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
최인호 지음, 김점선 그림 / 열림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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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나 어릴 때 아빠는 내 작은 손을 잡고 대숲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최인호 님의「꽃밭」에 들었을 때 나는 그 생각이 났다. 아빠 손잡고 대숲 앞에서 아빠 목소리와 댓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을 때의 평온이 되살아났다. 오래전 그 대숲을 떠나왔고, 나는 성장하고 아빠는 늙었다. 이제는 아빠 손잡고‘아빠하고 나하아고~ ’를 부르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젊었을 때에는,으로 시작되는 아빠의 옛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최인호 님의 「꽃밭」에는 지나간 생에 대한 향수와 애정 그리고 얼마간의 설움이 심어져 있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으로 시작되는 옛이야기들. 미니스커트 아래 예쁜 다리를 자랑하던 여학생은 이제 골다공증 때문에 깎은 연필처럼 허약해진 다리를 힘겨워하고, "내가 너한테 피아노를 안 가르치면 개자식이다." 하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갓난쟁이 딸은 어른이 되었다. 색줏집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잘 하지도 못하는 뽀뽀를 했던, 은밀한 경험의 공범 깜시, 게리 쿠퍼는 세월 앞에서 스러졌다. 분단장 곱게 한 소녀들의 어여쁜 춤사위를 훔쳐보며 "아주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손쉽게 저 여자아이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마음에 꼭 드는 여자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짐했던 소년은 실제로‘아주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마음에 꼭 드는 여자를 선택’하여 아들 딸을 낳았고, 이제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그 시절을 회상한다.

 

작가인 그에게 있어 현재의 하루하루는 "어른과 아이가, 현재와 추억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또한 과거와 미래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꽃밭」 또한 그러한 공간이라 하겠다. 옛이야기 속에는 현재의 이야기가 있고 현재의 이야기 속에는 미래가 흐르고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환장하게 싫어서 결혼하겠습니다." 선언했던 청년 최인호와 "무사히 일을 끝내고 어서 돌아오라고 독특한 손짓을 하던 아내여, 언젠가는 그대가 돌아오라는 작별인사를 한다 하더라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일이 머지않았으므로 내가 아파트 복도를 지날 때까지만이라도 문밖에서 나를 지켜봐주구려." 하고 늙은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간직한 노년에 접어든 최인호가 있다. 또한 대한韓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해방둥이인 그는 격동의 시대를 함께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광복은 왔으나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전쟁은 끝났으나 평화 역시 오지 않았다. 구속에서 풀려났으나 자유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식민에서는 벗어났지만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탄하는 최인호는‘진정한 제2의 해방’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껍데기는 가라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은 무영無影의 내 정신에 짙은 그림자로 새겨졌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어찌 그리도 농염한지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네.

청명한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푸른 하늘이여.

풀어놓은 쪽빛이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 최한경 / 꽃밭에 앉아서


 

 

최인호 님이 生의 꽃씨를 뿌려 가꾼 꽃밭에 앉아 아롱다롱 고운 글의 꽃잎들에 취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의 갈피마다 심어진 김점선 님의 꽃 그림은 최인호 님이 일군 글밭, 글의 꽃밭에 은은한 향기를 더해주고 있다. 이제 나의 꽃밭을 살펴보련다. 꽃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풀은 없는지, 나 모르는 사이 죽어가는 꽃이 없는지, 구석에 새로이 피어나는 꽃은 없는지. 나의 꽃밭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그 님을 기다려야지.‘진정한 제2의 해방’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그 님이 오시면, 진정한 제2의 해방에 이르면, 그때가 되면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까. 생의 무게 내려앉은 어깨를 다독이며 말할 수 있을까. "수고했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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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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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우울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두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은 ‘죽을 수 없음’으로 하여 싹트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정신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자아를 탈피할 수 없고 無로 화할 수 없는 절망. 새롭게 태어날 수 없는 절망.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 끊긴 상태. 그것이 절망이라고.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이런 의미에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죽음으로 점철되는 소설 속 ‘탄생’의 순간들은 뜻 깊은 것이다. 주인공 ‘바리’의 탄생을 보자. 바리의 탄생은 소설 구조적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의 유의미적 측면에서도 그 뜻이 깊다 하겠다.


