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오준호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그 아이의 이름은 현주였다. 현주에게선 늘 이상한 냄새가 났다. 지하실에서 백 년 정도 썩은 미미인형의 머리칼에서 풍길 법한 냄새였다. 실제로 현주네 집은 볕이 잘 들지 않았다. 정신지체를 가진 현주 어머니는 청결 의식이 부족했다. 그 집에 놀러 가면 자주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눈에 안 띄는 뭔가 밟히고 깨졌다. 내 친구들과 나는 그런 현주네 집이 편했다. 마룻바닥을 다다다 뛰어다니고 종잇조각을 찢어 날리면서 집안을 마구 어지럽혀도 혼내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우리들 세상이었다. 현주는 우리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 했다. 우리보다 두 살 어린 그 아이를 앉혀 놓고 냄새 나는 머리칼을 빗겨주었다. 연분홍색 크레파스로 볼연지도 찍어주었다. 거울 속에서 현주가 배시시 웃으면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없었다. 우리는 두꺼운 이불로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러면 현주는 느릿느릿 이불을 걷어내고는 또 바보 같이 웃었다. 그 모양을 보면 이상하게 분하고 약이 올랐다. 화도 안 내고 울지도 않는 현주는 진짜 인형 같았다. 우리의 장난은 점점 심해졌다. 어느 여름 날이었다. 교회에서 놀던 우리는 예배실 구석에서 벽장을 발견했다. 구겨진 방석과 작은 알전구들, 뒤얽힌 전선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 처박혀 있었다. 벽장 안에 들어간 우리는 문을 닫고 귀신 놀이를 했다. 완전한 어둠과 정적이 우리를 삼켰다. 한참을 그 안에서 놀다 시시해진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현주도 우리를 따라 나오려고 했다. 그때 우리 중 누군가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벽장 미닫이문을 꽉 붙들었다. 쿵. 쿵. 쿵쿵쿵. 그 다음에 비명 섞인 울음이 들렸다. 닫힌 문 뒤에서 현주 인형이 울고 있었다. 우리는 사악하게 웃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예수 같은 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는 ​참회하기 시작했다. 어둠 저편에서 현주가 계속 울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붙는 시커먼 그림자를 떨궈내려는 듯이 막 달렸다. 골목을 내달리면서 나는 알았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보다도 무서운 것이 나 자신이었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이 언제나 타인에게 공감하고, 절대로 물건을 훔치지 않고, 등 뒤에서 배신하지도 않고, 남의 부인을 탐하지도 않는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지 않고, 그래서 도덕규칙이 필요하다. 한편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고 돌보라고 명하는 수백만 개의 규칙을 만들 수 있지만, 우리에게 그런 성향 자체가 없다면 그런 규칙들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이 책에서 도덕성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도덕성 (또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종교나 이성, 문명에 앞서 우리 안에 내재한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영장류들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영장류 친구들을 소개한다. 관절염에 걸린 동료를 도와 나무를 오르는 침팬지들, 자기보다 낮은 가치의 보상을 받은 동료 침팬지를 보고 자신의 먹이를 거부하는 침팬지, 강제 섹스를 거부하는 암컷을 도와 수컷을 내쫓는 보노보 암컷들. 실수로 인간을 물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침팬지... 그들도 우리처럼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고, 동료들과 공감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불공평한 제안을 거부했다.
 
​   ​나는 침팬지 사회가 예외 없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tit for tat'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이 유인원들은 먹이에서 섹스까지, 털 고르기에서 싸움 지원까지 호의와 냉대의 사회적 경제를 만든다. 그들은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기대와 의무를 발전시키는 듯하다. 따라서 신뢰를 깨면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본문 중에서)
​    책에 의하면 도덕성은 하찮은 동기로부터 기원했다. 포도를 받은 침팬지는 오이를 받은 동료 침팬지를 보고 왜 같이 파업을 선언하는가. 달아오른 수컷 보노보는 매력적인 암컷 보노보를 왜 우두머리 수컷에게 양보하는가. ​프란스 드 발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들이 일정한 사회적 법칙을 준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법칙을 깨뜨린 침팬지(또는 보노보)는 무리로부터 처벌 받는다. 영장류의 도덕 법칙을 이끄는 궁극적인 동력은 "무리에 통합되려는 욕망"이었다. 고립되거나 배제되면 생존 가능성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른 영장류처럼 사회적 연대에 가치를 두는 무리동물이다. ​진화하면서 우리는 "관계의 가치", "협력의 이점", "신뢰와 정직의 필요성" 따위를 본성적으로 알게 되었다. 프란스 드 발은 이 '자연화된 윤리학'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이 외부의 고상한 원칙(신성한 존재나 이성적 법칙)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창조론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양극성 유인원bipolar apes'이다. 기분이 좋을 때면 보노보처럼 친절하고, 기분을 잡치면 침팬지처럼 지배하려 들고 폭력적이 된다. (본문 중에서)
 
​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하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도덕성은 "불멸의 인간 본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조직하는 방식에 달렸다는 것이다. ​종교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프란스 드 발'은 "신의 비존재에 집착하는"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을 비난한다. 종교가 도덕성의 원천은 아니지만, 도덕성 단련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법칙은 하늘에서부터 또는 탁월한 이성적 원칙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몸에 뿌리 깊게 밴 가치들로부터 솟아났다. 그것의 근본에는 집단생활에서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있다. 어딘가에 속하고, 함께 생활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우리의 욕구가 우리가 의지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본문 중에서)
    한 편의 잘 만들어진 교양 다큐를 보고 난 기분이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책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세속적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과 도덕성에 관한 흥미로운 이론들, 종교와 과학의 역할에 대한 순수한 고찰까지 이 한 권의 책에 잘 녹아있다. 아. 영장류 친구들의 사진도 실려 있다. 내 시선은 오래 그들에게 머물렀다. 그들의 커다란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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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 발발....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하다가 침팬지 폴리틱스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현주 씨 보고 싶네요. 잘 있으려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