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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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 가장 깊은 곳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그런데 머릿속 깊은 곳은 더 이상 분명하게 알아볼 수 없다. 나의 뇌는 구석으로 갈수록 점점 공기가 희박해지는 우주와도 같다. 그러나 공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머릿속 깊은 곳에 뭔가가 있음을 느낀다. 그게 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알 수 없는 그것은 이리저리 맴돌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다시 그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현재가 아닌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전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을 할 가능성도 없는 이들. 우리들에게 서커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도 바로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 아흔 살, 아니 아흔세 살일지도 모르는, 나이를 잊어버린 노인 제이콥. 이제 그의 시간은 역류한다.


이 모든 게 다 눈속임이야, 제이콥.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냐. 사람들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니까. 사람들은 우리한테 눈속임을 원해. 그게 눈속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고. 

  


우리들은 ‘진짜 같은 판타지’를 꿈꾼다. 삶에 닳고 닳은 우리 영혼을 해방시켜줄 ‘두렵고도 낭만적인 탈출구’를.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기.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가 죽어가던 그 시기, 그래서 서커스는 커다란 인기를 누렸던 것이 아닐까. ‘얼굴에 꼬리가 달린 말’이 실제로는 궁둥이를 앞으로 향한 채 돌아서 있는 보통의 말이라는 것, 400킬로그램의 뚱녀는 10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비만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도 그저 깔깔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 판타지, 곧 환상을 찾아 나섰던 이유에서일 것이다. 즐거운 눈속임을 한 잔의 감주처럼 마시고는 다시 현실의 세계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서커스단에서는 나 같은 사람도 받아준다. 죄가 좀 있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래서 서커스단을 따라 도망칠 생각이다. 

촉망받는 명문대생이었던 제이콥이 한순간 부모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서커스단에 매료되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치에서가 아니었을까. 달리는 서커스기차에 올라탄 제이콥에게 비친 서커스단은 하나의 거대한 환상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환상을 즐기려면 언제나 적당한 간격이 필요한 법이다. 서커스단의 실체를 알아가는 제이콥에게 더 이상 서커스단은 환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낭만적인 눈속임의 세계’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당한다는 것을 알고부터 제이콥은 괴로워한다. 그렇지만 끝내 그 환상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거기가 바로 집이었으므로.

 


나이를 먹다 보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 오랫동안 소망해온 것이 진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거짓말 말라고 다그치면 나는 상처를 받겠지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 잊어버려도, 누가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절대 잊을 수가 없겠지요.



간호사의 도움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는, 나이를 잊어버린 노인 제이콥의 회상 부분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 것은 ‘현재를 제집처럼 휘젓고 다니는 과거의 유령들’에 휩싸여 있는 제이콥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이미 그에게 시간은 사라지고 없다. 과거도 현재도, 물론 미래도 없다. 시간이 사라진 곳. 그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환상의 세계만이 있다. 그곳에는 분홍빛 시퀸드레스를 입은 말레나가 코끼리 로지의 등에 탄 채 미소를 띠고 있고, 사악한 오거스트가 날카로운 갈고리를 휘둘러 로지의 몸뚱이를 후려친다. 난쟁이 월터와 캐멀이 기차칸에서 몰래 술을 마신다. 그에게 진실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 환상의 세계뿐이다. 그는 하품하듯 그 세계를 유영한다. 그것이 늙어가는 즐거움일까. 혹은 서글픔일까.


서커스 공연이 끝났다. 공연은 대단히 훌륭했다.

 

