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기만의 방 ㅣ 대교북스캔 클래식 23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화자는 허구적 인물이며, 그 허구적 인물은 마음의 강물 깊숙이 드리운 사색의 낚싯줄에 걸려든,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의식意識이라는 물고기를 요리하기 시작한다. 허구적 인물은 또 하나의 허구적 공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허구 속에 『 자기만의 방 』이 들어 있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은,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여성과, 여성이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성과 여성이 쓴 픽션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여성과 여성에 관해 쓴 픽션이 될 수도 있어요.
이 책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픽션'을 거론하면서 여성과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본질 탐구를 목적하고 있는데, 여성의 본질을 향해 항해하는 배의 이름은 ‘자기만의 방’이다. 여성이 글을 쓰면서 살아가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자기만의 방’은 사회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만의 방에 ‘나’라는 물고기를 풀어놓고 마음껏 헤엄치도록 하고 있다. 그 물고기를 따라가다 보면 16세기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와 그들 개인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문학 작품들과 만날 수 있다.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등 여성 문학가들의 작품, 사상과 셰익스피어, 괴테, 볼테르, 존 키츠 등의 남성 문학가들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대우를 읽을 수 있다. 그 편견이란 ‘약한 도덕의식’, ‘이상주의’, ‘작은 크기의 두뇌’, ‘보다 적은 몸의 털’, ‘정신적, 도덕적, 신체적 열등함’, ‘강한 애정’, ‘더 긴 수명’, ‘허영심’ 등이었다.
그토록 불합리한 시대에 자기만의 방이 결여된 여성들의 글쓰기는 ‘헤아릴 길 없는 사회를 상대로 홀로 서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개성이 전혀 없다’는 포프의 말에 반하여 자신의 개성을 오롯이 드러내야만 했던 그 시대 여성 문인들은 그래서 ‘실성하거나, 총으로 자신을 쏘거나, 반은 마녀로 반은 마법사로 두려움 속에 조롱을 받으며 외딴 오두막에서 외롭게 살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19세기 말까지도 여성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의 양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부당한 사회적 조건은 그녀들에게 익명성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만만하고도 탐구적인 자세로 진실을 찾아나섰던’ 그녀들 대부분은 그리하여 그토록 쓰디쓴 좌절을 맛봐야 했다.
부당한 사회적 조건이라 함은 앞서 제시한 편견이나 관습과 같은 관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결혼, 출산, 육아라는 현실적인 조건 또한 여성의 자아개발과 창의적 글쓰기를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현실은 오늘날의 그것과도 맞물려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간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게 마련이고, 그 변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가 여성 고유의 역할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전히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일은 치명적이에요. 남성적인 여성이나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만 해요. 여성이 어떤 불만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또는 정당하더라도 어떤 원인을 변명하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여성임을 의식하고 말하는 행위는 치명적이에요. 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쓴 글을 모두 소멸될 운명에 처해져요. 풍요롭게 될 수가 없지요.
나는 열렬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들으면 불편하다. 그들의 굳센 주장에서 여성적, 남성적 편견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의 편견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 자기만의 방 』은 여성과, 여성의 글쓰기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그러한 페미니스트들을 대할 때의 불편함은 없었다. 그녀가 제시하는 ‘자기만의 방’은 남성을 몰아내고 여성 혼자 들어앉은 방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된 양성적 존재의 자유,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 그리고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역설說 은 새로운 것은 못 된다. 그렇지만 그녀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이성이 어우러진 글맛은 그 식상함을 상쇄시키고 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모더니즘 창작 기법은 옮긴이도 인정했듯 다소 ‘산만하게도 느껴’지기도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한 문장을 좋아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하겠다.
‘실재實在를 찾아내고 수집하여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 작가의 몫’이라고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허구적인 글쓰기의 세계, 그 방으로 들어가 보자. 그 방은 우리 모두를 위해 열려 있다. 우리 모두의 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