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우울증 생활
우에노 레이 지음, 장연숙 옮김 / 열린세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우울증. 더 이상 생소한 이름이 아니다. 현대인의 병, 마음의 감기 등 익숙한 수식어들도 많다. 그렇지만 우울증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마음의 감기’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마음의 감기라고 하기에는 치유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때로는 죽음을 불러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다. 그렇다. 우울증은 질병이다. 병을 낫게 하려면 우선 그 병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울증의 발병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우울증의 치료는 그러므로 대증요법에 불과한 상황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울증 환자의 수는 급증하고 있다. 우울증과 자살률의 상관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우울증. 이제는 환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제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의 병 - 정신과 영역의 병에 대해서는 편견이 심하다. 집안에 그런 병을 앓는 사람이 있으면 수치로 여기고 숨기기에 급급하다. 이러한 편견은 병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다. 특히 정신적인 병의 경우에는 사회나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는 두려움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 같다. 두려움과 편견은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배척한다. 이 모든 것이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희망은 있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 제대로 알아가면 되는 것이다. 병에 대해 알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문서적을 보는 법이 있을 것이고,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병을 앓고 있는 당사자보다 더 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환자만한 의사 없다고 하지 않는가.

『유쾌한 우울증 생활』의 저자 우에노 레이는 우울증 환자다. ‘우울증 커뮤니티’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우울증 체험을 바탕으로 강연을 하고 책을 쓴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울증으로 밥벌이를 한다”. 강연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가 놀랐던 것은 우울증 환자 자신조차도 우울증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었다.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회적 편견이었다. 아직도 정신과의 문턱은 드높은 것이 현실이다. 정신과에 간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정신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다. 우울증의 경우 이제 너무 흔한 병이 되어버렸음에도 그 편견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잠재적 우울증 환자들도 많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 모든 편견과 무지 앞에 우에노 레이는 고하는 것이다. 나는 우울증 환자다. 우울증은 질병일 뿐 인격이 아니다. 따라서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 우울증을 벗어나고 싶다면 먼저 우울증을 이해하라.

병전성격(病前性楁)이라는 것이 있다. 병에 걸리기 쉬운 성격을 말한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성실하다
꼼꼼하다
책임감이 강하다
완벽주의자
노력가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융통성이 없고 혼자서 모든 것을 떠맡으려 한다는 것이다. 천성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사회적 분위기도 무시 못한다. 하나의 예로,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은 “힘내”라는 말 혹은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힘내서 달리고 있는 말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에노 레이는 “힘내” 대신 “괜찮아”, “쉬엄쉬엄 해”라는 말을 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일본 역시)는 쉬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리고 여전히 달리는 중이다.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르망 24시간 레이스 대회가 있다고 한다. 24시간 레이스 대회.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선 연료가 떨어진다. 타이어도 닳아서 해진다. 운전자도 교대해주어야 하고. 레이스 중간에 코스에서 떨어져 스텝이 대기하고 있는 정비소에 들어가 연료 보급이나 타이어 교환, 운전자 교대 등 이른바 ‘피트인’이 필요한 것이다. 피트인은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무리해서 계속 달리면 타이어가 급격히 파손되어 주행불능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에노 레이는 우울증을 바로 이 ‘피트인’에 비유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현실에서 마음이 ‘쉬라’고 지령을 내리는 것이 바로 우울증이라고 말한다. 잘 쉬어야 잘 달릴 수 있다는 이치를 『유쾌한 우울증 생활』은 일깨워준다. 또 하나, 우울증 환자도 유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신정아, BBK 사건 등 거짓말의 폐해로 얼룩졌던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그리고 내 앞에는『거짓말의 진화』가 놓여있다. ‘그들’은 왜 속이고 거짓말하고 정당화하는가. 묻고 싶은가? 그들만이 아니다. 우리도 속이고 거짓말하고 정당화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우리는 불완전하다. 그래서일까. 완전함을 추구하며, 변화를 두려워한다. 여기에서 부조리(absurdity)가 빚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완전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것은 그간의 삶을 통하여 축적되어 온 신념이다. 자아상(self-images)이 반영된 신념에 대립하는 것이 있으면 우리들은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자기 방어적 태세를 취하게 된다. 이것이 페스팅어가 말하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이다. 부조화는 어떤 상황에서나 불편하지만 자기개념(self-concept)의 중요한 요소(사상, 태도, 신념, 견해)가 위협당할 때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상충하는 생각에서 조리를 찾아 최소한 마음에서만은 일관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애를 쓰게 된다. 즉 자기정당화는 자기개념(self-concept), 자기가치(self-worth)의 보존본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지부조화’는 자기정당화를 추동하는 엔진, 즉 행위와 결정을 정당화할 필요성을 만드는 에너지,라는 것이 페스팅어 이론의 핵심이며, 이 이론에서 『거짓말의 진화』는 출발한다.

