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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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빵.

돈. 너무 많아도 탈, 없어도 탈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경제적 부유함이 반드시 행복의 척도는 아니지만, 행복과 돈과의 관계를 아주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 돈은 자유와 시간, 권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마카르와 바르바라 등 가난하고 소외 받은 인물들을 통해 선과 악, 타락과 구원 같은 심오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되새겨 본다. 창백한 얼굴, 고뇌에 차 있는 듯한 작가의 모습이 중첩된다. 러시아의 미래, 인류의 구원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것 같은 심각한 얼굴이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지상의 빵, 돈이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당신도 지상의 빵에 굶주렸군요.

 

생존을 위한 글쓰기


근검절약하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허영심과 낭비벽은 고질병 수준이었다. 아버지의 유산은 말할 것도 없고, 돈이 생기면 순식간에 다 써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빚까지 졌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의 낭비벽을 일종의 강박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사랑하는 모친을 여읜 상실감, 독재적인 아버지의 지배욕에서 비롯된 강박증이 합쳐져 일종의 보상심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낭비벽은 병적이었다.

그의 궁핍은 어느 정도 무절제한 베풂에 기인한다. 그가 남에게 너무 베풀어서 가난해진 건지, 아니면 가난했기 때문에 남에게 자꾸 주려고 했던 건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p.45) 

쓸데없는 겉치레와 자존심, 낭비하는 습관 때문에 그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에 더해 도덕적으로 고결한 성품 때문에 형의 유가족과 의붓아들, 알코올 중독자인 동생까지 떠맡았으니 그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그럴싸한 소설을 한 권 써서 집 한 채를 장만하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권이면 집이 두 채, 세 권이면 집이 세 채......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원고지 여백에 써놓은 자그마한 숫자들은 모두 돈의 액수였다고 한다. (p.61)


그에게 글쓰기, 문학은 돈벌이 수단이었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에 대한 선불을 받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언제나 시간에 쫓겨야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대개 거칠다. 그 스스로도 시간에 쫓겨 글을 쓰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의 잘 다듬어진 글보다 호소력을 가진다. 무엇 때문일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인물들은 악인과 선인의 뚜렷한 구별이 없다. 가난하고 소외 받은 자들이 반드시 착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것은 아니며, 추악한 인물에게서도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인간적인 등장인물들이 작품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에 빛을 더해주는 것은 작가의 사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은 작가 개인의 인생 경험에서 빚어진 것. 앞서 말했듯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돈에 쪼들리며 살아야 했다. 그야말로 돈, 돈이 원수였던 인생이었다. 돈과 바꾸기 위해 써댄 그의 작품들. 그래서 그 안에는 반드시 돈 이야기가 나온다. 돈에 울고 웃고, 돈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고, 돈 때문에 죽이고 죽는 사람들. 돈으로 얽히고설킨 사람들이 나온다.


돈, 여자, 살인. 도스토예프스키가 ‘갱생(구원)’을 위해 이용한 삼중 모티브이다. 그 얼마나 통속적인 소재인가. 그 통속성은 독자의 심리를 꿰뚫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기작가였다. 언제나 돈이 절실히 필요했던 그는 출판사의 불리한 조건도 받아들여야 했지만 벌어들이는 수입이 결코 적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가입니다. 그래서 내 작품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나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편지 중 일부다. 문학으로 구걸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써댔는데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가 프롤레타리아여서가 아니라 버는 족족 다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작가의 이면에 가장 인간적인(불완전성) 면모가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가장 통속적인 소재로 심오한 사상을 이끌어 낸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가난한 사람들/미성년/도박꾼/죄와 벌/백치/악령/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는 석영중 교수가 읽어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참 재미있다. 천재적 작가의 위대한 작품, 심오한 사상이 담긴 고전. 지레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우선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작품을 토대로 한 돈 이야기, 나아가 돈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돈 = 자유  /  돈 vs. 자유

