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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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의 장편소설 <환영>은 이렇게 끝을 맺고 다시 시작하는 윤영의 이야기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경계 표지판이 심하게 흔들렸다. 시에서 도로 들어섰을 때, 안녕히 잘 가시라는 말 때문에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금세 물가가 나왔다. 곧 얼음이 얼 것이었다. 왕백숙집으로 출근하던 첫날 아침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걸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열심히만 하면 돈은 더 벌 수 있다는 왕사장의 말이 어쩐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던 날, 어떤 이들에게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상에 윤영도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만난 남자와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으니까, 상 앞에 책을 펼쳐든 남편이 있고, 그리고 딸을 낳았으니까. 그렇게 희망할 것들이 생긴 현실은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게 붙어있는 목숨을 기어이 살아내라고 붇돋는다. 결국에는 그 희망들이 자신을 잘근잘근 씹어놓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예감을 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애써 외면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희망할 것이 생겨 희망적인 윤영에게 현실은 기다렸다는 듯이 추파를 보낸다. 눈 한번 딱 감으면 별거 아니라고. 세상은 진작부터 그랬다고. 그렇게 한번 눈을 감고 경계를 넘으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싸갈 수 있고, 딸 아이에게 뭔가 해 줄 수 있고,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 붙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윤영은 눈을 감고 경계를 넘는다. 두렵지만 멈출 수는 없다. 그렇게 윤영의 몸에 닭비린내가 달라붙고 허벅지에 검은 멍이 들기 시작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혹은 어제보다 못한 오늘을 살아낼 뿐이다.  

이제 남편이 아이를 키우고 밥상을 차린다. 돈만 받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윤영이 남편에게 생활비를 준다. 그리고 이제 남편이 차린 밥상을 윤영이 엎는다. 그리고 남편에게 개새끼라고 욕한다. 개새끼인 남편은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말,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미안하다는 말은 계속 참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미 현실에 목덜미를 물렸으니 질질 끌려가보자는 말처럼 들린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라도 살아보자고 말이다. 윤영은 그런 남편의 책을 찢는다. 자신이 잠시나마 갖었던 희망에 대한 소소한 분노다. 그러나 분노도 잠시다.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이 반복되는 윤영과 윤영의 가족은 곰팡이 낀 지하로 흘러 들어간다. 이제 여기서 벗어나고 아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다시 닭비린내를 맡아야 한다. 다시 아무 사내와 뒹굴어야 한다. 그렇게 윤영은 오늘을 살아야 한다.  

윤영이 동생 민영의 죽음을 전해듣는 장면은 이렇게 쓰여졌다.   

"동네 놀이터에서 쓰레기를 태우는지 매캐한 냄새가 났다. 너무 매워 그제야 눈물이 났다. 밤하늘에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윤영의 눈에 별 같은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렇게 쓰고 있는 작가가 내심 고마웠다. 던접스럽고 막막한 삶에 어쭙잖은 느낌표를 붙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작가. 지독하지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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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7-07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 삶이 이리도 묵직하고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암담할까요?
사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윤영에게는 욕으로 돌아올 말일 것 같습니다.
장미빛 미래를 꿈꾸기에는..삶은,, 현실은,, 우리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악몽의 연속인데....어쩌면 다 환영일지도...
현실보다 더 현실일 것 같은 소설처럼 느껴집니다.

굿바이 2011-07-08 16:36   좋아요 0 | URL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소설보다 더 징그러운 상황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저 외면하고 또 모르는 척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구요.
읽기 편한 책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발 밑 간지러운 세상을 확인합니다.
다 읽고 꽤 한참 멍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웽스북스 2011-07-07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좋아해! 꺄아~

굿바이 2011-07-08 16:36   좋아요 0 | URL
꺄아~ 그러니까 제가 웬디님이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째집니다~!

