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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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내가 <검은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뤼야는 침대 머리맡에서 끝까지 펼쳐져 있는 푸른색 체크무늬 이불의 물결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계곡, 푸른색 언덕을 덮은 달콤하고 따스한 어둠에 싸여,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 <검은책>의 첫 문장이다. 열대야 속에서 이 문장을 열 번 이상 읽었던 것 같다. ‘뤼야’라는 단어에 달린 주석- 터키어로 ‘꿈’이라는 뜻 -의 의미심장함과 길게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 탓이었다. “푸른색 체크무늬 이불의 물결”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계곡”, “푸른색 체크무늬 이불”과 “푸른색 언덕”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느라 문장의 물결 속을 헤매면서 나는 아렴풋한 ‘꿈의 무게’를 가늠했다. 문장이 꿈같구나. 묵직한 <검은>책의 무게, 그것만큼 무겁구나, 라고. 내가 <검은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제 2장 사라진 뤼야(꿈), 드러나는 꿈(제랄)


[명사]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3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


‘꿈속’에서 ‘꿈’을 추적하는 남자가 있다. 그가 추적하는 ‘꿈’의 이름은, ‘뤼야’와 ‘제랄’이다. ‘뤼야’와 ‘제랄’은 남자의 ‘기억의 정원’에 그림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아주 사랑했던 아름다운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그녀를 찾기 시작했지요. 도시의 어디를 가든지 그녀의 흔적과 만납니다. 그녀 자신이 아니라요.” 폐허처럼 되어버린 ‘기억의 정원’에서 남자는 과거의 얼굴들, 소리, 냄새, 의미들, 그리고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고통스러운 욕망- 다른 사람(제랄)이 되고자 하는 -과 마주친다.


제 3장 우리는 책 속에서 ‘나 자신’을 잃었다


꿈같은 단어와 문장들의 늪 - <검은책>은 늪과 같은 책이다. 아니, 늪이다. 수많은 은유와 상징. 수상한 암호들이 하늘을 향해 ‘초록의(제랄의 초록색 펜)’ 가지를 뻗치는 안개의 숲이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우물의 어둠을 응시하다가 마침내는 어둠의 힘에 이끌려 우물 밑으로 침잠해가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난삽한 문장과 실험적 구성은 어지럼증과 하품, 난독難讀의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조금씩 <검은책>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깊은 울림을 지닌 인용구들과 풍부한 어휘들로 이루어진 ‘기억의 정원’에서 ‘꿈’을 추적하는 ‘나’를 추적했다. <검은책>을 읽는 동안 나는 ‘추적하는 동시에 추적당하는 자였다.’ 갈립이 기억과 ‘문자들’ 속에서 ‘꿈’ - 뤼야와 제랄 -을 추적할 때 나 또한 ‘나의’ 꿈을 추적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눈目에게 추적당했다. 갈립이 제랄이 되어갈 때, 나도 흐릿해지는 ‘나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생래적 결핍에 대한 인식이 불러온 모방에의 욕망, - ‘꿈’인 동시에 ‘절망(혹은 재앙)’이다 - 그 검고 깊은 늪 한가운데에서.


제 4장 뤼야와 제랄의 죽음 그리고 '나'의 부활


그 무엇도 인생만큼 경이롭지 않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꿈속’에서 ‘꿈’을 추적하는 남자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제랄)의 죽음으로 ‘꿈’(뤼야)를 찾게 된다. 그리고 부활한다. 그는 새로운 생 - 글쓰기 -을 부여받는데, 그것(글쓰기)은 뤼야(꿈)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위안, 위대한 놀이가 되어줄 것이다. 배움은 흉내에서 시작하며 흉내의 끝은 창조다.


