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귀연이와 함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고 독후감을 나누기로 했는데 귀연이도 나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귀연이의 진술에 의하면 너무 바빠서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단다. 내 변명은 '이모가 두통이 심했어'다. 여튼 7월 중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니까.
나는 귀연이의 일상을 물었다. 매우 빡빡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스스로 하고 싶어서 배우는 것들이란다. 그래도 나는 살짝 걱정이 되어 묻는다. 정말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귀연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그럼. 나는 또 묻는다. 네가 좋아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해? 귀연이는 조금 망설이다 대답한다. 이모는 이모가 좋아하는 것들을 어떻게 확신하는데? 나는 말한다. 몰라.
우리 귀연이의 주장에 의하면 뭐든 처음 배울 때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마구 열심히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느끼기에 잘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도 칭찬을 해주고 그러면 더 열심히 하게 되는데, 그러던 어떤 순간에 재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즉 뭐든 자신이 잘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인데 잘하기 위해서는 재미없는 순간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재미있는 건 대부분 좋아하게 되더란다. 와우~ 이 어린 경험론자 앞에서 이모는 일순간 숙연해진다. 우리 귀연이 짱 먹어라!!!
여튼 이렇게 꼬마 철학자 반열에 오른 우리 귀연이게도 스스로 절제하기 힘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음식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미 전설이 되었으니 더는 할 말이 없고, 요즘 라면이라는 신물질을 접하고 매우 힘들어진 모양이다. 귀연이의 모친인 꼬장꼬장 정양은 절대 라면을 끓여주는 분이 아니고 절대 끓여주지 않는 라면을 밖에서 사먹게 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를 둔 귀연이가 아뿔사 친구집에서 라면이라는 신세계를 만난 것이다. 조미료를 거의 먹지 않고 자란 귀연이에게 그 맛은 천국의 맛이었을 수도 있다. 혀에 있던 수용체가 일제히 이 놀라운 자극에 나자빠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또 그 자극을 느끼고 싶을 것이다. 당연한 현상이다. 물론 꼬장꼬장 정양은 분노할 현상이지만 말이다.
귀연이는 이모가 자신의 모친을 설득해 자신에게 광명의 하늘을 열어 달란다.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라면을 라면이라 부르며 자신의 거처에서 친구들과 함께 편하게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귀연이의 요구사항이었다. 물론 나는 꼬장꼬장 정양이 조카들을 위해 뼈가 빠지게 준비하는 밥상에 대해 언제나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그 노력과 철학, 실천이 뭐랄까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믿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아이들의 몸에 보약보다 좋은 효과를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귀연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지금까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 예방주사를 빼고는 병원에 간 적이 없다. 하연이도 그렇고.
그러나 귀연이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몸이 건강한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건강한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귀연이에게 불필요한 죄의식이 생기는 것도 싫다. 라면을 먹는 일이 경범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닌데 엄마를 속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점점 그렇게 변하겠지만 꼬장꼬장 정양과 귀연이 사이에 너무 많은 비밀이 존재하는 것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모지만 이럴 때 뭔가 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양에게 전화를 했다.
나 : 잘 지내시오?
꼬장꼬장 정양 : 잘 지낸다. 왜?
나 : 우아하게 답하시오.
꼬장꼬장 정양 : 왜? 귀연이가 전화했냐?
나 : 돗자리를 깔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소.
꼬장꼬장 정양 : 용건만 말해. 귀연이 때문에 속상해 죽겠으니까.
나 : 귀연이가 왜?
꼬장꼬장 정양 : 옷에 라면 국물을 묻혀왔어.
나 : 푸하하! 미숙하기는. 여튼 언니 속상한 건 알겠어. 그런데 좀 융통성이 있으면 안될까?
꼬장꼬장 정양 : 나 위해서 이런 거 아니잖아.
나 : 알아. 그래도 귀연이가 자꾸 언니에게 숨기는 게 생기면 좋아? 그것도 고작 라면으로.
꼬장꼬장 정양 : 그게 정말 속상해. 라면 먹으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더 심한 야단은 안쳤어.
그런데 안하던 거짓말을 하는거야. 친구가 먹다가 묻혔다고.
나 : 언니 귀연이는 지금 거짓말을 해서라도 엄마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거야. 알잖
아. 귀연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뭔지. 언니, 귀연이를 더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라면이라고.
꼬장꼬장 정양 : 그렇게 하나 둘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하면? 그때는?
나 : 상황에 따라 대처하자. 예를 들어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결혼을
하겠다도 하면 내가 언니보다 먼저 말릴께.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 대처하자.
꼬장꼬장 정양 : 그거 안먹는게 그렇게 힘들까?
나 : 언니, 나도 커피 못 끊어.
꼬장꼬장 정양 : 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나 : 귀연이랑 이야기를 먼저 해 봐.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 먹게 될 거라면 언니가 그것도 가르쳐
지나치지 않게 적당히 즐기는 방법을 말이야.
꼬장꼬장 정양 : 정말 모르겠다. 나쁜 건 멀리하게 하고 싶은데. 잘 안되네.
나 : 불가능해. 그건 귀연이가 해결할 일이고. 그리고 언니, 꼭 죽는 날까지 좋은 장기를 유지할
이유가 있을까? 장기기증의 큰 뜻을 품어서 그런다면 모를까 나는 적당히 나이 들면서 몸도
상해야 한다고 생각해.
꼬장꼬장 정양 : ㅎㅎㅎ. 귀연이랑 이야기 해볼께.
그나저나 너는 귀연이 일 아니면 전화도 안하냐?
나 : 언니, 나중에 통화해~ 안녕!
언니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없지만 왜 모르겠는가. 그 애틋하고 위태로운 마음을.
그리고 언니는 내 말에 내심 서운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처지를 몰라준다고. 너는 이모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경험에 의하면 뭔가 금기를 만들 때는 신중해야 한다. 영원한 불구가 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 또한 꼬장꼬장 정양이 알는 지 모르겠으나 귀연이가 내게 각별한 이유는 꼬장꼬장 정양의 딸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꼬장꼬장 정양을 위로하기도 하고 귀연이의 마음을 가볍게 하기도 하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뒤적인다. 그리고 발견한 글들. 첫번째 글은 꼬장꼬장 정양에게, 다음은 귀연이에게, 마지막은 내 마음이다. 역시나 이럴 때 이만한 책이 없다. 단언한다.
기대
기대하는 마음은 기대하는 대상을 조금씩 갉아먹어 가면서 무너뜨리며 동시에 자신도 무너져 내리게 한다. 누군가를 향해,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 품었던 기대가 실망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경우는 없다. -173쪽
배신의 개운함
배신은 신뢰의 가면을 탈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잘 자고 난 아침처럼 개운하다. 당장은 아니고 천천히. 그렇지만 완벽한 믿음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보다 더 완벽하게. - 178쪽
반하다
'반하다'라는 말 앞에는 '홀딱'이란 수식어가 적격이다. '홀림'의 발단 단계. 그 어떤 호감들에 비해, 그만큼 순도 백 퍼센트 감정에만 의존된('의존한'이 아니라) 선택인 셈이다.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그리 쉽게 끝나지는 않는다. 어차피 아무런 판단을 동원하지 않고 행한 호감의 의식이므로. 벼락처럼, 자연재해처럼 한순간에 완결되는 감정이지만, 수습은 쉬운 일이 아니다.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