자기정당화는 거짓말이나 변명과는 다르다. 우리가 누군가를 설득할 때에는 자신이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을 설득할 때에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기정당화가 공공연한 거짓말보다 강력하고 훨씬 더 위험하다. 자기정당화가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이 최선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조화(調和)를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옳다, 내가 틀렸다.”라는 말은 그동안 구축해 온 신념의 탑을 뒤흔들어 심각한 부조화를 낳는다. 그래서 자기정당화를 한다.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 혹은 ‘내가 틀렸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하고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기억의 왜곡, 오만과 편견은 자기정당화의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이 책 2, 3장()에서는 오만과 편견, 그리고 기억에서 작동하는 자기정당화의 메커니즘을 다루고 있다.

왜곡은 자기개념을 일관되게 유지할 필요성에 의해 동기화될 때 더욱 강력하다. 기억 연구자들은 니체의 다음 말을 즐겨 인용한다. “내 기억이 ‘내가 그것을 했다.’라고 말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굴복한다.”


4장에서 7장까지는 역사를 뒤흔든 자기정당화에서부터 일상적 자기정당화의 사례를 들어가며 자기정당화의 메커니즘 과정을 보여준다.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면의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

노스웨스턴 법과대학의 오심연구소(center on Wrongful Convic-tions) 소장 랍 워든(Rob Warden)은 옳은 일을 하기를 원하는 ‘선량하고’ 나무랄 데 없는 검사들 사이에서 직무상 부조화를 관찰했다. 한 번은 오심 번복이 발생했는데, 그 사건을 기소한 검사인 잭 오말리가 워든에게 몇 번이나 묻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오말리는 그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검사들은 자신과 경찰들을 좋은 사람으로, 피고들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워든은 이렇게 말했다. “그 체제에 들어가면 당신은 아주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한다.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신은 모종의 범죄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그러면 이른바 터널시(tunnel vision)현상 - 시야가 좁아지는 시야 협착 현상. 심리학적으로는 주로 한 가지 문제나 원인에 집착해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그르치게 되는 것을 말한다. - 을 겪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무죄임을 입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을 할 것이다. ‘가만, 이 증거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내가 잘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잘못했을 리가 없다. 나는 좋은 사람이나까.’ 나는 이런 심리 현상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부조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맹점을 갖고 있다. 자기정당화의 성격상 스스로의 맹점을 깨우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정당화의 함정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마지막 장에서는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리 특별하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행동을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듯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지켜볼 것. 느낌과 그에 대한 반응 사이에 작은 틈을 내어 반성의 순간을 끼워 넣는 법을 배울 것. 그리고 때로는 부조화와 더불어 살 것. 여기서 부조화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명확하게 부조화하는 인지 요소를 분리해 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뢰하던 친구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우리는 그 친구와 절교하는 대신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친구는 친구고 잘못은 잘못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생에서 믿을 만한 반대자(naysayer)를 갖는 것이다. 자기정당화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를 이끌어 줄 비판자. 우리 또한 누군가의 믿을 만한 반대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자신을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함의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나 자신은 언제나 공정하고, 옳은 선택을 하며, 선량하고,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간다. 『거짓말의 진화』 -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우리에게 이 책은 ‘믿을 만한 반대자’가 되어준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나쁠 때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카뮈도 말했듯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생을 보내는 동물이다. 적당한 자기정당화는 자존감 유지와 후회스러운 과거 청산에 유익하다. 자기정당화가 없다면 우리는 매순간 후회하고 자책하느라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기기만이 또 다른 부조리를 낳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해야겠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기에 앞서 스스로에 대해 건강한 의심을 품을 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전나무 - 안데르센 명작 동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이상헌 옮김, 마르크 부타방 그림 / 큰북작은북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나도 다른 나무들처럼 키가 크면 얼마나 좋을까? 가지를 활짝 펴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저 꼭대기에서 한눈에 넓은 세상을 내려다볼 수도 있잖아. 비바람이 불면 저기 서 있는 큰 나무들처럼 당당하게 몸을 흔들고 말이야.