오래전부터 우리에게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비슷한 구성과 내용의 굿이 전국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지노귀, 오구, 오기라고 합니다. (중략) 이 굿의 여러 과장 중에 무속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말미, 바리공주, 바리데기, 칠공주 등의 서사무가가 거의 같은 내용으로 한반도 전 지역에서 구송되어 오면서 47종의 구술자료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서사무가의 줄거리는 그리스의 오르페우스나 북유럽의 오딘 신화처럼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저승을 다녀오는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무당이 자신들의 원조인 바리가 겪은 고통과 수난에 대한 줄거리를 구송함으로써 고통받은 고통의 치유사또는수난당한 수난의 해결사임을 자처하려던 것 같습니다. (중략) ‘바리’를 ‘버린다’의 뜻으로 해석하여 무가의 내용대로 ‘버린 공주’로 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리’를 ‘발’의 연철음으로 본다면 ‘발’은 우리말에서 광명 또는 엇던 것을 새로 만들어낸다는 생산적인 뜻이 있는 말이지요. 그러므로광명의 공주’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라는 뜻도 있겠지요. 

             

                                - 2007/06/21 한겨레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처럼 ‘바리의 탄생’은 중의적이라 하겠다. ‘바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생명’이요 ‘광명’이므로 그렇다. 작가 황석영은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기 전에 하나의 ‘빛 - 광명의 공주’을 탄생시킨 것이다. ‘세상의 죽음’을 그리기 전에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저의에는 음울한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구원’의 뜻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리’의 딸 홀리야(자유)의 죽음과 소설의 마지막, ‘바리’가 부푼 배를 안고 울먹이며 ‘아가야 미안하다’ 한 것은 일견 절망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앞서 내가 얘기한 절망과 죽음의 개념에 비추어 내가 본 것은 결국 ‘희망’이었다.

나는 굳이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지 않겠다.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정보는 내 글이 아니더라도 쉬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의 형식적 구조에 대해서는 꼭 얘기해야겠다. 나는 소설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재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참 재미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이야기들 - 굶주림, 탈북, 전쟁, 테러 -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설은 회상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화자, 그러니까 ‘바리’의 이야기는 스물한 살에서 끝나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는 성인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태어난 순간부터 스물한 살까지의 것이어서 소설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는 낡고 물빠진 작업복을 입고 헝겊배낭과 손풍금을 짊어졌다. 그러고는 엄마를 따라 마루로 오르기 전에 아직도 약간 겁을 먹고 있는 우리들 머리를 차례로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외삼촌은 아마 그게 머리를 쓰다듬어준다는 손짓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미꾸리 아저씨는 연길의 중국회사 부장 되는 남자였다. 몸집이 똥똥하고 아랫배가 볼록 나왔는데 놀란 토끼처럼 눈이 똥그래서 얼굴만 봐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 하나의 소설의 묘미는 이북 방언의 실감나는 재현에 있다. 거기에 더해 작가가 던져주는 능청스러운 유머가 소설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자네 이름이...... 샤오룽이라. 쬐그마한 용이라 그런 얘기디. 내 보기엔 그 체격으루 용은 아니구 맹꽁이가 맞갔는데.”

“아 무스거 말씀입네까 형님. 시절을 못 만나개지구 두만강 개천에서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이전엔 몸집두 날씬하구 꼬챙이 같다구 영화배우 나갈 뻔했습네다.”

 

이러한 유머에서 나는 작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엿보았다. 또한 ‘바리’가 지옥에서 만난 넋들과의 대화에서, 압둘 할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세상의 수많은 ‘악’까지도 포용하고 그 안에서 ‘선’을 지향하는 정신,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곧 생명수라는 작가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

(중략)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 알아왔어요?”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이래.”

(중략)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리신다.”

