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전집 12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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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때는 무척이나 관심이 높았고 자주 언급되었지만, 요즘에 롤랑 바르트를 언급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많지 않을 것이고 그의 글을 읽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것이다. 어쩌면 유행이 지난 이의 글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고 읽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제목이 눈에 들어와 읽게 됐고 적당히 읽을 만했다.

 

신화, 기호, 텍스트, 소설적인 것의 '현기증 나는 이동 작업'을 통하여, 프랑스와 세계에 가장 활력적인 사유체계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롤랑 바르트는, 그의 사후 15년이 지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문단의 표징으로, 또는 소설 속의 인물로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의 모든 모색과 좌절, 혹은 기쁨은 다만 그 자신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닌 오늘날의 모든 전위적 사유가들에게도 공통된 것으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의 문학 편력에 대한 조망은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 책 속에 옮겨진 글들은 바르트의 후기 사상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 것들이다. 그의 후기 작업은 '저자의 죽음'을 그 시작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 책의 첫 번째로 하였다. 그리고 '작품에서 텍스트로,' 그 다음에는 그의 후기 작업의 이론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 [텍스트의 즐거움][강의]가 실려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의 후기 문학 실천의 이론적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그가 생전에 출판하기를 허락한 유일한 일기인 [심의]도 여기에 실려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그의 말년에 문학적 관심사가 무엇이었나를 소상하게 알 수 있다.”

 

편역 編譯 -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편집하여 번역하는 것

 

딱히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어 적당히(그리고 대충) 읽었지만 그의 후기 사상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담이 많아 롤랑 바르트가 어떤 생각과 입장이었는지 조금은 쉽게(그리고 솔직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이 아닌 목소리가 많이 들어가 있어 좀 더 수월하게 그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아 그런 말조차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적당하게 읽었고, 이런저런 관심 속을 살짝 채울 수 있었다.

 

아직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뭘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 살짝 훑어봤다는 말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읽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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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하 까치글방 131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 까치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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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 https://blog.naver.com/ghost0221/222283644767

참고 : https://news.joins.com/article/2965077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613&cid=40942&categoryId=33368

 

 

 

 

생각보다 더 어렵고 느리게 읽혀진 상편에 비해서 하편은 그나마 조금은 속도를 내며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책을 읽거나 혹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도 있어 생각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고.

 

1차 세계대전에서 옛 소련의 붕괴에 이르는 20세기의 인류역사를 통사적(通史的)으로 다룬 역사서이다. 20세기를 세계대전의 격동기인파국의 시대(19141945), 전후 경제부흥기인황금시대(19451973), 석유파동 이후의 경제침체기인산사태의 시기(19731991)3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부분 중 뒷부분인 하편은 장기 19세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벌어진 여러 사건들 혹은 변화들을 잘 살펴보고 있고, 단기 20세기가 어떤 식으로 파국을 맞이했는지를 (되도록) 자세히 다뤄내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공산주의·파시즘을 역사해석의 기본요소로 활용하였다. 즉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파국의 시대'를 사회주의혁명과 파시즘이 맹위를 떨친 시기로 규정하고, 1945년 이후 1973년 석유파동 이전까지의 '황금의 시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이 이념을 전개하는 시기로, 1970년대 중반 이후 '산사태의 시기'를 양 진영간 균형이 깨져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전세계의 사회경제가 구조적으로 경제불황에 치닫는 시기로 규정함으로써 20세기의 역사를 기존의 가치와 제도가 무너지고 파국과 번영이 함께 한 '극단의 시대'로 정의한 것이다.”

 

상편을 말할 때도 과연 진정 20세기의 자서전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고 했는데, 그런 평가가 가능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최소한 20세기를 폭넓게 다룬 책 중 이걸 빼면 허전하다고 말할 순 있을 것 같다.

 

많은 것을 깨닫고 느끼진 못했지만 어쨌든 장기 19세기 3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과 이것까지 다 읽었으니 그냥 그걸로 만족하게 된다. 에릭 홉스봄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책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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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까치글방 130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 까치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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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s://news.joins.com/article/2965077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92613&cid=40942&categoryId=33368

 

 

 

홉스봄에 대한 관심은 항상 많았었고, 장기 19세기를 다룬 역사 3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도 다 읽어봤지만(당연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쩐지 단기 20세기를 다룬 극단의 시대에 손이 가진 않았었다. 너무 근거리의 역사고 홉스봄을 통해서 접하기 전에 이미 여러 방식으로 접한(그리고 끝자락을 직접 겪었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단순한 변덕 때문일까?

