / 뇌 / 1인 미디어 / UCC / 탈학교 / 외국어 권력 / 미디어 컨버전스 / 학교도서관 / 저작권

29개의 열쇳말은 이와 같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비전문가인 독자를 위해 일반인들의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상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디’라는 지시어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인디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열거 가능한 용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추상명사다. 저항, 비주류, 간섭받지 않는 창작에의 의지, 하위문화, 자율, 독립, 자발적 가난 등등. 인디라는 지시어는 특정 사물이나 명확한 디테일 또는 구체적 상황을 가리킨다기보다 앞서 열거했듯이 주류 문화와 대척되는 어떤 일련의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어로 보는 게 타당하다. 명확하게 하나의 의미로 조율해서 쓸 수는 없지만, 당대 사회의 ‘주류적인 것’ ‘지배적인 것’과 대척하는 어떤 문화적 경향과 태도, 세계관을 통칭한다.

 

                                                   - <독립영화> 중에서




그래서 이 책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재미있다. 풍부하게 실린 사진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독서의 이해와 깊이를 더해주며, 다양한 예시들은 우리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나의 열쇳말마다 대여섯 페이지의 분량으로 엮어진 구성이 아쉬운 독자들은 장의 마지막에 실린 ‘읽을거리와 볼거리’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상업전략, 개인의 욕망 추구, 다양성, 자유, 변화. 이 책에서 내가 읽어낸 한국문화의 열쇳말이다. 미래의 문학을 전망한 장에서 순수문학과 활자문학의 퇴락과 종말을 예고하는 것을 읽으면서는 새삼스럽게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으나, 시대가 바뀌면 문학도 바뀌어야 하고 모든 것이 변하면 문학도 변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는 ‘정체(停滯)’가 아니라 ‘흐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H07082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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