 


세계의 어두움을 응시하고 인식할 수 있는 힘. 그것이 곧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의미였다. 그리고 절망은 곧 죽음으로 비가역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새로운 ‘탄생’, ‘빛’, ‘희망’이라는 것. 나는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죽어야 한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와 세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태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죽고 나는 것. 그것이 곧 삶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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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이야기 - 틱낫한 스님과 데니얼 베니건 신부님이 세상에 전하는
벨 훅스 엮음, 김훈 옮김 / 황금비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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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밖에서의 삶도 감옥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은 곧 감옥이니까요.

전쟁.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이 무서운 말을 우리는 일상에서 입버릇처럼 사용한다. ‘삶이 곧 전쟁터다’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따위의 말들. 이런 말을 하는 저변에는 ‘평화를 향한 갈망’이 깔려 있다. 평화. 우리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그럼에도 이놈의 인간 세상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슬픈 현실이다. 우리들이 그저 안타까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가고, 이들을 죽인 ‘전쟁 - 악의 무리들’은 “현재의 악을 호도하기 위해 추상적인 미래의 선을 내세우는 끔찍한 결의론”으로 전쟁과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악의 근절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평화’일까. 베트남 출신 선승(禪僧) 틱낫한과 미국 출신의 예수회 사제 대니얼 베리건은 ‘베트남 전쟁’을 중심 논제로 삼아 몸소 체험한 전쟁, 악의 실체를 이야기하며 평화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그 뜻이 깊다. 귀중하다. 단순히 평화를 염원하는 종교인들의 관념적 고민 내지는 판에 박힌 설교가 아니라 종교와 문화와 국가와 개인적 체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참된 교류란 것이 어떤 것인지 ‘영혼의 교류’, ‘정신의 교류’가 어떤 것인지의 예증이기 때문에 그렇다. 참된 교류에서 평화는 싹트는 것이다.

묵인침묵,
가난한 사람들이나 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의 용인을 뜻하는
시민권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어리석고 퇴행적인 짓입니다.

틱낫한은 본토에서 추방당한 이래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대니얼 베리건은 베트남전 징집거부로 몇 개월의 감옥생활을 한 일이 있다.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사회로부터의 추방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추방당한 사람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추방시켰는가. 대니얼 베리건 신부가 들려주는 교도소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교도소에서는 늘 입버릇처럼 죄수들을 갱생시키려 노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갱생하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죄수들의 갱생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이더군요. 죄수가 새사람이 되면 저항을 합니다. 대량소비, 전쟁, 경제적인 야망, 포르노 등을 비롯한 모든 것에 노,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국가에 참으로 골치 아픈 존재가 됩니다.” 악행에 대한 저항 분자들을 향한 두려움. 그것이 이들을 추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야기한다. 추방당한 삶이야말로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런 것이 그들이 말하는 고귀한 ‘자기희생’의 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저는 인간이 참다운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정할 때, 자신의 생각과 열망이 하나가 될 때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예로 들어 사회적 통념이나 도덕관념이 절대적 진실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부조리를 낳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들 또한 평화의 길을 걷는 이방인임을 인정한다. “형상의 세계와 비형상의 세계, 욕망의 세계는 우리의 본고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얻기 위해 방황하는 공간입니다.” 틱낫한과 대니얼 베리건, 이 위대한 이방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평화를 깨뜨리는 악, 혼돈, 죽음을 부르는 증오, 폭력에 대응하고 있는데, 그 방식은 종교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기도하고 염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통당하는 인류 속에서 함께 분노하고 항의하고 투쟁한다. 인류의 고통과 자신들의 고통을 따로 여기지 않는다. 함께 걷는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는 삶”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이다. 삶으로써 종교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을 때야말로
우리가 참다운 자신에게 돌아간 때입니다.