2011-07-11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1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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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꾸는 꿈속에서, 매미들은 소리 죽여 노래했다. 그때 우리는 그걸 원했어. 그때 우리는 그게 필요했어. 그때 우리는 그걸 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때 우리는 그걸 했어. 그때 우린 그걸 한번 더 했어. 그때 우린 그걸 계속했어. 그리고 우리는 그게 몹시, '좋았어.' " (352쪽)        글을 읽다 김애란작가의 사진을 여러 번 보았다. 눈썹을 가린 앞머리와 흰 얼굴. 당찬 여름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작가의 글은 작가의 얼굴을 많이 닮아있었다.   

이야기는 긴장할 수 있을 정도의 정적과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두근거림이 적절히 잘 섞여 있었다. 격식은 갖추되 계산된 빈틈을 염두한 작가의 글은 '한아름'과 '한대수'라는 아들과 아버지를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잘 안착시켰다. 그 간극에서 자신의 호흡과 독자의 호흡을 동시에 고려한 배려와 명민함이 돋보였다. 나 역시 어느 대목에서는 소금물에 넣은 조개가 해감을 하듯 그렇게 마음 한 자락이 슬며시 풀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난 지금 묘한 기우가 생겼다. "나는 예전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쓰면 멍청해지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요즘에는 그것도 용기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나는 그걸 가지려고 해."(227쪽)라고 써 버린 작가가 쓸 수 있는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이렇게 능력있는 작가가 덜컥 대책없이 늙고 죽어가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다음에는 어떤 주인공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더 나아가 아직은 당찬 여름을 닮은 작가가 이렇게 장애물 없는 단거리를 가볍게 뛰어버리면 다음에는 어떤 코스를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143쪽)        나도 어느 작가에게 마음을 줄 때 그 작가를 사랑하는 기준이 있다. 그건 그 작가가 미련하게 현실을 버티려 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다. 무너질 것을 알지만 버티는 것, 실패할 것을 알지만 버티는 것, 통곡하게 될 것을 알지만 버티는 것. 그때 나는 안다. 그것이야말로 작가가 내게 건내는 '희망'의 몸짓이라는 것을.        나는 김애란작가가 더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음에도 타협을 한 것 같아 서운하다. 그렇지만 그저 내가 감지한 이 기운이 터무니없기를 바란다. 그렇게 어느 순간 공중부양하는 작가들을 너무 많이 본 탓에 지레 놀란 것이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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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1-07-0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두근두근한 작품을 들고 돌아올거에요. 김애란이니까!
:D

굿바이 2011-07-06 09:54   좋아요 0 | URL
아멘~! :)

風流男兒 2011-07-0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요즘같은 생활에서는 읽지 못하고 지나칠 확률이 높지만, 모든 걸 다 떠나서 문장과 문장사이의 저 간격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만약 다음 작품을 읽고 서재에 글을 쓴다면, 지금의 간격이 얼마나 줄어들어있을까, 혹은 더 늘어나있을까, 아니면 글 자체가 올라오지 않을까. 에 대한 나름의 기대도 있어요. 물론, 읽지 않은자가 그나마 감상했답시고 내지르는 말이니, 요건 이해와 양해와 하해와 같은 은혜로 혜량해주세욥 :)

웽스북스 2011-07-05 17:53   좋아요 0 | URL
김풍류님 회사에 숙제가 너무 많은듯.
말을 하지 않고 말하는 법을 아는 정테일언니님 ㅋㅋ

굿바이 2011-07-06 09:59   좋아요 0 | URL
뭐든 하나라도 마음에 든다니 그저 감사하오~!!!!!
요즘 많이 바쁘지요?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있으니 걱정은 안하겠소. 그래도 더위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물도 많이 마시고, 시간되면 언제 한 번 만나세 :)

아참, 웬디양, 그대의 내공을 내 어찌 따라가리오. 나는 멀었소~ :)

치니 2011-07-06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또 공감입니다.

굿바이 2011-07-06 13:52   좋아요 0 | URL
치니님, 어찌 잘 지내시고 있나요?

