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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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들입니다. 이 바람은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람 한가운데에서 흔들리면서 댄, 당신의 귀중한 편지를 읽었습니다. 편지를 모두 읽고 났을 때, 당신과 내가 서로의 눈을 가만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본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영혼이 나를 감싸주는 듯한 위안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내 안에 숨어있던 가장 지혜롭고, 가장 너그럽고, 한없이 사랑으로 넘치는 또 하나의 내 영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요. 당신은 잃어버렸던 나와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를 다독이며 말해주었죠. “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당신은 인생의 바다를 잘 헤엄쳐 오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다의 일부라는 믿음. 그게 전부였다고 말씀하셨지요. “너는 네가 다만 파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서운 거야. 난 무섭지 않아. 우린 바다의 일부니까.” 저는 물 위에 뜨지 못합니다. 마음속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무겁기 때문이지요. 저 자신 다만 파도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이런 겁쟁이에게 당신은 당신의 바다와 그 바다에서 얻은 인생의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되고 사랑하는 아내도 잃었지요. 그리고 당신의 소중한 손자, 샘이 태어났지요. 하지만 샘은 여느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자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신의 귀여운 샘. 그리고 여기, 이 글을 쓰고 있는 겁쟁이 샘. 수많은 샘을 위해 당신이 세상을 향해 외친 말은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할아버지는 몸에, 저는 마음에 사고를 당했어요. 하지만 우리 영혼이 다친 건 아니에요.”

 


샘은 가방의 지퍼도 열지 못하고, 코트도 혼자 입지 못합니다. 연약하지요. 이 연약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비상등을 켜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나한테 지금 문제가 있다. 난 지금 힘든 상태인데,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 ‘연약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려는 신의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우리 자신이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깊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요. 댄, 당신이 만나온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저는 느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샘인 동시에, 샘을 감싸줄 수 있는 손길이라고. 우리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기꺼이 곁에 다가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과거의 상처에 울부짖는 호랑이, 당장의 행복을 갈망하는 호랑이, 미래에 대한 조급증으로 날뛰는 호랑이, 호랑이, 호랑이. 나의 호랑이들. 이제 당신의 인생지도를 덮고, 나는 다시 망망한 나의 바다에 남겨졌습니다. 때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나를 삼키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나는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물 위에 뜰 수 있다고 믿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발버둥치지 않아도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게 되겠죠. 나는 이제 나의 호랑이와 함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지혜와 힘, 그리고 사랑을 얻었습니다. 언젠가는 뭍에 이를 수 있겠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죠. 그때까지 저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내 삶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내가 찾는 나만의 인생지도가 내 손바닥 위에 놓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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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피면 - 10대의 선택에 관한 여덟 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4
최인석 외 지음, 원종찬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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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청년과 소년, 그 언저리를 표류하는 존재. 청년과 소년 사이, 누구나 그 터널을 홀로 지나야만 하고, 지나왔다. 어떤 이에게 그 터널은‘삼백오십팔’년쯤은 걸리는 듯 길게 느껴질 수도 있고,‘구약의 신의 무시무시한 분노와 징계 아래’놓여있는 듯 무섭고 아플 수도 있다. 한편 어떤 이에게 그 터널은‘사막여우 한 마리가 모래언덕을 뛰어오르는’일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터널의 풍경은 각기 다르지만, 그 터널을 지나는 존재, 청소년은 그 존재 고유의 불안정한 성격 때문에 불안하고 쓸쓸하고 혼란에 차 있다. 이러한 흐릿한 존재감 때문인지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문학작품이란 것도 뚜렷하게 존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누구보다도 이들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빛, 거울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러한 현실을 보완하기 위해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에서‘창비청소년문학’시리즈를 선보인다. 그 작품집 중 하나가『라일락 피면』이다.

고민은 어른만 하냐? 까놓고 말해서 우리 때가 가장 고민 많을 때 아니냐?