 

이러한 삶은 ‘참다운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여로이다. 인생의 본질, ‘나’의 본질을 향한 추구는 비단 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자각은 개인을 비롯해 인류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통찰은 끊임없는 전쟁과 죽음, 가난과 폭력... 크고 작은 재앙들에 관한 근본문제에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힘을 길러주고, 종교와 문화와 국가를 넘어서서 사랑과 이해로 평화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그대 자신의 등불을 밝히고 그 등을 들고 가라


틱낫한과 대니얼 베리건은 종교인인 동시에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평화이야기’ 속에는 시적 은유들과 철학적 사유들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지 못한 사람이라면 쉽게 읽어내지 못할 수 있다. 하품을 하거나 깜빡깜빡 졸음이 찾아들지도 모른다. ‘평화이야기’를 읽는 시간이야말로 전쟁 그 자체라고 느낄지 모른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술술 읽어낼 만한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질긴 소고기와 같다. 꼭꼭 씹어 삼켜야 한다. 참을성 있게 천천히. 그러고 나면 그것은 우리의 피와 살을 이룰 것이다. 충분히 인내하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우리들 또한 전쟁과 피의 자식이며, 평화는 종교나 특정 단체, 특정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궁극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우리의 발이 놓여 있는 곳과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표 사이의 긴장 같은 것을 뜻합니다.
희망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힘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의 존재로부터의 초대 같은 것.

그렇다면 평화를 위해 지금 당장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 자신부터 희망의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희망을 바탕으로 눈앞의 일상에서 평화를 이룩하려는 조그만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세계평화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 습관적 망각이 나의 평화를 추방하도록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평화를 소망하는가? 전쟁을 끝내고 싶은가? 삶에 희망을 뿌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들, 평화의 존재로부터의 초대를 받아들이라. ‘평화이야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희망의 존재가 되자.

 

                                                                                                               H07101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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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 원시를 갈망한 파리의 부르주아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 9
피오렐라 니코시아 지음, 유치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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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미술교과서에 실린 타히티섬을 주제로 한 그림 몇 점, 십대 후반 어느 밤중에 읽었던 소설 '달과 6펜스'의 강렬한 인상, 고흐 관련 책들에 언급된 고흐와의 유명한 일화와  단편적인 이미지들. 더없이 얕고 추상적인 앎, 아니 무지라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하겠다. 고갱에 관하여 무지한 나와 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친절하다. 스페인 태생의 정열적이고 강인한 성품의 여류 문학가였던 외조모의 피, 페루의 대저택에서 보낸 자유롭고 풍요했던 유년의 기억은 그의 핏속을 흐르는 원시와 야생적 삶에 대한 추구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 요소라고 제시하면서, '위대한 예술가 고갱의 생애'속으로 안내한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게는 잉카 인디언의 핏줄이 흐르고 있고, 제가 창작한 모든 작품에서 그것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바로 제 인격의 바탕을 이루고 있고, 제가 줄곧 반대해온 타락한 문명과 달리 야생적인 것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작품의 변천 과정을 따라 그의 생애를 크게 네 시기로 나누고, 그 시기에 그려진 주목할 만한 작품들에 담긴 고갱의 이상과 동경, 사상, 회화적 표현 양식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고갱이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의 작품 경향을 곁들이면서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에 관한 폭넓은 이해를 돕는다. "1889년에 이 화가들은 '인상주의적이고 종합주의적인 그룹'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파리의 볼피니 카페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들은 인상주의의 리얼리즘과 단절하고, 자연에 내재된 가장 은밀한 본질을 추구하는 상징주의적 개념을 옹호하면서 회화에 대한 전통적인 방식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고 혁신하고자 했다. 객관적 세계의 표면을 넘어서서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자연과 오브제와 기호(선과 색)의 상징주의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 화가들은 상상력과 생각이 자유롭게 전개되기를 원했고, 현실에 상상적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다. 빨간 나무, 초록 그림자, 파란 초원 같은 것들. 이런 창조적인 열정을 바탕으로 한 운동에서 최초의 이론가는 에밀 베르나르(1868~1941)였다. 1886년 고갱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겨우 열여덟 살이어서 '어린 베르나르'라고 불렸다. 베르나르는 음영이 제거되고 진하게 그려진 윤곽선과 강렬한 색의 커다란 평면으로 자품을 뚜렷이 부각시킨 최초의 화가였고, 이런 특성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비합리적 느낌이 강했다."