 

어쨌든, “1차 세계대전에서 옛 소련의 붕괴에 이르는 20세기의 인류역사를 통사적(通史的)으로 다룬 역사서이다. 20세기를 세계대전의 격동기인파국의 시대(19141945), 전후 경제부흥기인황금시대(19451973), 석유파동 이후의 경제침체기인산사태의 시기(19731991)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니 이 시대를 조금이나마 겪은 사람으로서는 이걸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됐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공산주의·파시즘을 역사해석의 기본요소로 활용하였다. 즉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파국의 시대'를 사회주의혁명과 파시즘이 맹위를 떨친 시기로 규정하고, 1945년 이후 1973년 석유파동 이전까지의 '황금의 시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이 이념을 전개하는 시기로, 1970년대 중반 이후 '산사태의 시기'를 양 진영간 균형이 깨져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전세계의 사회경제가 구조적으로 경제불황에 치닫는 시기로 규정함으로써 20세기의 역사를 기존의 가치와 제도가 무너지고 파국과 번영이 함께 한 '극단의 시대'로 정의한 것이다.”

 

과연 이 책이 진정 20세기의 자서전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먼거리가 아닌 근거리의 시대를 되도록 객관적인 시선에서 그리고 넓은 범위에서 살펴보고 있으니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혹은 20세기란 어떤 시대였는지를 궁금하다면 읽을 만한 책이라 말하고 싶다.

 

아직 상권만 읽어서 하권까지 다 읽으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다. 게으름도 이정도면 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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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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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을 알고 읽게 된 건 독특한 혹은 평범하지 않은 경력 때문이었다.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어쩌다가 철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게 이색적이었고,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는 게 아닌 독일에서 머물며 독일어로 저술하고 있다는 점도 희한했다. 그런 것들을 떠나 책의 내용도 주목하게 되기도 하고.

 

이전에 읽은 피로사회와 마찬가지로 투명사회또한 지금 현재를, 이 시대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고 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을 비밀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2012년 독일에서 먼저 출간되었는데, ‘투명성을 절대적인 가치로 간주해오던 독일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이다. 정치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투명성이 강조된다. 사람들은 투명성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인터넷, SNS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투명한 사회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한병철은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라고 주장한다. 투명사회는 우리를 민주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상태,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몰아넣는다. 이 새로운 통제사회에서 우리들은 너무나도 자발적으로, 심지어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공개해버린다.”

 

짧은 분량이긴 하지만 내용은 얄팍하다 할 수 없다. 단단하고 견고하다 할 수 있다. 어떤 묵직함도 느껴지고. 짧은 글을 곱씹으며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게 만들고 지금 사회를 함께 진단하게 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존 학자들이 분석하고 내놓았던 의견들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저자만의 독특한 사유 또한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자신의 생각을 짧은 글로 잘 정리해놓고 있고, 우리의 일상이 과거와 달리 어떤 식으로 변화했고 어떤 모습인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고 있어 흥미로운 논의를 해주고 있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신작 <투명사회>가 출간되었다. <투명사회>투명성에 대한 독일 사회의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여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Transparenzgesellschaft(투명사회)>(2012)와 우리 삶에 새로운 위기를 불러온 디지털 문명에 대한 진단을 제시한 <Im Schwarm. Ansichten des Digitalen(무리 속에서.디지털의 풍경들)>(2013)을 번역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전복적인 성찰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 그것은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밖으로 표출시키고 정보로 전환시킨다. 반면 낯선 것, 모호한 것, 이질적인 것들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투명사회>는 부패 근절과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결코 깨달을 수 없을 투명성의 시스템적 폭력성을 한병철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날카롭게 파헤친다.

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이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이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이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명성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투명한 사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투명사회>에서 한병철은 이렇게 긍정적인 가치로 간주되어온 투명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통제사회라고 주장한다. 투명사회는 우리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상태,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몰아넣는다. 이 사회의 거주민들은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심지어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채 스스로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이곳에서는 빅브라더와 파놉티콘 수감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거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정보로 바꿔버림으로써, 우리를 모든 것이 완전히 털리고 발가벗겨진 유리 인간의 상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 상태, 모두가 동일해지는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한병철은 투명성이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하여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투명성은 낯선 것과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서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투명사회에서는 점차 타자가 소멸되고 나르시시즘의 경향이 강화된다.