러시아 속담에 “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냄새가 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것을 거머쥔 인간의 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돈으로 자유를 얻기도 하지만 그것에 예속되기도 한다는 사실. 필요와 욕구는 다르다는 것. 잊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자꾸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속 ‘불타지 않은 돈’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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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날의 선택
유호종 지음 / 사피엔스21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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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엄마를 지켜봐야 했다. 위암 말기. 쇠꼬챙이처럼 말라가는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말이 없었다. 좋다, 싫다, 아프다, 죽겠다,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죽어갔다. 그것이 생에 대한 체념이었는지, 인내였는지, 분노였는지, 다른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어가는 모양을 지켜보는 것이, 길고 깊은 침묵이 참 힘겨웠다는 기억만이 또렷하다. 죽음이란 것이 이렇게 고요한 것인가, 이런 것이 죽음인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보았던 죽음은 바로 그 깊은 침묵, 정적이었다. 엄마는 말을 잃었구나. 죽었구나.


어느 봄날, 그러고 보니 이맘 때였다, 홀로 죽어있는 엄마의 시신 앞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참 다행이다 그리 생각했던 것 같다. 고통을 끝낼 수 있어서. 마침 또 봄이었다. 죽음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 삶을 삼켜버리는 괴물 같으면서 한편으론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손길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의 고통이 끝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으나, 남겨진 우리들의 삶, 엄마의 빈자리는 불편하고 불안했다. 죽음은 당사자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으로 남겨지는 것.

죽음.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하나의 문제이다.  ‘나’의 죽음, 주변 사람들의 죽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루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 서정주, 「행진곡」 일부


누구나 죽는다는 것,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관념적인 것이든, 실제적인 것이든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고 싶은 문제이다. 막연한 것, 우리가 죽기 전에는 죽음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 수많은 종교들은 자기들의 신, 교리를 내세워 죽음 이후의 세계(혹은 현상)를 주장한다. 역시 그 주장들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해 볼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죽음의 관념은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게 해 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문제를 던져준다. 그 답을 찾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겠다.  

참으로 죽음이 두렵거든 우리 지금 여기에서 더 착하고 바르게 살자. 참으로 부활과 재생과 온갖 되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도망치고 싶도록 두렵거나 안타까이 그리워지거든 우리 지금 여기에서 더 사랑하고, 더 착하고, 더 바르고, 더 아름답자. (p. 99)


우리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닥칠 것이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관념이 아닌 실제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육체적 고통, 공포와 불안,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 등.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는 사람들은 우선 그 사실을 부정한다고 한다. 그럴 리 없어. 내가 죽게 되다니. 억울함에서 기인한 분노의 감정. 그동안 축적해 온 삶의 결과물들을 송두리째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분노, 애석한 마음. 삶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보는 것에서 이러한 분노가 싹튼다고 한다. 그렇지만 삶은 우리의 의지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선물 같은 것이었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 우리의 의지로 어찌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권은 우리 삶의 완성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데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던 결과이다. 목줄 잡혀 질질 끌려가는 개처럼 스러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고상하게 죽어가기를 바란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관념적 고찰에서부터 실제로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대안에 이르기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부록으로 실린 Will Paper - (유언장/의식이 분명할 때의 의료조치에 대한 요청서/특정 의료조치 요청서/의료 관련 가치관 표명서/의료 대리인 지정서)는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배려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다시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지친 삶의 마침표.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해 주었던 죽음. 그렇지만 죽어가는 엄마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엄마는 조금 더 만족스럽게 죽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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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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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씨는 오십 대 초반의 독신. 등기소에서 사무보조원으로 일한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고유한 이름을 가진 주제 씨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다. 존재감 없는 주제 씨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유명인의 신상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 우연히 한 여자의 기록부를 손에 넣게 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여자의 삶을 상상하고 추적한다. 우리가 주제 씨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여기까지다. 주제 씨가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하필 등기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 왜 다 늙도록 홀로 초라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주제 씨가 주제 씨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소설 속 인물 주제 씨와 작가의 이름이 같다. 곰곰 생각해 본다. 주제 씨(작가)와 주제 씨(등장인물)의 암시적 관계에 대해서.  