무엇보다도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매끄러운 질감의 종이로 된 각 페이지에는 글이 채워진 나머지 공간마다 그림들이 실려 있어 글의 내용을 참고하며 감상할 수 있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의 사적인 삶의 부분 또한 책의 흐름을 잇고 있는데, 표면적인 삶에 대한 간략한 언급에 그치고 있어 딱딱한 연대기의 느낌을 준다. 고갱의 글을 인용한 구절이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작품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인간 고갱의 내면적 깊이까지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를 책 한 권에 오롯이 담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은 예술가 고갱, 인간 고갱보다는 그의 작품 이야기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예술가의 생애는 그의 작품에 반영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생애를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근간根幹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 이해의 첫걸음으로 삼기에 좋은 책이라 하겠다. 

 

 

 

책 한 권에 예술가의 생애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는 없지만, 예술가는 자신의 전 생애를 작품에 담기도 한다. 고갱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에 생애에 걸쳐 형성된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집약하여 담아냈다. 고갱에게 있어 <우리는 어디에서...>는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유언과 같은 야심작이었다 한다. 여기, 빛과 색으로 이루어진 그의 아름다운 생애를 소개하며 부족한 글을 마치겠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3미터도 넘는 그림인데 여전히 많은 논란의 대상이다. 고갱은 자살로 이 시기를 끝내려고 했을까? 이 질문도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작품에 대해서도 비판적 해석이 숱하게 있다. 화가 자신은 이 작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사실 이 작품은 그가 그려온 주제를 미학적으로 종합하면서 그의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집약한 것으로,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유언과 같은 야심적인 작품이다. 1898년 2월에 몽프레에게 쓴 편지를 보면 고갱은 이 작품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위쪽에 노란색으로 칠해진 양 구석을 보면 왼쪽에는 경구가 있고 오른쪽에는 내 서명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자리가 상한 채 황금 벽 위에 칠해진 벽화와 같습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고, 원근법과 관계없이 일부러 크게 그린 여자는 웅크리고 앉아 허공에 팔을 들어올린 채 감히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해보는 두 사람을 놀라워하며 바라보고 있지요. 가운데는 과일을 따는 여인이 있습니다. 아이 곁에는 두 마리 고양이가 있고요. 염소 한 마리. 신비롭고 속도감이 느껴지게 두 팔을 들어올린 우상의 모습은 저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인. 그리고 자신의 예감과 전설의 끝을 체념한 채 받아들이고 있는 늙은 여인이 죽음 가까이에 있지요. 그 발치에는 도마뱀을 발로 누른 이상한 하얀 새가 헛된 말의 무용함을 보여주고 있고요.” (중략)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유년기에서 노년기까지 인생의 각 단계별로 달라지는 인간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이다. 고갱에게 인간성이란 본능과 종교적인 열망을 넘어서는 것으로, 서양인(주홍빛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표현) 특유의 논증과 추론의 경향과 우주 질서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근심 없이 살려는 경향으로 나뉘어져 있다. 기법 면에서는 원근법의 불완전한 사용, 평면적이고 단조로운 인물 배치, 자의적인 색의 사용이 특징이다. 고갱은 이 작품을 ‘해결하기 아주 힘든 문제’처럼 여겼고, “작품의 표면은 심하게 거칠지만, (...) 나는 이 작품이 전의 어떤 작품보다도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이보다 나은 작품, 아니 이와 비슷한 작품조차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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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레이트 로젠펠트
다니엘 월러스 글.그림, 문은실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피쉬 Big Fish>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에 잔잔하고 푸른 물결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밤, 또 한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가 마음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 커다란 물고기를 내게 보내준 이는‘다니엘 월러스’이다. 그리고 그 물고기의 이름은 <오, 그레이트 로젠펠트 O Great Rosenfeld>다.‘다니엘 월러스’는 아무래도 great('커다란'의 뜻으로)한 것을 좋아하는가 보다. 영화 <빅피쉬>의 원작 소설을 쓴 것 또한 다니엘 월러스인데, 제목들에서부터 그러한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은가. 제목만 great한 것이 아니다. 그의 펜은 커다란 바람 주머니인지도 모른다. 그의 손끝에서 펜이 움직일 때마다 이야기는 자꾸만 부풀어 올라 great해지기 때문이다. 