제 5장 <검은책>의 신호들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의 경우는 차치하고 내가 소설을 고를 때 주목하는 것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그런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결코 그 소설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래서 자상한 사람들은 서평을 쓰고, 나와 같이 ‘미지의’ 소설(책)을 골라야 하는 독자들은 서평을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책을 단념하거나 혹은 펼친다. <검은책>도 그렇게 만났다. 물론 <검은책>의 작가 오르한 파묵에 대해서는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안다,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굵직한 글씨로 인쇄된 신문의 표제는 읽었지만 정작 본문은 읽지 않은 사람의 그것처럼, 그에 대한 앎은 표면적이며 얕았다. 오르한 파묵. 터키의 작가.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이 정도. 그런 내가 그(오르한 파묵)의 숲, 아니 늪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아아, 한여름밤의 지난한 독서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의 이야기(소설)를 ‘늪’에 비유한 것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한 단어들의 배열갈립의 ‘끈질긴’ 추적의 모양새를 닮은 길게 늘어지는 문장들, 갈립과 뤼야와 제랄의 자취를 추적하는 이야기 사이사이 제랄의 칼럼이 소개되어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콜라주 기법’과 그에 따르는 복합시점- 전지적 작가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의 채용으로 읽는 이를 난감하게 하지만, 암호같은 표현들은 충분히 매혹적이고 오르한 파묵 특유의 ‘정교한 복잡함’은 오히려 주의를 환기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 뤼야와 제랄의 행방불명과 그들을 추적하는 갈립을 통한, 자신이 동경하는 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정체성의 상실을 겪는 현대인의 갈등과 절망, 독서와 글쓰기의 행위에서 어쩔 수 없이 야기되는 모방과 모방에서 빚어지는 창조의 과정에 대한 암시는 눈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검은책>의 독자가 될 누군가를 위하여 나는 여기에 쓴다. 오르한 파묵, 그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노라고.

 

                                                            

                                                                                                                                          .         H07081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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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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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우울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두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은 ‘죽을 수 없음’으로 하여 싹트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정신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자아를 탈피할 수 없고 無로 화할 수 없는 절망. 새롭게 태어날 수 없는 절망.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 끊긴 상태. 그것이 절망이라고.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이런 의미에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죽음으로 점철되는 소설 속 ‘탄생’의 순간들은 뜻 깊은 것이다. 주인공 ‘바리’의 탄생을 보자. 바리의 탄생은 소설 구조적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의 유의미적 측면에서도 그 뜻이 깊다 하겠다.


오래전부터 우리에게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비슷한 구성과 내용의 굿이 전국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지노귀, 오구, 오기라고 합니다. (중략) 이 굿의 여러 과장 중에 무속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말미, 바리공주, 바리데기, 칠공주 등의 서사무가가 거의 같은 내용으로 한반도 전 지역에서 구송되어 오면서 47종의 구술자료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서사무가의 줄거리는 그리스의 오르페우스나 북유럽의 오딘 신화처럼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저승을 다녀오는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무당이 자신들의 원조인 바리가 겪은 고통과 수난에 대한 줄거리를 구송함으로써 고통받은 고통의 치유사또는수난당한 수난의 해결사임을 자처하려던 것 같습니다. (중략) ‘바리’를 ‘버린다’의 뜻으로 해석하여 무가의 내용대로 ‘버린 공주’로 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리’를 ‘발’의 연철음으로 본다면 ‘발’은 우리말에서 광명 또는 엇던 것을 새로 만들어낸다는 생산적인 뜻이 있는 말이지요. 그러므로광명의 공주’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라는 뜻도 있겠지요. 

 

                                           - 2007/06/21 한겨레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처럼 ‘바리의 탄생’은 중의적이라 하겠다. ‘바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생명’이요 ‘광명’이므로 그렇다. 작가 황석영은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기 전에 하나의 ‘빛 - 광명의 공주’을 탄생시킨 것이다. ‘세상의 죽음’을 그리기 전에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저의에는 음울한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구원’의 뜻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리’의 딸 홀리야(자유)의 죽음과 소설의 마지막, ‘바리’가 부푼 배를 안고 울먹이며 ‘아가야 미안하다’ 한 것은 일견 절망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앞서 내가 얘기한 절망과 죽음의 개념에 비추어 내가 본 것은 결국 ‘희망’이었다.

 

나는 굳이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지 않겠다.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정보는 내 글이 아니더라도 쉬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의 형식적 구조에 대해서는 꼭 얘기해야겠다. 나는 소설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재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참 재미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이야기들 - 굶주림, 탈북, 전쟁, 테러 -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설은 회상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화자, 그러니까 ‘바리’의 이야기는 스물한 살에서 끝나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는 성인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태어난 순간부터 스물한 살까지의 것이어서 소설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는 낡고 물빠진 작업복을 입고 헝겊배낭과 손풍금을 짊어졌다. 그러고는 엄마를 따라 마루로 오르기 전에 아직도 약간 겁을 먹고 있는 우리들 머리를 차례로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외삼촌은 아마 그게 머리를 쓰다듬어준다는 손짓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미꾸리 아저씨는 연길의 중국회사 부장 되는 남자였다. 몸집이 똥똥하고 아랫배가 볼록 나왔는데 놀란 토끼처럼 눈이 똥그래서 얼굴만 봐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 하나의 소설의 묘미는 이북 방언의 실감나는 재현에 있다. 거기에 더해 작가가 던져주는 능청스러운 유머가 소설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자네 이름이...... 샤오룽이라. 쬐그마한 용이라 그런 얘기디. 내 보기엔 그 체격으루 용은 아니구 맹꽁이가 맞갔는데.”

