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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해(2000년) 7월부터 신문의 <책의 서평>을 읽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책의 향기>, 조선일보 <Books책마을, Books책>, 한겨레 <책과 생각>, 경향신문 <책과 사람, 책과 삶>, 중앙일보 <책속으로, 행복한 책읽기>, 광주일보 <책>, 무등일보 <Book>. 처가 자주 사용했던 빨간색연필로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에 밑줄그었다. 신간이나 중고 책을 알라딘에 주문했다. 토요일 신문에 소개된 서평을 읽는 즐거움이 책읽는 습관을 만들었다. 주말이 기다려졌다. 그때부터 모았던 신문을 여태 버리지 못하다 금일에야 다 보냈다. 호기심을 자극했던 많은 글에서 나를 놓아 주었다. 그때의 논객, 작가, 교수, 정치인, 취미 또는 활동가는 어디서 무탈한지 궁금하다.  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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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는 추석 연휴지만 나에게는 평일 연휴다.", 연휴 중에도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 긴 연휴를 보내다 보면 후유증이 생긴다.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 좀 나르려라 싶다.

 

 2주이상 여행을 다녀와도 그렇다. 자신이 시공간의 불일치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곳을 떠날 때 자신은 남는다. 기억이 희미해진 훗날, 가야만 찾을 수 있는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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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초가는 되었던가
    from 고립된 낙원 2019-03-06 07:56 
    일본이 우리 땅을 유린 적은 7년전쟁(임진왜란)때도 있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 썩은 정치 권력계층이 있었다. 그 썩은 권력 때문에 자발적인 동학혁명이 촉발되었다. 부패한 권력이 불러들인 일본에 의해 나라는 망했다. <아리랑>(조정래)은 생생한 민초들의 유린 된 삶을 보여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작가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미래를 향하지만 역사의식 만이 균형감을 일깨워 준다. 그런 의미에서 조정래의 <아리랑>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소록도를 다녀 오면서 지나쳤던 홍암 나철 기념관을 볼 작정이었다. 그 동안 홍암 관련 대표적인 책을 읽었던터라 작년 11월에 개관한 기념관을 보고 왔다. 홍암은 나주나가 직장공파다.

 

 나철(1863~1916,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 생) 평전은 선생이 살았던 한일합병 전후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단군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단군조선시대 또한 우리 역사에 어떠한 표상이었는지를 밝힌다.

 

  홍암은 민족의 실존에 관한 뿌리, 민족혼의 바탕을 우리의 역사 시작인 단군에서 찾았다. 그리고 고려 때까지 이어져 오던 신교(단군교)를 7백 년 만에 겨레의 얼을 담은 민족 종교로 중광(부활)했다.

 

  이에 역사 주권을 지키는 것이 곧 자주민족의 길임을 깨달은 많은 애국지사들이 선생이 중광한 대종교에 동참했다. 김교헌, 윤세복, 이회영, 서일, 김좌진, 박은식, 신채호, 주시경, 신규식, 정인보 선생 등 학자와 언론인, 독립투사들이 대종교 교도로서 국내에서는 우리글과 말을 지키고 만주에서는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

 

  다가오는 10월 3일 개천절은 나철 선생이 단군의 개국입도(나라를 열고 도를 세움)를 기리는 명절인 개천절을 경축일로 정하고 상해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정한 데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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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3. 천주교광주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주관으로 주교님을 모시고 '도보성지순례'가 있었다. 1,500 여명이 함께 순례길(12.2km, 거금휴게소-거금대교-소록도1번지성당-해안길-소록도2번지성당/소록도병원-거금대교-거금휴게소)을 돌았다. 고통과 한이 서린 곳에서 가장 높은 공감이 울어난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건물에서 느끼는 공통점은 붉은 벽돌이다. 1960년대 초에 다니던 우리 국민학교도 붉은 벽돌로 지워진 교실이었다. 지난번 견학했던 서대문 형무소도 붉은 벽돌이었다. 이번 소록도 건물도 붉은 벽돌이었다.

 

   검시실 또는 해부실로 불리는 건물에 들어서면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장과 흡사했다. 일제 때 소록도의 환자는 3번 죽었다고 한다. 한센병 발생, 사후 시신 해부, 장례 후 화장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소록도에 한센인 치료소인 자혜의원을 개원한 지 100년이 지났다. 나병의 원인체는 Mycobacterium leprae 이라는 세균성 질병다. 신경계, 기도, 피부, 눈에 육아종 발현으로 통각 능력을 상실한다. 나병의 의미는 서양 표현들은 '비늘'이라 뜻이며 동양에서의 '나'는 뚜꺼비를 의미한다.

 

   1984년 5월 4일 소록도에 교황요한바오로 2세께서 방문하셨다. 2011년 가수 조용필의 자선공연때는 '한오백년' 노래로 모두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육영수 여사를 비롯한 그밖의 정치인들이 찾아 왔었다고 한다. 2016년에는 문재인 후보가 찾아 왔었다. 최근에는 소록도 외국인 간호사(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이 다큐 영화화 되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장애인이다. 눈물로 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이 곧 우리라는 마음으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다. 삶이 지치고 외로울 때 찾아와 기도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평화를 얻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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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중 스님은 1942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 뒤편 단칸방 집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사라진 그 옛 집터를 더듬어 보려고 백 번 쯤 가봤다고 한다. 그곳에서 사금파리를 가지고 놀면서 담 너머 죄수를 봤던 기억이 어렴풋히 났다고 했다.   

 

  산과 강이 잘 어우러진 세계적인 도시 서울에는 우리 역사의 아픈 현장이 살아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역학 구도에 따라 우리의 등거리 외교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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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립운동의 성지
    from 고립된 낙원 2019-04-14 22:09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다. 유관순, 안창호, 한용운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 시대 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목숨을 잃었다. 일제 통감부가 서대문형무소를 지은건 1908년이다. 1911년 안악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구도 '백범 일지'에 감옥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책은 당시 형무소의 도면과 사진, 수감자들의 수형기록카드 등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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