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광주항쟁. 공선옥의 「라일락 피면」은 그 참혹한 시절을 만나 꽃이 지듯 스러진 푸른 존재들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언제나 집안에 분란만 일으키는 말썽쟁이 큰형과, 시험을 앞두고 데모하러 다니는 친구 우식, 석진의 마음에 봄바람을 일렁이게 하는 문간방 소녀 윤희. 광주 거리가 초토화되고 무고한 사람들이 이유를 모르고 죽어가던 그때, 석진은 다락의 어둠 속에 은신하지만, 큰형과 우식과 윤희는 피바람 몰아치는 거리로 나가 푸른 목숨을 내던진다. 그들의 죽음 앞에서 석진은 자신이 있어야 곳은 집도 아니고 그 어디도 아닌 바로 눈앞의 현실, 피의 거리라는 것을 절감하고 그 속으로 뛰어든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영화‘몽상가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영희는 도대체 무슨 놈의 혈액형이냐고? 아직도 그걸 묻고 싶니? 

방미진의 「영희가 O형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혈액형 이야기이다.‘B형 남자친구’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우리나라는 혈액형별 성격유형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다. 혈액형 하나로 사람을 구분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그릇된 일인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재미 삼아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방미진이 그린 일군의 중학생들은 장난이 아니다. 영희의 혈액형이 O형이 아닐 것이라는 근거 없는 전제하에, 그야말로 혈액형에 관한 수다를 떨고 있다. 그리고 이 수다는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모든 색깔의 원형은, 이상은 그날 그 하얀 시멘트 길과 그 위의 흰 햇빛이야.

“그때 말해야 했을까?”로 시작되는 성석제의「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은 어린시절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현재 유명화가의 자리까지 오른 백선규와, 그 대상수상작의 진짜 주인인 또 다른 화자의 진술이 교차 시점을 통해 이어진다. 이미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백선규는 자만 섞인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만, 강당에 전시된 대상수상작을 보는 순간 그 그림이 자신의 그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백선규와 마찬가지로 사생대회에 나간 자줏빛 원피스의 소녀가 실수로 백선규의 번호를 적어 넣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실수로 얻어진 행운, 그 우연한 상황 속에서 백선규는 침묵을 선택하고, 최고의 화가라는 절찬 속에서도 그의 죄의식과 열등감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죄의식과 열등감이 그를 최고의 화가로 만들었다는 고백 속에서,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의 의미와 그 결과에 대해 곱씹어볼 수 있다. 깊이 있는 작품이다.

어쩌면 마지막에 마지막밖에 없는 마지막 날들로, 가자. 

오수연의「너와 함께」에서‘너’는 분열된 또 하나의‘나’이다. 엄마와의 불화로 가출한 소년의‘갈등상태’ 내지는‘자기성찰’의 묘사가 독특하게 전개되어 있는 작품으로, 불안과 혼돈에 사로잡힌‘집 밖의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기묘하다. 가히 환상적이다. 이 환상은 파랗고 빨간 불빛으로 깜박거리는 신호등처럼 불안하다. 추운 길바닥에 나와 있는 연약한 토끼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한 발짝 거리에 검은 밀물이 쑥쑥 올라오는 방파제, 서로의 발을 잡고 원이 되어 굴렁쇠처럼 굴러가는 아주머니들, 숨 막히도록 뒤엉킨 막차 안의 사람들, 공사 중인 지하도. 소설 후반부까지 함께하던‘너’는“녀석은 내게로, 나는 녀석에게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녀석은 내게로 들어오고 나는 녀석에게로 들어갔다. 우리는 딱 겹쳐졌다.”라는 문장을 끝으로 사라지고,‘아파트 단지마저 지나 별도 없는 캄캄한 하늘로 이어진’길 위에 소년은 홀로 남는다. 아마도 소년은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혼자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럼 조금은 쉽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원한 건 쉬운 삶이 아니었어. 당신들과 함께하는 삶이었어. 

동성애자들, 성적소수자들의 커밍아웃은 더이상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삶은 슬프고 외롭다.「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는 동성커플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보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속옷 디자이너로 일하는 보린의 아빠는 외국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남자 폴과 동거 중이다. 이들은‘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기 위해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해주는 네덜란드 이민을 꿈꾸지만, 폴의 배신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그래서‘개리스마스’가 되지만, 보린은 아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고, 울음을 삼킨다. 씩씩한 보린이와 아빠는 부조리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리라 믿어본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나비가 아니었을까.