<오, 그레이트 로젠펠트>의 주인공 로젠펠트는 몸집이 크지도 남성적인 힘이 넘치지도 않는다. - 제목의 great는 크다,가 아니라 위대하다,라는 뜻이다 - 그럼에도 그는 한 부족의 족장이다. 로젠펠트의 아버지이자 족장이였던 로젠펠트 2세가 벼랑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신분을 이어받은 것이다. 로젠펠트와 나머지 부족들은 로젠펠트 2세가 죽은 벼랑 앞 산등성이에 막사를 짓고 살고 있다. 그 벼랑을 건널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로젠펠트는 몸집이 크지도 않지만 지혜롭지도 못하다. “로젠펠트는 나약하고,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철저히 결여되어 있다.”그는 눈앞의 벼랑에 대한 해결책으로 ‘벼랑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바보 같은 족장에게 반감을 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큰 사람 애킨스’이다. <빅피쉬>에서와 같이 이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거인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빅피쉬>의 거인과는, 보통 사람들보다 몸집이 크다는 공통점밖에는 없다.‘큰 사람 애킨스’는 똑똑하고 잘나고 힘이 센 만큼 무척이나 거만하다. 그는 로젠펠트의 통치 능력에 불만이 가득하다.“법은‘벼랑 주변에서는 아주 조심하라’여야 한다.‘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게 그 일로 배워야 할 점이야. 그의 아비는 발을 헛디뎠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이다.”그리고 이 불만은 마침내‘샐리’에 대한 욕망으로 폭발하고야 만다.‘샐리’는 존재 자체가‘아름다움’인 여인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은 바로 샐리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모든 남성들의 욕망을 부추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약탈을 일삼는 윌슨 부족의 족장 윌슨 또한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샐리의 거절로 로젠펠트 부족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도망쳐,‘벼랑 사건’을 거친 뒤 벼랑 앞에서 살게 된 것이다.‘큰 사람 애킨스’는 그 거만함과 타고난 힘을 믿고 어느 날 도전장을 던진다. 샐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족장의 자리도 차지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승리는 이미 로젠펠트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샐리는 ‘바보 같지만 착하고 상냥한 로젠펠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로젠펠트의 위대함을 증명해주는 동시에 위대함을 키워주는 힘이 된다. 로젠펠트는 마침내 벼랑을 뛰어 넘기로 결심한 것이다. “더 이상 여기, 벼랑 앞의 땅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벼랑들을 뛰어 넘어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위대한 로젠펠트’의 이야기이다. 로젠펠트의 위대함이란‘완전한 불완전함’이었다. 세상에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큰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큰 사람은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만 있는 이 세상에서,‘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줄 아는’로젠펠트의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 자세는‘큰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미덕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자세는‘샐리(아름다움)’와 함께‘벼랑을 건널 지혜와 용기’를 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부족의‘서기’조지이다. “모든 일이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납니다. 그것대로의 방식으로요. 어떤 이야기도 순전히 지어낸 것일 수만은 없어요.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살아봐서 알지만, 꼭 재미있는 이야기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너무 길거나 지리멸렬하게 축축 늘어지고, 진정한 주제라는 것도 없고, 동기도 없단 말입니다. 고통과 고난을 빼놓고는 말이에요. 그것도 낡게 마련이구요. 나는 당신이 일어난 일 그대로, 일어난 방식 그대로 이야기를 적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서기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서기는 일어난 일에 영광의 빛을 씌웁니다.”조지의 말은 <빅피쉬>의‘에드워드 블룸’을 연상시킨다.‘서기, 조지’와‘에드워드 블룸’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을 느끼고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 방식이란 바로‘이야기’이며, 그‘이야기’는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커다란 바람 주머니 - 무한한 상상력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야기꾼‘다니엘 월러스’의 영원한 이상형이 아닐까. 그의 다음 이야기를, great한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이야기란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그저 멈출 뿐이다.”

 

 

                                                                                    

   H07091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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