즐거운 눈속임. 우리들이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이유도 바로 그 눈속임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읽?기’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글을 부리는 솜씨가 날렵한 곡예사(작가)의 눈속임 때문이다. 기괴하고, 서글프고, 아름다운 곡예! 나는 그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번쩍이는 스퀸 장식을 두른 코끼리 로지, 로지 등에 올라탄 분홍빛 시퀸복을 입은 말레나, 로지의 몸뚱이에 갈고리를 휘두르는 오거스트, 그들을 지켜보는 제이콥. 꿈을 꾼 것일까. 나는 분명 조금 전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여기가 어디지?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판타지에 대한 갈망은 비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노인은 꿈을 꾸고 우리들은 소설을 읽는다. 지금, ‘낭만적인 눈속임’이 필요하다면 여기 매혹적인 서커스단으로 오시라. 빅쇼까지 도달하려면 500페이지를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만 빅쇼에 앞서 사이드쇼에도 볼거리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믿거나 말거나! 보고 나면 과연 놀라 자빠진다. 신사숙녀 여러분! 세계 최고의 볼거리, 놓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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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불행하다
카리 호타카이넨 지음, 김인순 옮김 / 책이좋은사람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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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불행하다. 말다툼 도중 감정이 격해져 난생 처음으로 휘두른 주먹,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렇다. 난생 처음으로 휘두른 주먹이었다. 음식 만들고, 청소하고, 아이 돌보면서 가정의 행복, 여성의 해방을 위해 힘써온 이 남자, “스스로를 가정전선의 참전용사라고 부르는” 이 남자는 그래서 억울하다. 단 한 번 휘두른 주먹이 아내의 얼굴뿐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가정의 행복’에도 멍 자국을 남긴 채 ‘집’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집’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집마련.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다. ‘집을 사고 대부금을 상환하는 것은 어느 정당을 지지하든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봉하는 종교’가 된 것이다. ‘집’은 “콘크리트와 목재와 못과 단열재를 얼기설기 뜯어 맞춘 임시 피난처”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즐거운 곳에서 오라 하여도 쉴 곳은  내 집뿐인 이유. ‘집’은 장소이기 이전에 “믿음, 희망, 분위기”인 것이다. 한순간에 ‘믿음과 희망’을 잃어버린 ‘그 남자’는 그래서 불행하다. 

그 남자의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세대 공동주택에 사는 불행한 사람”에 속해 있는데, 집 나간 아내는 단독주택의 단꿈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딸, ‘가족’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꿈의 ‘내 집’을 마련하는 것뿐이라고 판단한 그 남자는 그래서  ‘집’을 찾아나선다. 

핀란드의 작가 ‘카리 호타카이넨’의 작품『그 남자는 불행하다』는 ‘좌충우돌 내집마련기’이다. 소설은 이 남자의 ‘집 찾는 여정’을 따라가는 동시에 다세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편과 갈등상황, 호화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허영을 능청스러운 유머로 그려내고 있다. 집을 사려는 사람과 집을 팔려는 사람, 그리고 집을 수호하려는 사람 간의 갈등구조도 흥미롭게 읽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집’의 가치와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콘크리트와 목재와 못과 단열재로 이루어진 집’을 찾아다녔지만, 그의 아내가 원했던 것은 ‘사과나무 아래 그네에 앉아 맨발로 잔디를 스치고, 지하실 화로에 불을 지펴 사우나를 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원한 것은 ‘가정의 행복’이었다.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그 남자는 그래서 불행하다.  불행한 그 남자는 오늘도 꿈을 꾼다. ‘즐거운 나의 집’은 그의 현실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그 남자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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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대교북스캔 클래식 23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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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화자는 허구적 인물이며, 그 허구적 인물은 마음의 강물 깊숙이 드리운 사색의 낚싯줄에 걸려든,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의식이라는 물고기를 요리하기 시작한다. 허구적 인물은 또 하나의 허구적 공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허구 속에 『 자기만의 방 이 들어 있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은,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여성과, 여성이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성과 여성이 쓴 픽션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여성과 여성에 관해 쓴 픽션이 될 수도 있어요. 

 


이 책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픽션'을 거론하면서 여성과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본질 탐구를 목적하고 있는데, 여성의 본질을 향해 항해하는 배의 이름은 ‘자기만의 방’이다. 여성이 글을 쓰면서 살아가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자기만의 방’은 사회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만의 방에 ‘나’라는 물고기를 풀어놓고 마음껏 헤엄치도록 하고 있다. 그 물고기를 따라가다 보면 16세기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와 그들 개인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문학 작품들과 만날 수 있다.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등 여성 문학가들의 작품, 사상과 셰익스피어, 괴테, 볼테르, 존 키츠 등의 남성 문학가들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대우를 읽을 수 있다. 그 편견이란 ‘약한 도덕의식’, ‘이상주의’, ‘작은 크기의 두뇌’, ‘보다 적은 몸의 털’, ‘정신적, 도덕적, 신체적 열등함’, ‘강한 애정’, ‘더 긴 수명’, ‘허영심’ 등이었다. 



그토록 불합리한 시대에 자기만의 방이 결여된 여성들의 글쓰기는 ‘헤아릴 길 없는 사회를 상대로 홀로 서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개성이 전혀 없다’는 포프의 말에 반하여 자신의 개성을 오롯이 드러내야만 했던 그 시대 여성 문인들은 그래서 ‘실성하거나, 총으로 자신을 쏘거나, 반은 마녀로 반은 마법사로 두려움 속에 조롱을 받으며 외딴 오두막에서 외롭게 살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19세기 말까지도 여성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의 양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부당한 사회적 조건은 그녀들에게 익명성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만만하고도 탐구적인 자세로 진실을 찾아나섰던’ 그녀들 대부분은 그리하여 그토록 쓰디쓴 좌절을 맛봐야 했다. 