조은이의「헤바HEBA」는 청춘의 여신이란 뜻이다. 중학생 소년 성호에게 이종사촌 윤이 누나가 선물한 지구본의 이름이기도 한‘헤바’는 작품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제목이다. 학교를 자퇴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윤이 누나는 뚜렷한 주관과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중학생인 성호에게 또 다른 세상을 펼쳐 보여준다. 성호는 윤이 누나의 세계에 점점 빠져들고, 누나와 단둘이 사막의 불타는 별들 아래 있는 꿈을 꾼다. 하지만 누나가 사막에 단둘이 가길 원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성호는 아릿한 성장통을 치러낸다. 그리고 자신의 안에 숨겨진 날개를 발견한다.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서 나 자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넘겨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내 이빨 좀 세어봐요. 

최인석의「쉰아홉 개의 이빨」. 쉰아홉 개의 이빨을 가진 아버지를 괴물이라 여겼던 어린시절의‘나’는 어느 날 엄마로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위대한 활약상을 듣고 아버지의 정의로운 삶을 자신의 모델로 삼는다. 쉰아홉 개의 이빨을 가졌던 위대한 아버지와는 달리, 교회 목사인 새아버지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휘둘러 자식들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위선자이다.‘나’는 이 불합리한 상황에 저항하고 싶지만 엄마의 평온한 삶을 위해 이를 악물고 참는다. 그때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이빨의 수효를 헤아리면서 아버지의 정의로운 삶에 한걸음 가까워졌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던 어느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밤, 휘갈겨 쓴 상형문자처럼 나무들이 몸부림치는 풍경을 바라보며‘나’는 가출을 결심한다.

 

기다려 앨리스, 너를 만나러 갈게.
우리, 섬진강 꽃길을 함께 달리는 거야. 

세상과의 불화로 각자의 세계에 웅크리고 있는 앨리스와 빔벤더는 사회공포증 동호회 사이트 대화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저마다의 아픔과 절망으로 세상과 멀어진 두 남녀는 솔직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나아가 서로에게 세상의 창이 되어준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표명희의「널 위해 준비했어」는 어둠의 터널 속을 지나는 앨리스와 빔벤더의 시간을 발랄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본격적 청소년문학은 처음으로 접한다. 나는 이제 청소년이 아니지만,‘청소년문학’시리즈 출간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분명 청소년들에게도 문학계에게도 하나의 빛과 같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기대가 컸던 것일까. 청소년문학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 소설집은 청소년들의 선택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접근방식이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쉽게 공감할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소설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성인소설과 별다를 것이 없다. 청소년문학이란 경계를 확실히 구분 지어줄 만한 그 무엇이 아쉬웠다. 이 작품집은 기존의 동화작가와 소설가들이 썼다. 앞으로 청소년문학가,라는 새로운 작가군의 발굴을 기대해본다. 청소년문학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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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쟁이 유씨
박지은 지음 / 풀그림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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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기도 이틀 만에 깨어난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잡지사의 기자다. 일명‘주기자’로 불린다.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는‘나’를 깨운 것은 타고난 건강한 체력과 편집장의 끈질긴 전화벨 소리. 얼마 전 취재 요청을 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던 염쟁이 유씨와의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는 소식.“근데 몇 번이고 거절하시다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어요?”“실은 오늘 하는 염이 내 마지막 염이거든.”이렇게 해서 ‘주기자’와 염쟁이 유씨와의 의미심장한 만남은 시작된다. 염쟁이 유씨는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켜봤던 수많은 죽음의 사연들을 하나씩 꺼내놓는데...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다. 외부 액자는‘나’와 염쟁이 유씨와의 대화(현재)로, 내부 액자는 염쟁이 유씨가 들려주는 죽은 자의 사연(과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제에 따라 스물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염쟁이 유씨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는‘나’의 내면의 성찰 과정이 순환하고 있다.


