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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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녁,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 데이비드가 들려주는 동화에는 소년과 소녀가 마법의 숲에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간과해 버리기 십상인 이 짤막한 이야기에는 도리스 레싱이『다섯째 아이』에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고스란히 암시되어 있다. 자, 궁금하시면 나를 따라오시라. 내 머릿속엔 이미‘마법의 숲’의 약도가 새겨져 있으니 한 번 믿어보시라. 단,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 위해 성큼 걸어 들어갈 만한 장소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겠다. 이 숲에서 당신은 끝내 보고 싶지 않던 것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소년과 소녀가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났어요. 그 소년과 소녀는 숲 속을 오랫동안 걸었어요. 바깥은 더웠지만 나무 아래는 시원했어요. 그들은 사슴이 누워 쉬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새들이 스쳐 지나가며 노래를 불러주었지요.

 

 

문명의 이기는 인류의 사상 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빠르게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가치관에 적응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아니 최소한 자기 것인 척이라도 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은 그야말로‘모험’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모험가는 존재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그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60년대 영국의 자유분방한 문화는 여러 가지 폐해를 몰고 왔는데, 마약 복용, 문란한 性, 산아제한, 이혼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이 행복한 가정의 가치, 전통적 가정관을 손상시켰음은 물론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시대적 가치관을 불신하며 스스로의 신념을 고수하고자 한다. 그 신념에 대한 완강한 의지의 표현이 바로 결혼이었고, 자신들이 가꾼 울타리에서 이상적인 가정 - ‘즐거운 나의 집’을 이룩하고자 소망한다. 그들이 토끼 같은 자식들을 줄줄이 낳으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 ‘다섯째 아이’벤이 태어나고, 그들의‘즐거운 나의 집’은 사악한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다. 



소년과 소녀는 배가 고팠는데, 달콤한 초콜릿으로 덮인 덤불을 발견했어요. 그 다음 오렌지 주스로 된 연못도 발견했지요. 허기를 채우고 나자 졸음이 찾아 들었어요. 그래서 친절한 사슴 옆 덤불 밑에 누웠지요. 그들은 잠을 자고 나서 사슴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어요.

전형적인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세태 속에서, 그들의‘즐거운 집’은 세상과 동떨어진‘마법의 숲’이다. 이 소설의 시간성 처리를 보면 이들의‘즐거운 집’이‘마법의 숲’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 소설은 시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만한 구성이 지극히 미미하다.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들 - 어제, 오늘, 아침, 저녁, 작년, 올해 등등 - 이 분명 등장하고 있지만, 그러한 개념들은 말 그대로 개념에서 멈추며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소설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더해 주인공조차 불분명하다. 나는 처음에‘다섯째 아이’가 주인공이겠지, 예단했다. 그런데 다섯째 아이‘벤’은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어떤 하나의‘현상現象’에 가까웠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나는 알았다. 이 이야기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데이비드와 해리엇, 벤과 주변 인물들은‘마법의 숲’을 이루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감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숲의 안개 입자들처럼 부유하는 것이다.『다섯째 아이』속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마법의 숲에 들어있는 소년이자 소녀, 사슴, 새, 덤불, 연못 그 모두이다. 따라서‘마법의 숲’은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상징체계이며,『다섯째 아이』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갑자기 소녀는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소녀는 집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떤 길로 가야 되는지 몰랐어요. 소녀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떤 길을 가야 숲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를 말해 줄 친절한 사슴이나 새들을 찾아봤어요. 오랫동안 헤매다가 다시 목이 말랐어요. (...) 소녀는 연못가에 앉았어요. 곧 어두워질 거예요.

소녀는 숲 밖으로 나갈 길을 알려줄 물고기가 있는지 보려고 연못으로 몸을 숙였지요. 그런데 기대하지 않던 무언가를 보았어요. 그건 한 소녀의 얼굴이었고, 그 소녀는 똑바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소녀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어요. 그 이상한 소녀는 미소짓고 있었는데, 그건 친절한 미소가 아닌 고약한 미소였어요. 소녀는 그 물속의 소녀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들어갈 거라고 느꼈어요. 소녀는 그렇게 무서운 눈을 본 적이 없었어요. 