 

 

부당한 사회적 조건이라 함은 앞서 제시한 편견이나 관습과 같은 관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결혼, 출산, 육아라는 현실적인 조건 또한 여성의 자아개발과 창의적 글쓰기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현실은 오늘날의 그것과도 맞물려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게 마련이고, 그 변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가 여성 고유의 역할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전히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일은 치명적이에요. 남성적인 여성이나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만 해요. 여성이 어떤 불만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또는 정당하더라도 어떤 원인을 변명하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여성임을 의식하고 말하는 행위는 치명적이에요. 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쓴 글을 모두 소멸될 운명에 처해져요. 풍요롭게 될 수가 없지요.



나는 열렬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들으면 불편하다. 그들의 굳센 주장에서 여성적, 남성적 편견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의 편견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은 여성과, 여성의 글쓰기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그러한 페미니스트들을 대할 때의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가 제시하는 ‘자기만의 방’은 남성을 몰아내고 여성 혼자 들어앉은 방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된 양성적 존재의 자유,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 그리고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역설說 은 새로운 것은 못 된다. 그렇지만 그녀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이성이 어우러진 글맛은 그 식상함을 상쇄시키고 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즘 창작 기법은 옮긴이도 인정했듯 다소 ‘산만하게도 느껴’지기도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한 문장을 좋아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하겠다.

 

 


‘실재를 찾아내고 수집하여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 작가의 몫’이라고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허구적인 글쓰기의 세계, 그 방으로 들어가 보자. 그 방은 우리 모두를 위해 열려 있다. 우리 모두의 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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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돌봐줘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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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마드무아젤 시클레가 반소매 잠옷 차림으로 샤워용 모자를 쓴 채 피의 늪 속에 널브러져 있다. 그녀 옆, 그녀의 고양이 퐁퐁이 혀로 입술을 핥고 있다. 그녀 위, 인간이라 명명할 수 없는 한 사내가 음산한 그림자로 피해자를 덮고 서 있다. 큰 키에 갈색머리, 그는 찻숟가락으로 파낸 피해자의 눈알을 호두알 굴리듯 굴리며 이렇게 되뇐다. “호기심이 너무 많은 건 좋지 않아! 좋지 않단 말이야!” 경찰은 그 정신병자를 제압하고, 장미색과 흰색이 섞인 식탁보로 서둘러 희생자의 시신을 덮는다. 그사이, 고양이가 눈알 하나를 이빨 사이에 물고 달아난다. 둘스 블레트 가는 지금 충격에 휩싸여 있다.

 


소설은 엽기적인 살인사건 현장의 묘사로 시작된다. 책의 맨 처음부터 나는 흐뭇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즐거운 긴장감 속에서 책장을 넘겨갔다. 막스 코른느루와 으젠 플뤼슈. 이들은 둘스 블레트 - 살인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아파트다 - 5, 6가에 위치한 아파트에 같은 날 입주한 이웃이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아파트 4층에 각각 입주한 그들은 이사하는 첫날부터 충돌을 일으킨다. 그 사소한 충돌은 하나의 전조였을까. 그때부터 이들은 맞은편 아파트 4층 창가로부터 날아오는 병적인 감시의 시선에 시달린다. 이러한 내용은 막스 코른누이와 으젠 플뤼슈의 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불안에 사로잡히다 못해 공포감에 시달리는 두 인물의 독백은 그러나 굉장히 익살스럽다. 우리 익살꾼들의 일기를 통해 나는 이들의 직업이 각각 달걀 세밀화가와 라디오드라마 작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라두 부인의 편지 9.21.THU

 

사랑하는 엄마, 놀라운 소식이 하나 있어요. (...) 우리 건물에 유명인사가 또 한 사람 들어왔어요! 막스 코른느루 씨라고...... 들어보셨어요? 인기리에 방송 중인 라디오 연속극을 쓰신대요. (...) 그분은 그 불쌍한 시클레 양이 살해당한 방 두 칸짜리 아파트로 이사 오셨어요. 기억나세요? 지난 초여름 맞은편 건물의 한 미치광이에게 살해당안 여자 말이에요! (...) 사실 절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해요. 브리숑 부인 말이에요. 2층에 사는 미망인이요. 그 여자가 키우던 발바리 강아지 엑토르 기억나세요? 그런데 그 강아지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 후로 브리숑 부인이 제정신이 아니에요.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강아지가 살해됐다고 외치고 있어요. (...) 종일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세입자들을 귀찮게 한다니까요. 사나운 눈길을 하고는 계속 혼자 뭐라고 중얼거려요.