외화(현재)/ 그렇다면 죽음의 뒷모습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언제일까? 유씨에게 물었다.“글쎄... 그 사람의 죽음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때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장례를 봤지만, 죽는 모습이 다 다르듯 장례식장 분위기도 다 다르거든. 근데 자고로 잔칫집이든 상갓집이든 사람이 북적북적 해야지. 특히나 상갓집에 파리만 날리고 있으면 참 복 없어 보여. 그럴 때 가장 안타깝지 (...) 작년 말쯤엔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심하게 몸이 깨지고 망가진 시신을 염하게 됐지 (...)”/ 내화(과거)/“어린 나이에 참 힘든 일을 당했구나. 혼자서 빈소를 지키느라 힘들 텐데... 연락할 만한 가족이 아무도 없냐? 직장은? 아버지 하시던 일이...?” (...)“저희 아버진 배우예요.”/ 다시- 외화(현재)/“배우라면 TV에서 한번쯤 봤을 법한데 염을 할 때도 봤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지. 그래서 아버지가 어디에 출연했었느냐고 물었더니 출연작품들을 줄줄줄 대는데 유명한 작품들이 꽤 많은 거야 (...)” “아... 스턴트맨 같은 대역배우셨군요. 근데 그 분은 왜 죽게 된 거예요?”(...) 그 분도 분명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배우의 길을 가셨을 텐데, 대역이란 이유로 살아서도 얼굴 한번 내비치지 못하고, 죽어서까지 그 이름이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시무시함이나 비현실의 요소가 섞여 있는 것은 아니다. 혹여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여고괴담이나 주온 시리즈를 빌려보라.『염쟁이 유씨』는 죽음을 소재로 하고는 있으나 결국 삶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죽음은 삶과의 대립 개념이 아니라 삶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는 물론 죽음이 삶의 한 과정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삶과 분리해 놓고 생각하거나 죽음 자체를 외면해 버리는 것은 죽음에 관한 본능적 공포에서 기인한 것일 터이다.『염쟁이 유씨』에는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잊어버릴 만큼 재미있고 포근하고 조금은 슬픈 삶의 목소리들이 능청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얼굴 한 번 안 보고 시집을 왔는데, 알고 보니 제 남편은 바람둥이에 호색한이었어요(...) 젊은 시절을 남편도 없이 홀시어머니 공양하랴 자식 키우랴... 저 혼자 뼈 빠지게 번 돈으로 간신히 먹고 살았죠 (...) 그렇게 집안 살림을 홀로 꾸려간 지 한 10년 쯤 됐을까, 오랜만에 남편이 집에 돌아왔는데 그래도 서방이라고 한순간에 반가운 맘이 들어 빨래하다 말고 달려 나갔죠. 그런데 남편 뒤로 한 젊은 여자가 빼꼼이 고개를 내미는 거예요.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말도 안 나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죠.”“아 그걸 그냥 뒀어요? 몽둥이로 냅다 두 년놈을 후려치지 못하고...”“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남편은 며칠 후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그 젊은 첩은 우리집에 그냥 눌러앉아버린 거예요(...) 그렇게 몇 년을 같이 살았죠. 미운 정 고운 정 들어가며 부부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그 여자와 나 사이에 남편이 없어지니까 저도 그 여자를 대하는 마음이 좀 달라지대요. 생각해보면 그깟 남편 살아서도 없는 거나 매한가지였는데 왜 곁에 있는 사람한테 내가 모질게 대했나 싶기도 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기 전에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대요. 제가 생전 처음으로 자네가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큰맘을 먹고 있는데, 그 순간 그 여자가 먼저 꺼낸다는 말이 참...‘형님, 진심으루다 나는 여기 형님 곁에서 더 살고 싶은데... 지가 얼마 못산대유.’그러는 거예요.”


죽는다는 건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인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염쟁이 유씨의 말에서 나는 죽음의 불멸성을 생각하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도 있듯, 모든 생명체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아무리 보잘것없어 뵈는 생명이라도 그 삶에는 그만의 깊은 의미가 숨어 있으며, 그렇기에 죽음에서 또한 의미를 남기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죽은 자는 그 영원한 침묵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수없이 많은 말을 지금 이 순간에도 하고 있다고.



“사랑을 남기고 간 죽음은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숭고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 가슴에 안겨주는 게 뭔 줄 알어?”“글쎄요. 아무래도 사람이 죽으면 남은 사람들에겐 슬픔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물론 당장은 슬프지. 그치만 슬픔은 본능이거든. 가슴속에 그리 오래 남아 있지는 않어. 왜냐하면 인간은 행복해지려는 본능도 함께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이 가슴속에서 슬픈 일들은 빨리 잊어버리려는 노력을 스스로 하는 거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눈물이 마르게 돼 있는겨.”“그럼 남아 있는 사람의 가슴속에 가장 오래 남는 게 뭔데요?”“슬픔보다 더 진하고 오래가는 게 바로 후회여. 인간이 동물보다 조금 나은 점이 있다면 반성할 줄을 안다는 거 아니겄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는 건 인간밖엔 할 줄 몰러. 물론 그러다가도 다시 잘못하고 또 후회하고 그러는 게 인간이지만 말이여.”