어렸을 때 나는 얼른 자라서 어른이 되었으면 싶었다. 어른이 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른들은 못하는 것이 없는 줄 알았다. 우러러보아야만 하는 그들의 세계는 자유 그 자체였다. 고 작은 몸뚱이 안에 나는 얼마나 커다란 자유에의 열망을 품었던가.


숲 속, 작은 전나무는 이름 그대로 작다. 산토끼가 훌쩍 뛰어오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전나무는 커다란 나무들을 부러워한다. 배의 돛이 되어 바다를 떠다니고, 화려한 몸치장을 하고 저녁의 거실을 빛내는 그들의 삶을 동경한다. ‘그곳’을 그리워하는 작은 전나무는 ‘이곳’에 있는 토끼, 새들, 햇빛과 공기에서 아무런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이곳’을 떠나고 싶다. ‘이곳’만 떠나면 무언가 의미 있고 행복한 일들이 생길 것만 같다.

아이가 어른의 세계를 열망하듯 어른은 나 아닌 타인의 세계를 동경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를, 이것이 아닌 저것을, 이 사람이 아닌 저 사람을. 반드시 현재의 삶이 누추하거나 고달프지 않아도 그렇다. 우리의 눈이 바깥을 향해서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작은 전나무이다.

 


 

작은 전나무는 마침내 뿌리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화려한 밤, 다정한 사람들.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에 작은 전나무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또 다른 꿈을 꾼다. 그러나 꿈을 깨어지고, 짧은 밤을 끝으로 작은 전나무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처박히고 만다. 그제서야 전나무는 숲 속의 행복을 깨우친다. 그리워한다. 토끼와 새들, 햇빛과 공기를.


 

아, 숲 속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눈이 내리면 산토끼가 깡충깡충 뛰면서 내 앞을 지나가곤 했지. 맞아, 그 녀석이 내 가지에 뛰어오르던 때는 정말 좋았어. 하지만 그때 나는 좋은 줄 몰랐지.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마침내 동경하던 그 세계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알았다. 가고 싶더라도 갈 수 없는 곳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는 것. 하고 싶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그 세계는 차가운 환멸幻滅만을 안겨준 채 나를 지하실로 내몰았다. ‘여기’ 지하에서 나는 ‘저기’ 숲 속을 그리워한다.

이제 그 숲 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는다.
어릴 때 안데르센의 동화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 백조왕자, 인어공주 등. TV 만화영화로도 자주 접해왔던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한국의 전래동화보다도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여기’ 아닌 ‘저기’의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저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마음을 매혹하기에 충분하다. 아빠가 사다주시거나 학교에서 빌린 동화책들을 나는 읽고 또 읽어댔다. 동화책을 읽어대던 그 아이는 무언가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이제 어른이 된 내가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 또한 그와 같다.



 

「작은 전나무」는 미운 오리새끼나 성냥팔이 소녀에 비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다. 작은 전나무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아는 건 바깥세상을 열망하는 숲 속의 생활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바깥세상을 열망하는 작은 전나무에게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타들어가는 나무의 끝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너무 잔혹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우리 아이에게 이해시키지? 고민하는 부모들도 많을 것 같다.

‘한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이라는 수필을 읽은 적이 있다. 뜬 눈으로는 현실을 보고, 감은 눈으로는 이상을 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우리들의 품, 숲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작은 전나무들에게 우리가 전해줄 교훈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숲 속 토끼와 새들, 햇빛과 공기를 누리면서 저 바깥세상을 향해 가지를 뻗어 올리는 일, 바로 한 눈 뜨고 꿈꾸는 것의 중요함을 깨우쳐주는 것.


지금 이 순간을 기뻐해.