막스 코른느루와 으젠 플뤼슈. 익살스러운 두 편집증 환자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독백에 한창 빠져있는데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했다. 5가 아파트 관리인 라두 부인과 2층 세입자 브리숑 부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편지 형식을 통해 그 정체를 드러낸다. 라두 부인은 소설 진행에 있어 객관적 서술자의 입장에 놓여있다. 아파트 관리인이라는 그녀의 위치는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절하다. 라두 부인이 양로원에 있는 엄마에게 - 그녀의 엄마는 일 년 전에 죽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 쓰는 편지에는 관리인으로서의 세입자에 대한 평가와 일상의 세세한 부분이 잘 그려지고 있다. 브리숑 부인에 대한 소개에 앞서 또 한 명의 서술자를 소개하고 넘어가겠다. 소설이 결말에 이를 때까지 베일에 싸여있는 이 서술자는 전지적 위치에 있는데, 이야기를 진행시키기보다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입장이다.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앞으로 엄청난 비밀을 터뜨릴 장본인이다. 다음으로 브리숑 부인은 쓸쓸한 미망인이다.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자식처럼 키워온 애완견 엑토르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을 넘어서 이미 광기에 사로잡힌 가엾은 이 여인은 경찰서장과 부동산중개업자 노데 씨에게 사건 해결을 촉구, 아니 협박하는 편지를 써댄다. 엑토르. 드디어 개가 등장하였다.


제목  개를 돌봐줘 . 그 개가 이 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엑토르의 죽음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발단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코른느루와 플뤼슈의 편집증 놀이는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이다. 엑토르의 죽음을 시작으로 코른느루와 플뤼슈의 일기, 라두 부인의 편지에는 또 다른 아파트 세입자들, 그러니까 새로운 등장인물이 속속 등장한다. 코른누르와 같은 층에 사는 괴짜 영화감독 자모라, 에로소설 작가 라자르 몽타냑,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꼬마소년 브뤼노, 건물 청소부 푸생 부인과 자폐증을 앓고 있는 그의 아들 가스파르 등등. 그리고 이들은 엑토르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구성과 전개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데, 두 번째 죽음이 발생했다. 고무줄로 두 발을 묶인 브리숑 부인이 창가로부터 튀어나와 아파트 현관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채 죽은 것이다. 브리숑 부인의 광기를 잘 알고 있는 아파트 이웃들은 그 엽기적인 죽음의 행태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엑토르의 죽음에 이어 브리숑 부인의 죽음에 뭔가 석연치 않은 배후가 있으리라는 의혹을 품게 된다. 코른느루와 플뤼슈의 편집증 놀이도 갈수록 물이 오르고 있다. 그들의 익살과 함께 긴장감도 고조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사이좋은 편집증 놀이도 더 못하게 되었다. 세 번째 죽음이 발생했는데, 그 죽음의 주인공은 플뤼슈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라파엘 뒤모제의 진술 12.11.MON

