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까 왜인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집으로부터 까마득한 거리, 돌아갈 수 없는 먼 나라 낡고 추운 여인숙에 들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내가 앉아 있는 방이 쌀랑하다. 난방장치를 작동시킨다. 새삼스럽게 참 편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좋아졌구나. 늙은이 같은 감격과 그리움 같은 것이 지나간다. '집'은 '엄마'나 '고향' 같은 말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이의 살림집』을 들여다보는 내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집들을 떠올렸다. 그 집들의 냄새, 소리, 촉감, 공기, 어두움의 농담(濃淡) 같은 것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집 내 집뿐이리. 이 노랫말을 지은 사람은 한 번도 집에게 배신 당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나 '고향', 하느님조차도 우리를 내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집을 배신할 때도 있다. 어릴 때 나는 얼마나 자주 집 떠나는 꿈을 꾸었나. 집이 춥거나 소음이 심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 불편함보다는 보이지 않는 날갯짓 같은 것이었다. 작은 동네를 떠도는 허황한 소문 같은 것은 어린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큰 도시에 가면 큰 돈을 벌어 큰 집을 사고 큰 텔레비전을 보면서 큰 방에서 잠들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동경을 품고 살았다. 딱딱하고 더운 방에 등을 대고 누워 나는 여러 번 집을 떠나곤 했다.

 

 

   그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가장 크게 떠오르는 '집'이 하나 있다. 그야말로 '가난한 살림집'이었다. 그 집은 산골 친구집. 길가에 지어진 '외주물집'이었다. 대문이 없고 마당은 길로 이어지는 곳. 그리고 마당 앞에는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창호지문. 모두 잠든 한밤중 불 끄고 누우면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 낭만적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안 살아봐서 그런다. 사람 다니는 길과 면해 있는 변소에 앉으면 머리가 쑤욱 나왔다. 똥 누면서 하늘을 볼 수 있는 한편 지나가는 이와 눈길 마주칠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친구집 가서 똥이 마려우면 정말 고역이었다. 한데 마련된 수돗가에서 등을 구부리고 세수를 하면 가랑이 사이로 뒷집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어쩌다 친구집에서 잠을 잔 날 아침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오면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들이 내 앞에 나타날 적도 있었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좋은 추억이 된다. 그 친구도 그럴 것이다. 오래지 않은 어느 날 그 집을 찾았었다고. 하지만 그 작은 집은 사라지고 없다. 큰 도로를 내는 데 땅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 집에 살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없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낯설음에 잠 못 이루던 그 방. 그 방을 흐르던 도랑물 떠가는 소리. 새소리. 늙은 할머니가 피우던 솔 담배의 매캐한 내음. 담뱃진이 누렇게 배인 오래된 벽지 같은 것들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노익상 씨가 발품 팔고 세월 팔아 문 두드린 '가난한 이의 살림집'들에는 내가 잘 알고 있고 언젠가 알았던 것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언젠가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며 그 집들을 스쳐지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집'에는 역사가 흐르고 있다. 사람 따라 세월 따라 국세(國勢) 따라 지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집'이다. '집'은 자고 먹고 싸고 씻고 입게 해주는 곳. 그래서 인간에게는 중요한 장소다. 사람들이 평생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도 나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요즘에는 집의 기능이 반드시 '생활'에만 국한되어 있지도 않은 것 같다. 제 몸 하나 뉘일 수 있을 정도면 만족했던 옛날 사람들과 달리 요즘 사람들은 '집'을 자기의 '얼굴'이라고 여긴다. 제 얼굴이니 사람들이 쳐다볼 적에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편리한 집을 꿈꾼다. 세간붙이의 수준이나 생활의 편한 정도를 떠나 집은 제집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행복의 척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난한 이들이라고 불편함을 모르겠는가. 좋은 집에서 호사 한 번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그 집과 한몸이 되어 산다. 아들 딸이 도시의 아파트로 들어오시라고 해도 늙은 부모는 한사코 거절을 한다. 나는 이들이 아들 딸에게 짐 될까 하여 부러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집과 한몸이 되어서 이제 다른 데 가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데'에는 자기의 '세월'과 '생활'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녘 변소에 가려고 윤 씨 집 마루로 나섰을 땐 이미 여명의 기운이 산 능선으로부터 배어났다. 내처 보랏빛으로 번져갔는데, 맑고 상큼한 바람이 살갗 곳곳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그러면서도 이 적막강산에 홀로 들어와 제금 낸 윤 씨 부부가 새삼스레 커 보였고 이제껏 겪었을 온갖 풍파에 절로 숙연한 맘이 들었다. 그즈음 새벽별이 순정하게 반짝였고, 나는 오래도록 그 별을 쳐다보며 내년에 윤 씨 부부가 심굴 황기와 더덕 농사를 잘 해내길 맘 다해 빌었다. (37쪽)


 

   『가난한 이의 살림집』에는 세월이 흐르고 있다. 어린 것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도시로 떠나고 늙은 부모는 더 늙어간다. 햇볕과 바람과 구름은 가난한 살림집에 흔적을 새겨가고. 46쪽에 실린 누렁이는 밥은 먹고 다니는지. 바람처럼 달음박질하던 아이들은 지금 커서 어디 살고 있을지. 승부(承富)역 앞에서 담배 피고 앉았던 역무원 아저씨들은 이제 늙었겠지. 노익상 씨는 사람과 함께 집도 낡아가고 집과 함께 사람도 늙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나는 어릴 적 꿈꾸었던 안락하고 깨끗한 집에 산다. 매달 대출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집이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안락(安樂)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안락이라는 것도. 누추하고 불편하더라도 제집이 최고라는 늙은이들의 말을 생각한다. 나 늙어서 그런 집에 들 수 있을까. 늙어서까지 나는 이 허황한 안락을 포기하지 못할까.

  

 

   어떤 이들에게 '집'은 자신을 내치는 설움일 수도, 저 먼 고향 하늘일 수도 있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지옥일 수도 있다. 남 보이기 부끄러운 얼굴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누운 자리를 제집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살림집'이라는 것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식었다 뜨거워졌다 하며, 품었다 내쳤다 하는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것이라고. 왜냐하면 거기 '사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어느새 사늘했던 방이 따듯해졌다. 이 크나큰 우주에서 나를 품어주는 작은 집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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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0-03-0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월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이 마음 아련합니다.
구입해서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