 

우리 어른들 또한 바깥으로만 향해 있는 눈을 안으로 뜰 때이다. 한 줌 재가 되기 전에 우리들은 이 순간, 여기, 이 사람들과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기뻐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래를 바꾼 선택 - 어린이문학상 수상작 시리즈 2
에마뉘엘 드 생 샤마.브누아 드 생 샤마 지음, 에렉 퓌바레 그림, 김영신 옮김 / 큰북작은북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은하계를 만들고 있던 하느님께 천사 가브리엘이 인간세상의 주식이 폭락하고 있다는 다급한 보고를 한다. “모든 주식이 폭락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덕주 상황이 가장 심각합니다. 친절주와 예절주, 존중주와 배려주 또한 거의 바닥입니다. 다른 우량주들도 끝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하느님은 천사 자벨을 지상에 내려보내 상황을 살피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천사 자벨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 거리를 달리는 소년과 중년의 남자를 발견했다. 소년은 쫓기는 듯 보였고 중년의 남자는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커다란 금고 얘기를 하며 울화통을 터뜨리는 부인과 마주친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어두워진 천사는 세상을 모두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하느님께 보고한다. 하느님은 좀 더 세상을 살펴보라며 천사를 다시 지상으로 내려 보낸다. 천사 앞에 친절한 엘리베이터 안내원의 모습이 보이고, 연약해 보이는 부인의 편지를 대신 부쳐주겠다는 남자도 보인다. 천사는 다시 마음이 환해져서 하느님께 인간들이 천사만큼 선하더라고 보고했다. 천사의 보고를 들은 하느님은 그가 볼 수 없었던 진실을 들려준다.

때때로 나는 천사 자벨처럼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다. 팔레트의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는 수많은 색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검은색과 흰색으로 모든 것을 양분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던 때문이다. 『미래를 바꾼 선택』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호기심 많은 소녀 베아트리스가 금고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매일 밤 금고의 숫자판을 돌리는 것은 ‘미지未知의 세계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외로운 빌라 관리인 마리 역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루브르 박물관 명화 속 주인공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여기서 ‘미지의 세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꿈’ 혹은 ‘상상력’일 것이다. 무채색無彩色의 현실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꿈 - 혹은 상상력’이다. 이것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이 아닐까.

자크 쥐스팽 장관이 브룩 박사의 이상한 약국을 찾은 이유는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그의 세계는 무채색이다. 독특한 치료법으로 병을 고치는 브록 박사는 그에게 유쾌한 치료법을 제시한다. 놀이공원에서 총 쏘기 게임을 해서 오리인형 받기, 회전목마 타기, 막대사탕 쪽쪽 빨아먹기, 종이배를 만들어 강물에 띄우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따라가기, 도서관 바닥에 앉아 동화책 읽기, 거리에서 술래놀이 하기 등이 그것이다. 브록 박사는 길에서 마주친 소년을 보고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장관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꿈을 잡으러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동상은 값진 황금과 루비, 그리고 하찮은 흙과 단추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도 이 동상과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고귀하고 숭고하지만, 때로는 비열하고 치사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 역시 이 동상처럼 진정한 걸작품입니다. 하느님, 이 동상에 흙과 단추가 섞였다고 송두리째 파괴하시겠습니까?
자벨천사의 변론을 되새기면 하느님의 분노도 기적처럼 사그라진다.

그와 함께 꿈을 잡으러 달리다 보면 우리는 광대 트레불리와 엘리베이터 안내원 라울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삶에 현혹되어 자신의 세계를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때때로 우리들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눈멀어 검은색의 세계로 추락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시 유채색의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광대 트레불리가 만든 동상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광대 트레불리가 만든 사람 동상. 그것은 값진 황금과 루비뿐 아니라 하찮은 흙과 단추와 더불어 이루어졌지만, 아버지의 추악함에 상처 입고 병에 걸린 르네를 치유해주었다. 트레불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그 뉘우치는 마음이 동상의 추한 부분까지도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뉘우치는 마음. 그것이 사람 동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눈앞의 어떤 것이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보일 때에 트레불리의 동상을 기억할 것이다. '심각한 심신 의학 이성주의 증후군'에 걸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색들을 떠올릴 것이다.

에마뉘엘과 브누아는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는 부부 작가이다.미래를 바꾼 선택은 2007년 프랑스작가협회상 수상작이다. 프랑스 작가협회상은 1926년 전세계 프랑스어권 작가들이 모여 만든 프랑스작가협회에서, 그해에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여 주는 상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이 책에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꿈’이 들어있다. 어린이,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이 읽어도 참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어른들이 먼저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채색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에게 이 책은 브룩 박사의 이상한 약국이 되어줄 것이다.