 

우리가 죽음과도 같은 고요 속에 있을 때에나 삶의 가혹함으로 하여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후회를 한다.“나는 절대로 후회 같은 건 안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한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후회를 안 하고 살 수 없다. 어언 60년 가까이 염을 해오면서 후회와 미련에 눈물 짓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봤던 염쟁이 유씨마저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후회의 귀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말한다.“이제와 후회해서 뭐하냐”고. 물론 앞으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 현재를 신중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 우선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후회한다고 해서 시간을 돌이켜 그 순간을 변화시킬 만한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인간이기에 최선을 다했던 순간에 대해서까지도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후회는 어리석음에서라기보다는 겸허한 마음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 지난날의 어리석음과 미숙함, 나쁜 마음과 과오를 뉘우치고 보다 나은 존재로 거듭나려는 바람. 우리는 후회를 통하여 새로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염쟁이 유씨』는 다양한 죽음 혹은 삶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불완전성과 삶의 유한성에서 빚어지는 슬픔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완전함과 유한한 삶의 조건일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귀중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 귀중한 생에서 조금이나마 회한을 덜어낼 수 있으려면 매순간 깨어 있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방향을 가늠해 보아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 있던‘주기자(나)’를 깨웠던 전화벨처럼, 죽음과도 같은 시간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으로 건너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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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23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쟁이 유씨, 원작이 먼저 있었군요. 전 연극을 봤는데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딸들에게 희망을 - 엄마와 딸이 행복한 세상
오한숙희 지음 / 가야북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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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 딸이든 아들이든 잘 키우기만 하면 된다더니 둘째가 아들이라니까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그래도 아들이 하나 있긴 있어야지’ 결국 그러시더라.’” 올겨울 둘째 아이를 출산할 예정에 있는 내 친구의 말에 “아직도 아들이 대세야?” 씁쓸한 웃음을 웃었던 적이 있다. “요즘 세상에는 딸 가진 부모가 외려 큰소리치고 산다더라. 나는 아들 가진 사람들 하나도 안 부럽다.”고 하시던 아빠, 어느 날인가 무심중에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오래전 형편 때문에 아이 하나를 낙태시킨 얘기를 하시며, “내가 그래서 아들이 없는갑다. 죄받아서.” 친구의 시어머니나 우리 아빠가 특별히 딸을 천대하고 아들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여성들 세상이 왔다고도 하지만 실상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것. 여전히 이 사회는 남성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이 사회의 여성에 대한 부당한 시선과 처우를 인정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는 있지만, 오랜 세월을 걸쳐 굳혀진 남아선호사상은 쉽게 뿌리 뽑히지 않는다. 여성학자 오한숙희 씨는 이러한 세태 속에서 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희망을 퍼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엄마, 나도 남자로 태어날 걸 그랬어.”
“왜 갑자기?”
“나도 말 타고 싶단 말이야.”
“여자도 말 탈 수 있어.”
“여자가 어떻게 말을 타. 난 여자가 말 탄 거 못 봤어.”
“왜, 여자도 말 많이 탄다, 뭐.”
“말 탄 여자가 누가 있는데?”
하마터면 나는 애마부인을 입 밖에 낼 뻔했다. 그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애마부인이라니, 세상에.
“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생각을 쥐어짜는데 만화영화가 생각났다.
“<작은숙녀>라는 만화영화에 보면 여학교에서 말 타는 법을 가르치는 게 나오잖아. 그 중에서 제일 잘 타는 사람을 뽑아서 큰 대회에 나가게도 하는 거, 우리 같이 봤잖니?”
“아, 정말 그랬다. 그렇지만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잖아.”
“외국 여자는 여자 아니야? 다른 나라 여자들이 하는 거면 너도 할 수 있어. 안 그래?”

 

 

오한숙희 씨의 큰딸 희록이와의 대화 중 일부이다. 성장과정에서 주변어른들을 통해 굳어지는 관념은 나중에 성장해서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어려서부터 사회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아이를 자유롭게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은 다만 딸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들 가진 부모 역시 마찬가지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사회는 남녀 양성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한숙희 씨는 이 책에서, 딸들을 키우면서 부닥친 다양한 일상사들을 여성학적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지칭하는 ‘딸’은 오한숙희 씨의 두 딸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딸들, 바로 여성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성 자신이 먼저 자신감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기울어버린 애인을 붙잡고자 애걸하는 젊은 여자가 나왔다.
“준서 씨, 나 버리지 마.”
옆에서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희록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쓰레기냐? 버리게.”
나는 짐짓 못 알아들은 체하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자기가 자기를 쓰레기 취급하잖아요. 버리지 말라고.”
오호! 제법인데. 나는 일부러 한번 더 찔러보았다.
“그래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잖아.”
“하지만 자기가 자기를 쓰레기 취급하는데 누가 사랑해주겠어요?”