“아 무스거 말씀입네까 형님. 시절을 못 만나개지구 두만강 개천에서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이전엔 몸집두 날씬하구 꼬챙이 같다구 영화배우 나갈 뻔했습네다.”

 

이러한 유머에서 나는 작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엿보았다. 또한 ‘바리’가 지옥에서 만난 넋들과의 대화에서, 압둘 할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세상의 수많은 ‘악’까지도 포용하고 그 안에서 ‘선’을 지향하는 정신,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곧 생명수라는 작가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

(중략)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 알아왔어요?”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이래.”

(중략)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리신다.”


 

 

 

세계의 어두움을 응시하고 인식할 수 있는 힘. 그것이 곧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의미였다. 그리고 절망은 곧 죽음으로 비가역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새로운 ‘탄생’, ‘빛’, ‘희망’이라는 것. 나는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죽어야 한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와 세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태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죽고 나는 것. 그것이 곧 삶이 아니던가. 


                                                                 . H0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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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플라스틱 피플
파브리스 카로 지음, 강현주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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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런 순간들이 있다. 너무나 익숙하여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것’의 표면, 껍데기였을 뿐이었다는 진실. 우리를 뒤뚱거리게 하는 그 진실의 무게가 무수한 허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어둠이 들어앉은 다락방에 올라가 먼지 낀 시간의 시체들을 뒤적여보기도 한다. 그러나 생을 향한 배신감과 상실감은 먼지를 털어내듯 툭툭 털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세계의 폐허 위에 흩어진 허술한 생의 편린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고독 속에서 소리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존재를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사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장소이다. 사회 내에서 개인은 원하든 원치 않든 타인과의 접촉을 하게 된다. 무수한 낯선 타인들과의 접촉에서 우리는 때와 장소, 관계에 따라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본능적으로 익혀왔다. 적당한 가식은 그래서 사회적 동물의 불가무한 것이 되었다. 이런 내용의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새삼스럽게 여겨질 만큼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다. 오히려 한결같이 꾸밈없는 사람 -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은 반사회적인 바보 취급을 당하는 형편이다. 이러한 ‘일상적 가식’에 대한 불감증은 길을 헤매는 집 잃은 개처럼 우리들의 진실이 생의 언저리만을 맴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집(생의 진실)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왔다는 자각과 함께 혼돈에 빠진다. 생을 흉내내는 허위가 있을 뿐 생은 없는 것이다. 진실의 부재. 생의 부재. 이것이 사회적 동물들의 진실이다.
 
‘나’는 단 한 편의 희곡도 완성해본 적이 없는 서른 살의 희곡작가다(소설의 장과 장 사이에 그의 희곡이 실려있다). 딱히 열정적으로 글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그의 주된 일상은 신문의 부고란에 실린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례식의 형식이나 분위기에 대한 평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용히 슬픔에 잠긴 채 어쩌면 허구일지도 모르는 고인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 속에 빠졌다.” (p.20)
 
‘나’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부모님, ‘나’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동생, ‘나’에게 성적 환상을 심어줄 만큼 매혹적인 동생의 애인 안나, 그리고 예술 후원자이자 친구 부부인 쥘리앵과 클레르가 그의 일상의 중심을 채우는 인간관계의 전부다. 똑같은 일상의 궤도 - 그 한복판을 채우는 가식적 인간관계에서 ‘나’는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쥘리앵과 클레르 부부는 나에게 매주 다섯 끼의 식사를 제공했고, 나는 매주 다섯 차례 그 두 사람 중 누구도 꿈꾸지 않았던 삶 앞에 그들만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는 사막에서 나름대로 초라한 해결책을 찾아냈던 것이다.” (p.16)
 
“늘 그래 왔듯이 아버지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누가 봐도 무관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 역할을 말없이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죽은 닭의 엉덩잇살을 조금씩 음미하는 데 만족하고 계셨다. 동생은 냉동 강낭콩에 대한 불만을 쏟아 놓는 것으로 나를 도우려고 나섰다. 동생은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결국 어머니는 화제를 바꾸셨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오늘 오후에 안나를 만날 거니?” 동생은 닭다리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오후에 만날 거니?” 이 말은 달리 보면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 오후에도 너는 아무도 안 만나니?” (p.25)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면서, 쥘리앵은 주로 클레르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별히 새로운 사실을 알린다기보다는 큰 목소리로 정기적인 종합 보고를 한다고 할까. 미치광이로 보이지 않으려면 자신이 떠들어대는 동안 누군가를 앞에 앉혀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p. 31)
 