 

이 아이는 예쁜 아기가 아니었다. 전혀 아기같이 생기지도 않았다. 누워 있는 동안 마치 그곳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처럼 두툼한 어깨에다 구부정한 모습이었다. 아기의 이마는 눈에서부터 정수리 쪽으로 경사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굵고 노르스름했으며, 가마 두 개에서부터 삼각형 또는 쐐기 모양으로 이마까지 내려오는 이상한 모양으로 나 있었다. 옆과 뒤쪽 머리카락은 아래쪽으로 자라고 있는데 앞쪽 머리카락은 이마 쪽으로 누워 있었다. 손은 두툼했고 손바닥에는 근육이 보였다. 아기는 눈을 뜨고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도깨비나 거인, 괴물이나 뭐 그런 것 같아요."

 

소녀는 그 기분 나쁜 연못을 당장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다섯째 아이,‘벤’은‘비정상적인 아이’다. 혐오감을 주는 이상한 외모뿐 아니라 근원을 알 수 없는 비정상적인 힘과 폭력성은 말 그대로 도깨비나 거인, 괴물을 연상시킨다. 다섯째 아이의 출현으로 그들의‘즐거운 집’은 서서히 붕괴되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신념 또한 흔들린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자신들의 고귀한 이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그 외계인 같은 존재를 부인하려고 애쓰지만, 끝끝내 그들의 다섯째 아이‘벤’을 자신들의 인생에서 떼어내지 못한다. 그 재앙 같은 존재는 그들 자신의 일부였으므로.

 

소녀는 숲길을 따라 걷다가 소년을 다시 만났어요.  

 

진정한 가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나, 혈연으로 이루어진 집단,‘가족’은 다만 그것에 불과한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가정’의 존재가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날로 발전해 가는 문명으로 인한 개인주의의 팽배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가족의 본질은,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고 믿는다. 가족은 우리 존재의 뿌리이며 정신의 고향이다. 가족은 무한한 사랑과 이해를 토대로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집단이며, 외부 세계와의 불화를 위무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정신적 매개체이다. 가족은 나 자신의 본질로 통하는 길이다.

소년은 소녀를 찾고 있었지요.

생각해 보자. 무엇이 우리의 순수한 가치관과 희망을 앗아갔는가. 무엇이 우리를 분열시켰는가. 무엇이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는가. 우리 내부에 잉태된‘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이 태어나고 있는‘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갇힌‘벤’, 그러나 곧 다시 풀려난‘벤’, 거리 위의‘벤’. 벤, 벤, 벤, 벤! 재앙과도 같은 수많은 다섯째 아이들! 반성해 보자. 우리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대상에 대해‘벤’과 같은 존재가 된 적은 없었는지. 고민해 보자. 이 수많은 벤들과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 벤이 알아서 떠나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그 거대한 욕망의 집을 거덜내고 사라져 주기만을? 그보다 먼저 우리 자신, 순수한 본질체가 사라져도 좋은가?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숲 속을 달려나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갔어요.

『다섯째 아이』는 환상소설,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 공상과학 등의 다양한 소설 형식을 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소설 형식 또한『다섯째 아이』의 흐릿함의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다섯째 아이』는 끝 간 데 없는 흐릿함에 휩싸여 있다. 음울한 흐릿함. 그러나 이 흐릿함 속에서 우리는 또렷하고도 무서운 자각, 소녀가 연못에 비친 고약한 얼굴을 보았을 때 느꼈을 법한 경악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음을 직감하는 것이다.‘마법의 숲’을 벗어나‘집’으로,‘즐거운 나의 집’으로 이제는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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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20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추천하고 갑니다. 어제 구입해 뒀는데 어서 읽고 싶어지네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