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날의 선택
유호종 지음 / 사피엔스21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죽어가는 엄마를 지켜봐야 했다. 위암 말기. 쇠꼬챙이처럼 말라가는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말이 없었다. 좋다, 싫다, 아프다, 죽겠다,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죽어갔다. 그것이 생에 대한 체념이었는지, 인내였는지, 분노였는지, 다른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어가는 모양을 지켜보는 것이, 길고 깊은 침묵이 참 힘겨웠다는 기억만이 또렷하다. 죽음이란 것이 이렇게 고요한 것인가, 이런 것이 죽음인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보았던 죽음은 바로 그 깊은 침묵, 정적이었다. 엄마는 말을 잃었구나. 죽었구나.


어느 봄날, 그러고 보니 이맘 때였다, 홀로 죽어있는 엄마의 시신 앞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참 다행이다 그리 생각했던 것 같다. 고통을 끝낼 수 있어서. 마침 또 봄이었다. 죽음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 삶을 삼켜버리는 괴물 같으면서 한편으론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손길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의 고통이 끝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으나, 남겨진 우리들의 삶, 엄마의 빈자리는 불편하고 불안했다. 죽음은 당사자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으로 남겨지는 것.

죽음.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하나의 문제이다.  ‘나’의 죽음, 주변 사람들의 죽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루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 서정주, 「행진곡」 일부


누구나 죽는다는 것,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관념적인 것이든, 실제적인 것이든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고 싶은 문제이다. 막연한 것, 우리가 죽기 전에는 죽음의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 수많은 종교들은 자기들의 신, 교리를 내세워 죽음 이후의 세계(혹은 현상)를 주장한다. 역시 그 주장들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해 볼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죽음의 관념은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게 해 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문제를 던져준다. 그 답을 찾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겠다.  

참으로 죽음이 두렵거든 우리 지금 여기에서 더 착하고 바르게 살자. 참으로 부활과 재생과 온갖 되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도망치고 싶도록 두렵거나 안타까이 그리워지거든 우리 지금 여기에서 더 사랑하고, 더 착하고, 더 바르고, 더 아름답자. (p. 99)


우리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닥칠 것이고,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관념이 아닌 실제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육체적 고통, 공포와 불안,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 등.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는 사람들은 우선 그 사실을 부정한다고 한다. 그럴 리 없어. 내가 죽게 되다니. 억울함에서 기인한 분노의 감정. 그동안 축적해 온 삶의 결과물들을 송두리째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분노, 애석한 마음. 삶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보는 것에서 이러한 분노가 싹튼다고 한다. 그렇지만 삶은 우리의 의지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선물 같은 것이었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 우리의 의지로 어찌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권은 우리 삶의 완성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데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죽음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던 결과이다. 목줄 잡혀 질질 끌려가는 개처럼 스러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고상하게 죽어가기를 바란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관념적 고찰에서부터 실제로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대안에 이르기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부록으로 실린 Will Paper - (유언장/의식이 분명할 때의 의료조치에 대한 요청서/특정 의료조치 요청서/의료 관련 가치관 표명서/의료 대리인 지정서)는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배려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다시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란 지친 삶의 마침표.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해 주었던 죽음. 그렇지만 죽어가는 엄마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엄마는 조금 더 만족스럽게 죽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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