“플뤼슈 씨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나요?” “한밤중에 집으로 찾아와 절 공격했어요! (...) 플뤼슈가 제 설치류 중 하나를 인질로 잡았어요. 꼬리를 쥐고 흔들어 엄청난 고통을 주었죠! 가슴을 에는 그 애의 비명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답니다!” “플뤼슈 씨가 비명을 질렀나요?” “아뇨, 제 생쥐가요! 녀석의 가는 콧수염이 고통으로 바르르 떨렸죠. (...) 그자는 야만인이었어요! 저에게 설치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털이 보송보송한 그 작은 뭉치들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죠? 보세요, 제가 보여드리려고 한 마리 가져왔어요.” “당장 치우세요!” “뽀뽀 한 번 해주세요! 제복 입은 사람들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 총 집어넣으세요, 너무 무서우니까. 이 작고 귀여운 머리를 좀 보세요.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앙리에트.”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재직 중인 J.M 에르의 처녀작  개를 돌봐줘 는 처녀작이라는 수식언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뛰어난 구성과 전개방식, 탁월한 유머감각과 통찰력을 겸비한 문장력! ( 여기에는 뛰어난 번역가 이상해 씨의 공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추리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지만, 이토록 익살스러운 추리소설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꾸 ‘익살스러움’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는 무엇보다 긴장감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긴장감을 유발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긴장감, 물론 있다. 그렇지만 이 긴장감은 암울하지 않고 유쾌하다. 분명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삽입되어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개성과 희극적 모양새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신빙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소설을 읽는다. 그들은 거기서 기상천외한 모험, 가장 진한 감동, 가장 놀라운 인물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설가는 불안에 재갈이 물린 사람이다. 그는 이 무시무시한 질문에 끊임없이 부딪힌다. ‘내 이야기에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 그 문제에 조금이라도 지배당하게 되면, 그는 야망을 한정시키고, 생각을 검열하고, 상상력을 거세시키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은 누구나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 하지만 배짱 좋게도 독자에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설가를 추종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쉽게 쓴다며, 전혀 사실임직하지 않다며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많은 경우 허구보다 더 황당무계하다. 모두가 언젠가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252페이지에서부터 나는 범인을 예상하기 시작했고, 분명 그 예상이 맞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아, 여기서 언급하는 ‘범인’이란 어떤 일에 대한 범인인지 밝히지 않았다. 뻔한 거 아냐? 엑토르를 죽인 자, 브리숑 부인을 죽인 자, 플뤼슈를 죽인 자. 이렇게 단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살인사건의 범인이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다.) 나는 이번에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다. 속단하지 말 것. (우리는 이 소설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단정할 수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결말을 예측할 수 없으리라고. 이 책을 선택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우리는 J.M 에르를 향해 외치게 된다. 후속작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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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꿈 뒤에
유미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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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들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어쩔 수 없도록 짜여진 시간의 사슬 속을 더듬더듬 걸어가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아침 햇살, 달빛, 별빛, 바람, 구름, 한밤중의 빗소리, 냄새, 소리... 보고 듣고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안다는 것의 한계가 아닌가. 비와 꿈 뒤에는 그 ‘너머’의 이야기이다.


우게츠 雨月란 건 말이다. 비 오는 날의 저녁달을 말하는 거야.
비가 오면 달이 안 보이지?
보이지는 않지만 없어진 게 아니야. 어딘가에 있지.

아메는 열두 살의 여자아이. 나비 사진 찍으러 타이완에 간 아빠를 기다리며, 콘크리트 벽과 벽 사이에 고통스럽게 끼어 있는 나무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리고 이 주 후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가 돌아오고부터 아메의 세상은 뒤바뀐다. 아빠는 비에 젖어 돌아왔고, 아메의 세상엔 그때부터 비가 내린다. 『비와 꿈 뒤에』는 아메가 비의 빗속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이 그리움으로 반짝이며, 1초 1초가 맥박 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것과 여기에 없는 것 한가운데
아는 것과 모르는 것 한가운데
소녀는 홀로 서 있었다.

아빠와, 아메를 떠나간 엄마와의 관계, 호쿠토와의 우정 등 가족/성장소설이 기본 얼개로 되어 있는데, ‘기묘한 이야기’ 식의 괴담이 소설 전반에 비처럼, 처럼 내리고 있다. 이 비(의 비)는  ‘기다림’과 ‘죽음’ 을 품고 있다. 중양절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던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서 자살하고 혼이 되어 동생 곁으로 돌아왔다는 ‘국화꽃 언약’, 장사를 하러 나간 후에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내가, 7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음식을 마련해주고 나서 사라진다는 ‘아사지의 집’, 프시케와 에로스를 연상시키는 두루미 아내의 전설, 마법에 걸려 바다 밑 항아리 속에 갇힌 대마왕 이야기 등 -




작년 크리스마스 때 아빠가 사준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마법에 걸려 바다 밑 항아리 속에 갇힌 대마왕 이야기가 있잖아. 처음에는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땅 위의 보물창고를 열어주마.’ 하다가 400년이 지나자,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마.’ 하면서 제법 톤이 떨어지지. 하지만 항아리가 어부의 그물에 걸린 건 1800년이나 지난 다음이었어. 그 사이에 ‘나를 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녀석을 죽여버리겠어.’ 하고 생각이 180도 바뀌잖아. 대마왕이 자기를 구해준 어부에게 말하지. ‘오오, 내 구세주여. 각오하거라!’

 

이 기묘한 이야기들은 ‘아메의 기다림과 아빠의 죽음을 둘러싼 이상한 이야기’ 의 코러스와도 같이 소설 곳곳에서 비(의 비)로 내리고 있다.

때로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그토록 확고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흐늘거리다 말끔히 지워져 버리기도 한다. 또 불현듯 비를 품은 비가 퍼붓기도 한다. 물론 이것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나의 세계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현실인 것이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시공간적 현실, 그 너머의 현실.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사슬 사이를 두리번거리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더욱 ‘필사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저 너머, 끊임없이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비와 꿈속에서. 비와 꿈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면서, 두려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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