오로지 문자에 의존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의 삶을 상상하고 추적하는 주제 씨의 모습은 상상을 잉크 삼아 펜 끝을 놀리는 작가의 창조력을 연상케 한다. 급기야 여자의 죽음을 삶으로 뒤바꿔 놓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삶이란 불가항력의 존재에 의해 쓰이는 이야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가 쓰는 인생이란 작품의 등장인물이고 그의 기분에 따라 지워지거나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삶과 죽음은 그 위대한 놀이로써 스러지고 피어나는 것. 이 위대한 놀이를 통해 주제 씨(등장인물)는 '삶의 무상성'에 직면하는데, 여자의 죽음을 삶으로 뒤바꾸는 문서위조(작가의 창조력)를 통해 그 의미를 되찾는다(혹은 되찾으려는 몸부림). 주제 씨(등장인물)의 손끝에서 한 여자의 삶이 재창조되듯, 주제 씨(작가 - 주제 사라마구)의 손끝에서 주제 씨(작가들)의 주제主題가 재창조되고 있는 것을 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름(기록)을 보관하는 등기소. 하지만 주제 씨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들은 존재의 본질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  수많은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숫자와 문자로 기록해 놓은 문서들은 오히려 익명성을 자아낸다. 결국 등기소는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인 셈.


주제 씨(작가, 등장인물)는 왜 그따위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매달렸던 건가. 의미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이는 이면의 ‘그 무엇’을 찾고 싶어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찾기 위해서. 익명성에 파묻힌 한 여자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것은 결국 자신의 본질 찾기였던 것. 주제 씨(작가)는 주제 씨(등장인물)의 존재론적 방황을 통해 자신의 본질 탐구를 시도하는 한편 우리의 이름을 묻고 있다. 당신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은 무엇인가. 죽어도 죽지 않는 그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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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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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떼를 베끼다

           위선환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오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

   두 새떼가 마주 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
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본다고 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 살점
하나, 잔뼈 한 조각, 날개깃 한 개,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공중空中이다, 라고 쓴다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오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

빗소리 들린다. 비는 계속하여 내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빗소리 들린다. 내 마음 닫혀 있으면, 갇혀 있으면 그 무엇에 가 닿지도, 그 무엇이 와 닿지도 못한다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시를 적어본 적 없어 시인들이 어떻게 시를 써내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시를 읽은 적은 있으니, 제대로 읽었는지 어떤지는 모르나, 시를 대하는 마음 역시 이와 같지 않은가 한다. 시는 ‘새떼’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새떼 오가는 그곳은 공중이어서 혹은 공중과도 같은 곳이어서......

  두 새떼가 마주 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조금 더 어릴 때에는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새떼를 들일 공중 같은 것, 그런 것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러한 공중을 발견하지 못해서였을까. 아직도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서름서름한 입장이다. 그렇지만 시를 찾아 읽기는 한다. 새떼들과 마주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치는 일. 그것은 사는 일과도 잇닿아 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시, 새떼들과 맞부딪치면서 내 안에 있는 갇힌 새들을 풀어준다,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그러면 고쳐 쓰겠다. 짤막한 시 몇 줄에서 나는 공중을 발견하노라고.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
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

안도현 시인이 날려 보내준 새떼들 - 새떼끼리 관통한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자”의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인생을 탕진하는 사내, “바퀴 달린 널빤지 위에 뽕짝이 흘러나오는 녹음기와 집게발만 남은 몸을 얹은” 사내, “이차선 도로의 양끝을 팽팽하게 잡고 걷는” 장에 갔다 오는, 보퉁이를 든 부부, “주름치마 걷어올리고 양은 찜통에 오줌 누시는” 어머니,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들. “백여시처럼 클클 웃으며”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듣는”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은” 나.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 살점
하나, 잔뼈 한 조각, 날개깃 한 개,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새떼들의 부딪침을 바라보면서, 나도 거기 부딪치면서 행간의 여백, 그 공중을 날다 보면 모퉁이에서 빛바랜 흑백 사진들과도 마주친다. 김기찬 씨의 사진들이다. 복덕방 간판 앞에 나앉은 늙은 여자처럼 “얘들아, 이게 시냐, 막걸리냐!” 늘어지게 하품 한번 하고 싶어질 때에 가만히 바라보면 푸드덕 날갯짓 소리 들린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공중空中이다, 라고 쓴다