 

 

내가 내 딸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고,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당당하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우리의 딸들을, 여성인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주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딸들이여, 여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을 사랑하자. 지금의 희망이 행복한 현실로 이어지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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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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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녁,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 데이비드가 들려주는 동화에는 소년과 소녀가 마법의 숲에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간과해 버리기 십상인 이 짤막한 이야기에는 도리스 레싱이『다섯째 아이』에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고스란히 암시되어 있다. 자, 궁금하시면 나를 따라오시라. 내 머릿속엔 이미‘마법의 숲’의 약도가 새겨져 있으니 한 번 믿어보시라. 단,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 위해 성큼 걸어 들어갈 만한 장소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겠다. 이 숲에서 당신은 끝내 보고 싶지 않던 것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소년과 소녀가 숲 속으로 모험을 떠났어요. 그 소년과 소녀는 숲 속을 오랫동안 걸었어요. 바깥은 더웠지만 나무 아래는 시원했어요. 그들은 사슴이 누워 쉬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새들이 스쳐 지나가며 노래를 불러주었지요.

 

 

문명의 이기는 인류의 사상 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빠르게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가치관에 적응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아니 최소한 자기 것인 척이라도 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은 그야말로‘모험’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모험가는 존재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그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60년대 영국의 자유분방한 문화는 여러 가지 폐해를 몰고 왔는데, 마약 복용, 문란한 性, 산아제한, 이혼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이 행복한 가정의 가치, 전통적 가정관을 손상시켰음은 물론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시대적 가치관을 불신하며 스스로의 신념을 고수하고자 한다. 그 신념에 대한 완강한 의지의 표현이 바로 결혼이었고, 자신들이 가꾼 울타리에서 이상적인 가정 - ‘즐거운 나의 집’을 이룩하고자 소망한다. 그들이 토끼 같은 자식들을 줄줄이 낳으며 행복에 젖어 있을 때 ‘다섯째 아이’벤이 태어나고, 그들의‘즐거운 나의 집’은 사악한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다. 



소년과 소녀는 배가 고팠는데, 달콤한 초콜릿으로 덮인 덤불을 발견했어요. 그 다음 오렌지 주스로 된 연못도 발견했지요. 허기를 채우고 나자 졸음이 찾아 들었어요. 그래서 친절한 사슴 옆 덤불 밑에 누웠지요. 그들은 잠을 자고 나서 사슴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어요.

전형적인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세태 속에서, 그들의‘즐거운 집’은 세상과 동떨어진‘마법의 숲’이다. 이 소설의 시간성 처리를 보면 이들의‘즐거운 집’이‘마법의 숲’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 소설은 시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시간의 흐름을 느낄 만한 구성이 지극히 미미하다.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들 - 어제, 오늘, 아침, 저녁, 작년, 올해 등등 - 이 분명 등장하고 있지만, 그러한 개념들은 말 그대로 개념에서 멈추며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소설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더해 주인공조차 불분명하다. 나는 처음에‘다섯째 아이’가 주인공이겠지, 예단했다. 그런데 다섯째 아이‘벤’은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어떤 하나의‘현상現象’에 가까웠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나는 알았다. 이 이야기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데이비드와 해리엇, 벤과 주변 인물들은‘마법의 숲’을 이루는 하나의 상징적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감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숲의 안개 입자들처럼 부유하는 것이다.『다섯째 아이』속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마법의 숲에 들어있는 소년이자 소녀, 사슴, 새, 덤불, 연못 그 모두이다. 따라서‘마법의 숲’은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상징체계이며,『다섯째 아이』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갑자기 소녀는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소녀는 집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떤 길로 가야 되는지 몰랐어요. 소녀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떤 길을 가야 숲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를 말해 줄 친절한 사슴이나 새들을 찾아봤어요. 오랫동안 헤매다가 다시 목이 말랐어요. (...) 소녀는 연못가에 앉았어요. 곧 어두워질 거예요.