책 읽으셨군요. 좋은 점도 많은데, 자꾸 갸우뚱거려지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아~ 그나저나 공감한다는 말이 이렇게 따뜻한 말이었군요.
쫌 신나요! :)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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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우물치고는 고여 있는 지하수가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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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06-21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전 이 책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을 아주 좋아했었어요.
ㅎㅎㅎㅎ

굿바이 2011-06-21 18:13   좋아요 0 | URL
나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은 좋았어요. <대성당>도 나쁘지 않았고.
그러나 뭔가,내가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거나, 김연수를 좋아해 보려는 의지가 너무 강했던 탓에....ㅡㅜ

굿바이 2011-06-22 11:33   좋아요 0 | URL
이건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단편에 보면 빵가게 아저씨와 주인공들이 빵을 먹는 장면이 있잖아. 그런데 그 장면이 인상적이면서도 싫었어.
그런 상황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또한 그런 위로에 대해 믿지도 못하겠고.
뭐래....괜히 헛소리한다 ^^

poptrash 2011-06-2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여 있는 지하수가 적기보다는 물이 콸콸콸 안 나오고 감질나게 졸졸졸... ㅎㅎ

굿바이 2011-06-22 11:07   좋아요 0 | URL
레이먼드 카버가 수압조절자,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

네꼬 2011-07-0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에 읽으면서 굿바이님 생각났어요. 읽고 있는 중이지만 지금 여기 와서 추천 누름. 다 읽고 또 얘기할게요.

굿바이 2011-07-05 16:59   좋아요 0 | URL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해요^^
 
밤의 공중전화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채호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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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맷집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시에 얻어맞고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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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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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먼 사람 많이 괴롭혔습니다. 문학 따위가 뭘 할 수 있냐고 주제넘게 숱하게 물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문학도 문청도 모두 폐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랄맞은 현실이 만든 폐허가 딱히 싫지도 않았습니다. 폐허 앞에서도 박수치는 사람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물정 모르는 그들의 환호가 고소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폐허 어디쯤의 조등弔燈 앞에서 이렇게 나직히 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내 따뜻하고 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울고 있는 줄 알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의 비평에는 열등감도 허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장욱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진실은 존재의 어떤 자세다" 라고 쓰셨더군요. 그 말이 몇 일 밤과 낮을 따라다녔는지 모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장욱의 시집 한 귀퉁이에 저도 그렇게 썼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도 지금도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전작 <몰락의 에티카>를 집었을 때 제 딴에는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제목이 전부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저는 "몰락의 에티카"라는 제목이 책의 거의 모든 것이자 문학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김승옥과 이청준, 황지우와 강정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저작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보니 신형철이라는 이름의 울림도 나쁘지 않군요. 그럼 이번 책의 제목<느낌의 공동체>는 어떠했냐구요. 말을 빌려오자면 단독성이 특수성으로 나아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특별한 문학이 아닌 어떤 문학에 대해서는 비슷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느낌의 곁을 내주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물론 모든 문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느낌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같은 계열에 놓인 그러나 꼭 일치할 필요도 없고 극하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동일한 느낌을 공유할 필요도 없고 공유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순서에 매이지 말고 책을 좀 볼까요.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더듬는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쓰셨더군요.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1999)가, 최근에는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 지성사,2005)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聖者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 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라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p.126 
 
저는 '실존적 깽판'이라는 표현을 보고 웃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내 머리를 조아렸지만 말입니다. 여튼 시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 사람만이 입성한다는 직관의 영역에 입성한 듯 싶더군요. 이럴 땐 저야말로 실존적 '깽판'을 거두고 그저 감탄과 존경을 바치면 되는 일이죠.   

안현미의 <옥탑방>을 이야기는 장으로 넘어가 볼까요.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체험도 풍성해질 테니 인생을 모르는 핏덩이들은 더 기다려야 하겠고.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感電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그 뒤로 20년 정도 더 살기는 했지만 사실상 랭보는 이미 십대 후반에 감전사한 거지. 감전의 천재가 자기 자신에게 타살된 거야. -p.206   

개인적으로 안현미의 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 시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평이 꼭 날이 서있어야만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끼는 대목이었습니다.  
 