인용문에 그은 밑줄 위의 단어들에서 나는 일상적 가식과 그것에서 빚어지는 권태를 본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죽음’이라는 것을. ‘나’의 희곡(연극을 위한 글) 쓰는 행위와 장례식에서의 형식적 슬픔은 일상적 가식(연극적 일상)을, - 소설의 말미에서 ‘나’의 희곡 속 등장인물들이 ‘나’의 현실로 들어오는 설정이 있는데,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사라진 이러한 설정은 우리의 현실이 곧 연극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  장례식과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죽음’은 일상의 허위가 빚어낸 개인의 정체성 상실, 진실(혹은 생의)의 부재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 사람들은 겨자 소스를 곁들인 죽은 토끼요리라고 말하지 않는 걸까? (중략) 사람들은 왜 바스크식 죽은 멧돼지 스튜라고 말하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의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건 무엇이든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p.13)
 
*피귀렉이라는 인간파견회사의 직원 - 곧, 배우 -과 ‘나’의 첫 만남을 ‘장례식’에서 이루어지게 한 설정은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의미심장한 것이다. 말한 대로 피귀렉은 인간파견회사의 직원이다. 타인의 생에서 결여된 존재를 대신 연기해주는 자들이다. 허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피귀렉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생의 허위들을 직면하고 자신 또한 허위의 노예였다는 무서운 진실에 도달한다.
 
“나이가 들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거대한 바위는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하여, 결국 반쯤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시커먼 잿더미가 되고 만다. (중략) 더 이상 깨질 수 없는 것도 깨질 수 있으며, 가루 역시 더 미세한 가루가 될 수 있고, 다 나았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재발하고 마는 종양처럼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지점에서 기만당할 수도 있다.” (p.190)
 
“무슨 놀이를 하는 거니?”
“그럼 아저씨는 무슨 놀이를 하는 거예요? (중략) 아저씨는 모든 것을 놓치고 있어요. 아저씨는 내 또래 아이들처럼 아저씨의 장난감을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있어요.” (p.276)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골콘드(Golconde,1953)를 모방한 이 책의 표지그림은 ‘플라스틱 피플’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책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똑같은 생김새의 남자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그림에서 받는 충격과 혼돈은 생의 허위를 확인한 순간에 받는 충격만큼이나 강렬하다. 생의 ‘허위’와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한편으로는 지켜나가는가. 가식이 반드시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해로운 진실보다는 이로운 거짓이 낫다. 나는 착한 거짓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선한 목적에서 비롯되는 가식은 사회적 동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배려다. 각설하고 - 다시 골콘드로 돌아와서, 그림 속 똑같이 보이는 남자들 중 누가 진짜일까.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래서 이들을 만져볼 수 있다면 나는 즉각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지나칠 것이다. 진실과 허위, 진짜와 가짜. 그것은 표면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왜 ‘플라스틱 피플’ 속에서 길을 잃었는가.
 
“매일, 한 노부인이 바게트를 고르고 돈을 지불한 후에 훈제 햄 조각이 들어있는 장바구니에 바게트를 담는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한 경찰관이 자동차들이 정확하게 보이는 시야가 확 트인 덜 혼잡한 교차로에 서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우체국의 한 창구 위에는 ‘잠시 문을 닫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뒤로 대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50대의 남자가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다섯 명의 여자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9시부터 9시 40분까지 정문 앞에 모여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p.185,186)
 
그 스스로가 ‘플라스틱 피플’이었기 때문이다. 볼품없는 진실보다 그럴듯한 허위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쓰디쓴 진실을 삼키기보다 달콤한 허위를 찾아 헤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 낸 이미지를 통해 당신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가장 사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가장 사치스러운 거울, 가장 값비싼 거울을 즐겼을 뿐입니다.” (p.250) 
                                                                   



*프랑스어로 단역배우는 ‘피귀랑(figurant)’ 또는 ‘피귀라시옹(figuration)’이다. ‘피귀렉(figurec)’이란 명칭은 이에 착안하여 만든 조어이다. (역자 주) 
  

 

                         H07072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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