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찬
장석주 지음 / 예담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오늘도 뜨겁습니다. 집요한 태양의 시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왜틀비틀합니다. 매미는 짧은 생을 울고, 앞집 선미네 집에서는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는가 봅니다. 즐거운 환호성이 매미 울음에 어우러집니다. 여름의 소리지요. 온종일 작열하던 태양이 장렬하게 죽어가면서 자줏빛 피로 하늘을 물들이면, 짧은 낮잠에서 깨어나 뒤뜰에 있는 토끼집 앞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 ‘새벽예찬’도 그렇게, 토끼집 앞에서 읽히곤 했지요. 이 책에는 사계(四季)가 담겨 있습니다. 여름날의 독서, 장마, 태풍, 매미울음, 앵두, 복숭아, 호박잎 쌈, 검푸른 여름 숲의 그늘과 향기, 가을날의 안개, 불면, 고독, 겨울밤의 회상, 봄날의 뻐꾸기 울음, 라일락 나무 아래 묻힌 강아지의 시체...... 시인의 잔잔한 목소리로 이런 것들이 그려지지요.

 

 

새벽의 문들은 닫혀 있습니다. 안개는 무엇인가를 배달할 게 있다는 듯 그 닫힌 문들을 일일이 두드립니다. 안개는 염병. 안개 속에는 죽어가는 누군가의 신음이 섞여 있습니다. 안개는 아직도 금생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떠나지 못한 채 머뭇대는 망자의 혼입니다. 때로 안개는 군화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몰려오는 진압군이지요.

                                                    - <안개, 안개> 중에서

청춘의 무모한 열정과 방황, 무의미를 거치고 이제는 고요한 평화의 숲에서 호흡하는 작가의 감상이 신선한 새벽 공기처럼 행간을 떠다닙니다. 읽는 이의 지쳐있는 정신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지요. 일상의 소소한 것들 속에서 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순수한 기쁨을 느끼며 웃는 시인의 삶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자연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두고 그 안에서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시인은 자연을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먹는 일’에 정성을 많이 들입니다. 손수 음식을 만들어서 맛있게 먹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몸을 돌보는 일이 곧 마음을 돌보는 일이라고.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 치고 마음을 가꾸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에 덧붙여 저의 짧은 소견을 덧붙이자면,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곧 자연과 삶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자세겠지요. ‘먹는 일’의 귀중함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어린 별 두엇 뜬 초저녁 하늘을 등지고 부엌에 들어가 혼자 먹을 저녁밥을 짓습니다. 그렇잖아도 뭘 먹을까, 하던 참에 윗집 태정이 어머니가 텃밭에서 딴 애호박 두 덩이를 갖고 어둑어둑한 대문 길을 밟으며 내려왔습니다. 오늘 저녁 반찬은 호박젓국이지요. 애호박 썰어 참기름 두른 냄비에 볶은 뒤, 마늘 한 숟갈, 새우젓 한 숟갈, 고춧가루 약간, 물 한 컵 넣고 자작자작 졸아들 때까지 끓입니다. 날 궂어 창호지 바른 문짝에 싸락싸락 싸락눈 부딪치는 초겨울 저녁나절 쌀뜨물 받아 새우젓 풀어 끓인 어머니의 호박젓국이 제 피를 만들고 뼈를 키웠지요...... 비린 게 생각이 나서 고등어를 구웠습니다. 모시조개를 넣은 시금치 된장국이 끓는 동안 전기밥통에서 김이 오릅니다. 생쌀들은 전기밥통 속에서 눈 감고 열반에 드는 것이지요. 오호라, 밥 먹는 것은 아직 열반에 들지 못한 자가 이미 열반에 든 것들을 몸 안으로 모시는 일이었구나!

                                                      

                                                          - <호박젓국> 중에서 

장석주 시인은 노자와 장자와 공자 읽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글의 어귀마다 노자와 공자의 말씀을 심어 놓았는데, 그 말씀에 담긴 뜻과 시인의 글이 맞춤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흠모하여 좇아왔던 삶의 이상, 평화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합니다. 

팔월이면 행복해집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행복하게 하는 건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있다는 것. 살갗 위에 촛농처럼 떨어져 내리는 태양의 빛들, 그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 가끔 숨넘어가게 웃을 수 있다는 것. 맛있는 소보로 빵 같은 추억들을 갖고 있다는 것.

                                                           

                                                                   - <팔월> 중에서 

 

그 값진 평화의 날들 속에서 시인은 시를 쓰고 책을 읽습니다. 반찬을 만들고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밥알을 씹어 음미하듯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합니다. 

 

불같이 지나간 사랑, 단 한 번의 사랑이 왜 없겠습니까! 그것 없이 시를 써왔다면 제 시는 종이에 그린 유치찬란한 무지개, 혹은 헛된 백일몽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터이겠지요. 어느 날 ‘새’가 삭막한 가슴으로 날아들었습니다.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새’는 스물한 살이고, 저는 스물일곱 살이었지요. ‘새’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이었지요. 저는 그 앞에서 이미 너무 늙은 듯싶었지요. 그 사랑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의 극단에는 늘 죽음이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 <카프카를 읽던 시절> 중에서

 

그렇게 책 속에 계절이 흐르고 시인의 시간이 흐르고 생의 숨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매미울음이 잦아드는 듯합니다. 또 이렇게 한 계절이 스러지려나 봅니다. 가만히, 책을 덮습니다. 
                                                                                                       

                                                                                                                         .   H07082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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