안도현 시인의 해설은 읽어도, 아니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새도, 새떼도 빈 몸이므로 굳이 그것을 채우려 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말. 위선환 시인의 「새떼를 베끼다」 - 시를 대하는, 혹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공중空中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 생각되어 인용해 보았다. 이제 다시 공중空中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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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의 남자 오셀로의 여자 - 소설에서 찾은 연애, 질투, 간통의 생물학
데이비드 바래시.나넬 바래시 지음, 박종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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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질투에 눈멀어 데스데모나를 죽인 오셀로, 남편 이외의 남자와 정을 통하는 마담 보바리를 보며 사람들은 경악한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대답하자면,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 이들(오셀로와 마담 보바리)의 인간적 나약함과 부도덕을 비난하는 우리 또한 인간이며, 우리 안에도 질투와 간통의 매커니즘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오셀로와 마담 보바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반영인 것.


인간에 의해, 인간에 관해, 인간을 위해 존재해 온 문학은 인간 본성의 결정체이다. “생명의 기록”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도덕관념과 이성적 행동양식은 인간을 동물(짐승)과 차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엄연한 생명체이며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적 역사를 통해 선별된 생물학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정체는 가족의 얼굴.
살은 썩지만 나는 계속 산다.
지난날에서 앞날에 이르기까지
특징과 흔적을 투영하고
망각을 넘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뛴다.

생존의 시한을 경멸하는
목소리와 눈과 얼굴의 선,
연년세세 물려받는 생김새,
그것이 바로 나.
죽음의 지상명령에 개의치 않는
인간이 가진 영원한 구석이다.


토마스 하디의 「유전」이라는 시는 ‘유전자의 영속성’을 예견하고 있다. 인간은 유전자를 통해 시간의 유한성에 대항해 왔다. 유전자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화, 보전한다. 리처드 도킨스는『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가 스스로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만들어 낸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인간을 움직이는 유전자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다는 것이다. 생명을 지속하려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혹은 수컷과 암컷)은 유전적으로는 물론이고 번식의 전략 전술에 있어서도 무척이나 다르지만, ‘유전자의 영속성’이라는 욕망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유전자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오셀로의 성적 질투와 마담 보바리의 간통, 신데렐라를 구박한 계모, 허클베리 핀의 반항, 삼총사의 우정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오셀로의 치명적인 성적 질투는 수컷의 번식욕에서, 마담 보바리의 간통은 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찾으려는 진화적 성공 욕망에서 야기된 결과이다. 계모가 신데렐라를 구박한 것은 신데렐라를 양육함으로 전수되는 유전자는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74년, 진화 이론가 로버트 트리버스가 발표한 논문에서 우리는 허클베리 핀과 아버지의 불화를 이해할 수 있다. 부모에게 있던 유전자가 자녀에게도 이어질 확률이 단지 5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이 진화 이론가 로버트 트리버스의 통찰이었다. 부모의 유전자 가운데 50퍼센트는 결코 부모와 자식 간에 공유되지 않기 때문에 불화가 빚어질 수 있다는 것. 한편 삼총사의 우정에서 우리는 호혜주의, 즉 “누군가가 내 등을 긁어주면 나도 그 사람 등을 긁어주는” 이기적인 책략의 위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호혜주의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진화, 보전하는 데 이득을 취한다는 진화생물학적 입장은 가슴을 선득하게 한다.


아홉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 『보바리의 남자 오셀로의 여자』는 오셀로와 마담 보바리, 신데렐라와 허클베리 핀 이하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수많은 작품 소개와 인용문들 때문에 다소 난삽한 감이 없지 않지만, 생물학적 지식과 문학적 재미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책의 큰 줄기는 ‘유전자의 영속성’이다. 태초에 유전자가 있었다. 그것들은 줄곧 이어지고 있으며 영속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리고 수많은 문학 작품들은 그 힘을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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