마리가 루브르 박물관 명화 속 주인공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을 때,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마리가 답장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마리는 답장을 받았다. 꿈 같은 일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브록 박사의 ‘생각의 열쇠’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열쇠로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근심 걱정은 밖에 놓아둔 채 멀리 떠났던 꿈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꿈속에서 나는 루브르 박물관 명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축제를 즐길 것이다. 자크 쥐스팽 장관과 함께 강물에 띄운 종이배를 따라 강이 끝나는 곳까지 가볼 것이다. 깃털, 개구리, 황금이란 단어에 공포증을 느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내원 라울을 구하러 갈 것이다. 지하감옥에 갇힌 왕을 풀어줄 것이다.

짤깍, 짤깍... 나는 베아트리스가 떠난 등나무 의자에 앉아 금고의 숫자판을 돌린다. 금고의 비밀을 풀기 위해 매일 밤 잠들기 전 숫자판을 돌릴 것이다. 어느 때인가는 하느님의 음성도 들려오겠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네. 그러면 나는 또 힘을 내어 숫자판을 돌릴 것이다. 짤깍, 짤깍, 짤깍... 때로는 너무 지쳐 금고를 부숴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브록 박사의 이상한 약국으로 달려가 시간을 견디게 해줄 인내와 지혜, 상상력, 그리고 아빠에게 드릴 사랑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커다란 웃음을 주문할 것이다. 그리고 또 밤이 찾아오면 등나무 의자에 앉아 금고의 숫자판을 돌릴 것이다.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색들을 찾기 위해. 짤깍, 짤깍, 짤깍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 1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나를 나가게 해줘! 나가게 해달란 말이야! 나를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면 당신이 무슨 어머니란 말이야?” 사내 아기는 발버둥치던 동작을 멈추고서 물었다. “바깥세상은 어떤지 엄마가 들려줘.”


1970년 후반에서 1980년 후반까지 중국 대륙에는 개혁, 개방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새로운 가치관의 도입, 신구세대의 대립, 관료 사회의 부패로 인해 중국은 커다란 진통을 겪고 있었다.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는 바로 그 혼돈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티엔탕’은 ‘천국(天國)’이라는 뜻을 가진 중국 지명이다. 티엔탕, 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나 고단하고 궁핍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겨우 끼니를 이어가도록 해주는 것은 ‘마늘농사’다. 소, 당나귀와 더불어 땅을 파 먹고 사는 농민들의 유일한 희망이 바로 ‘마늘’이다. 그러나 일괄 수매를 약속했던 현 정부에서는 저장 창고가 찼다는 이유로 수매를 거부하고, 농민들의 발길 닿는 곳마다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하여 관료들의 배때기는 기름진 살이 오르는 반면, 농민들은 몸 곳곳을 기어다니는 이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에 분노한 티엔탕 마을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마늘종 사건’이다.

좀 체념도 해봐. 사람 산다는 게 결코 쉽지가 않아. 나도 때때로 생각하지만 인간이 개하고 비교해서 어디가 나아?

 

감방에 갇힌 넷째 숙모의 말처럼, 사람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개만도 못한’ 인생들을 마주친다. 혹은 스스로의 모습에서 ‘개만도 못한 인생’의 한 단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개만도 못한 인생’은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개만도 못한 인간들의 악독한 인생’과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형성한 악조건, 곧 지옥에서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낑낑거리는 인생’이 그것이다.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는 바로 그 ‘개같은 인생들’의 대립 양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부인, 선생님, 이 사람은 가련하고 불쌍하게도 곤궁에 빠졌으니 런민비를 조금만 주십시오!

“너 그럼 개 소리를 흉내낼 테야? 한 번 흉내낼 때마다 너에게 일 위안을 주겠어!”
“원하신다면 하지요. 큰 개 소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작은 개 소리를 원하세요?”
사내는 기침을 한 번 했다. 목소리를 깨끗하게 가다듬고 개 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의 모방은 아주 처절했다. “왕왕 - 왕왕왕 - 왕왕왕왕왕왕왕왕왕왕, 왕, 왕, 왕왕, 왕왕왕왕왕왕왕왕! 이건 작은 개 소리이며 모두 합쳐서 스물여섯 번 짖었습니다. 왕! 왕! 왕왕! 왕왕왕! 왕왕왕왕왕왕왕왕왕왕왕! 왕왕왕! 왕왕! 왕! 이건 큰 개 소리인데, 모두 합쳐서 스물네 번 짖었습니다. 큰 개 소리에다 작은 개 소리를 더하면 모두 합쳐 오십 번 울었사오니 한 번에 일 위안이니까 전부 합치면 오십 위안입니다.”