소녀는 숲 밖으로 나갈 길을 알려줄 물고기가 있는지 보려고 연못으로 몸을 숙였지요. 그런데 기대하지 않던 무언가를 보았어요. 그건 한 소녀의 얼굴이었고, 그 소녀는 똑바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소녀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어요. 그 이상한 소녀는 미소짓고 있었는데, 그건 친절한 미소가 아닌 고약한 미소였어요. 소녀는 그 물속의 소녀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자신을 끌고 들어갈 거라고 느꼈어요. 소녀는 그렇게 무서운 눈을 본 적이 없었어요. 

 

이 아이는 예쁜 아기가 아니었다. 전혀 아기같이 생기지도 않았다. 누워 있는 동안 마치 그곳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처럼 두툼한 어깨에다 구부정한 모습이었다. 아기의 이마는 눈에서부터 정수리 쪽으로 경사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굵고 노르스름했으며, 가마 두 개에서부터 삼각형 또는 쐐기 모양으로 이마까지 내려오는 이상한 모양으로 나 있었다. 옆과 뒤쪽 머리카락은 아래쪽으로 자라고 있는데 앞쪽 머리카락은 이마 쪽으로 누워 있었다. 손은 두툼했고 손바닥에는 근육이 보였다. 아기는 눈을 뜨고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아이는 도깨비나 거인, 괴물이나 뭐 그런 것 같아요."

 

소녀는 그 기분 나쁜 연못을 당장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다섯째 아이,‘벤’은‘비정상적인 아이’다. 혐오감을 주는 이상한 외모뿐 아니라 근원을 알 수 없는 비정상적인 힘과 폭력성은 말 그대로 도깨비나 거인, 괴물을 연상시킨다. 다섯째 아이의 출현으로 그들의‘즐거운 집’은 서서히 붕괴되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신념 또한 흔들린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자신들의 고귀한 이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그 외계인 같은 존재를 부인하려고 애쓰지만, 끝끝내 그들의 다섯째 아이‘벤’을 자신들의 인생에서 떼어내지 못한다. 그 재앙 같은 존재는 그들 자신의 일부였으므로.

 

소녀는 숲길을 따라 걷다가 소년을 다시 만났어요.  

 

진정한 가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나, 혈연으로 이루어진 집단,‘가족’은 다만 그것에 불과한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가정’의 존재가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날로 발전해 가는 문명으로 인한 개인주의의 팽배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가족의 본질은,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고 믿는다. 가족은 우리 존재의 뿌리이며 정신의 고향이다. 가족은 무한한 사랑과 이해를 토대로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집단이며, 외부 세계와의 불화를 위무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정신적 매개체이다. 가족은 나 자신의 본질로 통하는 길이다.

소년은 소녀를 찾고 있었지요.

생각해 보자. 무엇이 우리의 순수한 가치관과 희망을 앗아갔는가. 무엇이 우리를 분열시켰는가. 무엇이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는가. 우리 내부에 잉태된‘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이 태어나고 있는‘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갇힌‘벤’, 그러나 곧 다시 풀려난‘벤’, 거리 위의‘벤’. 벤, 벤, 벤, 벤! 재앙과도 같은 수많은 다섯째 아이들! 반성해 보자. 우리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대상에 대해‘벤’과 같은 존재가 된 적은 없었는지. 고민해 보자. 이 수많은 벤들과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 벤이 알아서 떠나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그 거대한 욕망의 집을 거덜내고 사라져 주기만을? 그보다 먼저 우리 자신, 순수한 본질체가 사라져도 좋은가?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숲 속을 달려나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갔어요.

『다섯째 아이』는 환상소설,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 공상과학 등의 다양한 소설 형식을 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소설 형식 또한『다섯째 아이』의 흐릿함의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다섯째 아이』는 끝 간 데 없는 흐릿함에 휩싸여 있다. 음울한 흐릿함. 그러나 이 흐릿함 속에서 우리는 또렷하고도 무서운 자각, 소녀가 연못에 비친 고약한 얼굴을 보았을 때 느꼈을 법한 경악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음을 직감하는 것이다.‘마법의 숲’을 벗어나‘집’으로,‘즐거운 나의 집’으로 이제는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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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20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추천하고 갑니다. 어제 구입해 뒀는데 어서 읽고 싶어지네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