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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김이설의 장편소설 <환영>은 이렇게 끝을 맺고 다시 시작하는 윤영의 이야기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경계 표지판이 심하게 흔들렸다. 시에서 도로 들어섰을 때, 안녕히 잘 가시라는 말 때문에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금세 물가가 나왔다. 곧 얼음이 얼 것이었다. 왕백숙집으로 출근하던 첫날 아침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걸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열심히만 하면 돈은 더 벌 수 있다는 왕사장의 말이 어쩐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던 날, 어떤 이들에게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상에 윤영도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만난 남자와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으니까, 상 앞에 책을 펼쳐든 남편이 있고, 그리고 딸을 낳았으니까. 그렇게 희망할 것들이 생긴 현실은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게 붙어있는 목숨을 기어이 살아내라고 붇돋는다. 결국에는 그 희망들이 자신을 잘근잘근 씹어놓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예감을 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애써 외면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희망할 것이 생겨 희망적인 윤영에게 현실은 기다렸다는 듯이 추파를 보낸다. 눈 한번 딱 감으면 별거 아니라고. 세상은 진작부터 그랬다고. 그렇게 한번 눈을 감고 경계를 넘으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싸갈 수 있고, 딸 아이에게 뭔가 해 줄 수 있고,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 붙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윤영은 눈을 감고 경계를 넘는다. 두렵지만 멈출 수는 없다. 그렇게 윤영의 몸에 닭비린내가 달라붙고 허벅지에 검은 멍이 들기 시작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혹은 어제보다 못한 오늘을 살아낼 뿐이다.
이제 남편이 아이를 키우고 밥상을 차린다. 돈만 받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윤영이 남편에게 생활비를 준다. 그리고 이제 남편이 차린 밥상을 윤영이 엎는다. 그리고 남편에게 개새끼라고 욕한다. 개새끼인 남편은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미안하다는 말은 계속 참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미 현실에 목덜미를 물렸으니 질질 끌려가보자는 말처럼 들린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보자고 말이다. 윤영은 그런 남편의 책을 찢는다. 자신이 잠시나마 갖었던 희망에 대한 소소한 분노다. 그러나 분노도 잠시다.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이 반복되는 윤영과 윤영의 가족은 곰팡이 낀 지하로 흘러 들어간다. 이제 여기서 벗어나고 아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다시 닭비린내를 맡아야 한다. 다시 아무 사내와 뒹굴어야 한다. 그렇게 윤영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
윤영이 동생 민영의 죽음을 전해듣는 장면은 이렇게 쓰여졌다.
"동네 놀이터에서 쓰레기를 태우는지 매캐한 냄새가 났다. 너무 매워 그제야 눈물이 났다. 밤하늘에 별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윤영의 눈에 별 같은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렇게 쓰고 있는 작가가 내심 고마웠다. 던접스럽고 막막한 삶에 어쭙잖은 느낌표를 붙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작가. 지독하지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