관료들의 세금 강탈, 삼환친(* 三瑍親: 세 가정이 서로 혼인을 약조하고 상대방 규수를 맞바꾸는 식으로 맞아들이는 혼인제도) 등 바람직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울고 웃고 분노하고 달아난다. 그들에게 티엔탕 마을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니고 탐욕으로 물든 지옥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지옥을 더욱 지옥스럽게(치욕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참으로 개 같다.

 

“울지마, 귀여운 내 아내. 젊었을 때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 난 지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마늘종을 팔아 돈을 많이 벌면 네 부모님에게 갖다주고 너를 데리고 와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 간부가 되면 뭐 하는데? 간부가 되려면 양심을 팔아야 해. 양심을 팔지 않으면 간부가 될 수 없어.”


티엔탕 현 정부의 굳게 잠긴 문을 쳐부수면서 까오마는 외친다. “탐관오리를 타도하자! 관료주의를 타도하자!”. 이 외침이야말로 ‘천국에 대한 동경이며 희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대체 무엇인가?

천국 天國
[명사]
1 하느님이나 신불(神佛)이 있다는 이상(理想) 세계.
2 어떤 제약도 받지 아니하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 또는 그런 상황.
3 <기독교>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갈 수 있다는, 영혼이 축복받는 나라. 하나님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본다. ≒천당·하늘나라.

우선, ‘어떤 제약도 받지 아니하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 또는 그런 상황’으로서의 천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민중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국가, 천국일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반드시 민주주의 국가에만 해당하는 이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국가정책이든 결국은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살자는 취지가 아닌가. 그런데 ‘관료들의 천국’이 곧 ‘국민들의 천국’이 되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좌절하게 만든다.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 ‘그들만의 천국’ 앞에서 우리들이 불러야 할 노래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본다.

다음으로는 ‘하늘나라, 이상理想세계’로서의 천국을 생각해 보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곧 이 땅의 현실이 고단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없는 것을 꿈꾸는 자들의 절망과 희망. 그 사이에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가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팡씨 일가의 쇠락 과정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개혁의 물결에 요동하는 중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팡씨 부부에게는 탐욕스러운 두 아들과 딸 진쥐가 있다. 부모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순종적인 큰아들이 구시대에 속한다면 그에 대립하는 작은아들은 신시대의 가치관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딸 진쥐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감싸 안은 중국 대륙 그것이다.

“아들아, 이 엄마도 처음에는 너처럼 태어나서 세상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것은 돼지고기나 개고기 같은 변변찮은 음식을 먹고 소나 말처럼 고된 일을 하며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견뎌야 한단다. 너의 외할아버지는 나를 집의 대들보에다 매달아놓고 소고삐로 후려갈겨댔단다. 아들아, 그런데도 세상에 나오고 싶은 거야?”

(...)
“엄마, 나는 그래도 나가서 세상을 보고 싶어. 한 개의 둥근 공 모양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아들아, 그건 태양이란다.”
“나는 태양을 보고 싶어!”


자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태아와 진쥐의 대화를 통하여 모옌은 중국의 절망적인 현실을 한탄하면서도 ‘천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태양을 보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자궁 속과 같은 어둡고 갑갑한 현실 속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까오양. 사람들에 떠밀려 현 정부에 들어간 그가 화분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통해, 관료주의는 반대하되 무정부주의로 관료주의에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모옌의 중립적 주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소설가는 항상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자 하지만 소설 그 자체는 정치와 근접해 있다. 소설가는 항상 인간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자 하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비극이다.

 

모옌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만났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소설가는 항상 인간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자 하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모옌이 말하는 ‘소설가의 비극’. 그것은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곧 ‘소설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소설가 모옌이 언제까지나 비극 속에 머무르기를, ‘예술의 노정에서 각종 달콤한 유혹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면서 허다한 살기(殺機)를 몰래 감추고 이단의 길을 탐험’하기를 바란다.

 

중국 작가 모옌. 그가 보내준 『티엔탕 마을 마늘종 노래』는 지금 우리 땅의 현실과도 잇닿아 있다.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 올해의 마지막 날, 나는 ‘우리들의 천국(어떤 제약도 받지 아니하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 또는 그런 상황.)’을 꿈꾼다. ‘천국(하늘나라)’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이 땅의 현실이 절실하다. 태양을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