최갑숙의 <밀물여인숙3>과 안시아의 <파도여인숙>에 대해 쓴 글도 좀 볼까요.  
그런 날에는 또 이런 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 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p.106 

이런 감성도 있었단 말입니까.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순전한 가정이지만 알았으면 정말 오다가다 발목이라도 잡았겠습니다. 저는 늘 뽕짝 같은 수작에 들뜨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책을 나름 필사할 수는 있지만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한 문학을 이야기하는 비평가가 현정권이 용산에서 벌인 일을 말하고, 최진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신경민의 멘트를 옮겨 적고, 가수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가수 비가 부른 노래말을 논하는 것은 흥미롭다고 말해버리기는 아쉬웠습니다. 사유의 폭이 광폭이라고 하기에도 고종석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 꺼림칙합니다. 아니 사유의 폭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을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저는 특정한 부조리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것을 중용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뜨거운 불구덩이에 빠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문학을 절망의 형식이라 말해주는 이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들이여, 부디 사산死産되지 말고 기어이 태어나라"라고 주문하는 그 떨리는 목소리가 있어 나도 떨렸습니다. 그리보니 당신은 울고 있는 산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폐허 속에서 태어난 것들을 기쁘게 받아 앉고 그들이 목도해야 할 절망의 현실을 울어주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창동의 <시>에서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밖에 없네요."라고 말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지 모르는 '양미자'씨가 있는 한, 그리고 '양미자'가 사산되지 않고 태어날 것을 주문하는 산파가 있는 한 폐허에서 제가 본 불빛은 조등弔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지만 정녕 조등은 아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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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5-2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꼭 씹어 먹는다,는 건 이런 거군요! 음..
굿바이님이 저자에게 보내는 연서 같아서 댓글로 끼어들기가 좀 민망하지만, 덕분에 저도 이 책을 읽어보싶어졌으니 고맙다는 인사로 기어이 한 줄 남기고 갑니다. 멋진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굿바이 2011-05-20 18:00   좋아요 0 | URL
제가 더 감사하죠^^
연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마음일 것 같아요. 이왕이면 비평도 문학적이면 좋겠는데 저자의 책은 전문성과 함께 문학성도 뛰어나서 읽기 불편하지 않아요.
메리포핀스님, 금요일이에요. 뭐든 즐겁고 편안하시길 바래요~


치니 2011-05-2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여차하면 눈물 바람부터 하니, 늙은 탓만 하기도 민망합니다. 암튼 또 울컥하게 만드셨어요. ㅠ

굿바이 2011-05-23 09:17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는 잘 울어요. 혼자 걷다가도 울고, 나무 보고도 울고....
아침에도 머리 감다가 울었어요. 정말 나이드는 탓만 하기에도 민망해요 ㅜㅡ

흰그늘 2011-05-2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조등弔燈에 대한.. 생각들로 오랜 시간을 앉아있었드랬습니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주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불빛은.. 오랜시간.. 품어왔었던..
그 무언가를 향하여..

나로하여금..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지..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누구나가 품은 '꿈' 은 다르지만.. 꿈조차 추워지는..

조등앞에서 서러워지는 날들에라도.. 여전히.. 마음에 '진심' 을 담아봅니다..^^
위의 글을 읽어며..








굿바이 2011-05-23 09:22   좋아요 0 | URL
그저 느낌으로 짐작만합니다.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꿈조차 추워지는 그런 세상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진심'을 담는 분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기만 합니다.
여름이 오고 있다고 하네요. 모쪼록 뭐든 즐거운 여름 보내셨으면 합니다 :)

2011-05-31 0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31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1-06-0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 님의 책이 나왔군요. 굿바이 님 리뷰 때문에 알았네요.
별 다섯개에다 그야말로 애정어린 마음이 촘촘하게 밀도있게 그려저 있네요.
리뷰 좋은데요! 감성 감성,,, 고것이 지금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굿바이 2011-06-02 11:12   좋아요 0 | URL
애정을 들키다니 저는 아직 멀었나 봅니다^^
요즘은 신형철씨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아진 것 같습니다. 괜히 혼자 뿌듯해하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날도 더워지는데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