또한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 투명성은 시스템의 외부를 보지 못하고,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최적화할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정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관리하는 역할로 축소되고 만다. 선거와 쇼핑은 비슷해지고, 통치도 마케팅에 가까워진다.

한병철은 투명성의 사유를 일상과 정치의 영역을 넘어 시각적, 인식적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모든 것을 손쉽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시각적, 인식적 부정성의 영역, 즉 가려진 것들, 비밀의 영역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직접적으로 공개되는 포르노적 사회, 모든 의미가 사라지고 보이는 것에만 가치가 부여되는 전시사회가 성립한다.

한병철은 모든 것이 겉이 되어가는 사회, 진리는 없고 정보만이 있는 사회, 낯선 타자와 직접 맞닥뜨릴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오직 자신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만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나르시시즘적 사회의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한병철 교수의 저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일 철학계를 넘어서 광범위한 독자층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러나 독일의 주요 미디어들이 한병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피로사회>(2010) 때부터였다. 독일 ZDF 방송에서는 한병철을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로 소개했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그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문화 비판의 개척자로 묘사했다. 그 후 출간된 <투명사회>는 독일 사회에 다시 한 번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이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한다면, <투명사회><피로사회>보다도 훨씬 떠들썩했다고 말할 수 있다. 투명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온 독일 사회였기에, ‘불투명성에 대한 한병철의 옹호는 그토록 큰 충격을 안겼던 것이다.

한병철이 그려내는 투명사회의 모습은 오늘의 한국 사회와도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아떨어진다. 물론 고위 공직자 임명 때마다 불거지는 자격 논란이나 경제 영역에서 벌어지는 비리 사건을 보면서, 한국 사회는 투명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에는 여전히 불투명한 사회가 아니냐 하는 의심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성이 정치, 경제의 영역을 넘어선, 전 영역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적 강제력임을 생각한다면, 한국 사회만큼 빠른 속도로, 별다른 사회적 숙고 과정 없이 전면적인 투명화의 흐름에 내맡겨진 경우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개인 정보 유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왜 연말정산 기간이 되면 소비 기록을 국가에 제출해야 하는지, ‘다본다라는 위협적인 구호가 어떻게 인기 상품의 이름이 될 수 있는지, 왜 그토록 성형에 집착하는지, 디지털 문명과 SNS 등이 왜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를 낳지 못하는지, 왜 무한한 소통의 자유가 연대로 이어지지 못하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것이다.

한병철이 그려내는 투명사회의 모습은 오늘의 한국 사회와도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아떨어진다. 물론 고위 공직자 임명 때마다 불거지는 자격 논란이나 경제 영역에서 벌어지는 비리 사건을 보면서, 한국 사회는 투명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에는 여전히 불투명한 사회가 아니냐 하는 의심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성이 정치, 경제의 영역을 넘어선, 전 영역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적 강제력임을 생각한다면, 한국 사회만큼 빠른 속도로, 별다른 사회적 숙고 과정 없이 전면적인 투명화의 흐름에 내맡겨진 경우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개인 정보 유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왜 연말정산 기간이 되면 소비 기록을 국가에 제출해야 하는지, ‘다본다라는 위협적인 구호가 어떻게 인기 상품의 이름이 될 수 있는지, 왜 그토록 성형에 집착하는지, 디지털 문명과 SNS 등이 왜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를 낳지 못하는지, 왜 무한한 소통의 자유가 연대로 이어지지 못하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삶을 조금은 달리 생각해보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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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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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중세인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

2장 더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갈망

3장 영웅적인 꿈

4장 사랑의 형식들

5장 죽음의 이미지

6장 성스러운 것의 구체화

7장 경건한 퍼스낼리티

8장 종교적 흥분과 판타지

9장 상징주의의 쇠퇴

10장 상상력에 대한 불신

11장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사고방식

12장 생활 속의 예술: 반에이크의 예술을 중심으로

13장 이미지와 말: 그림과 글의 비교

14장 새로운 형식의 등장: 중세와 르네상스의 비교

 

 

 

언제부터 중세시대에 관심이 생겼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판타지 소설이나 롤플레잉 게임(RPG) 때문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 시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온갖 상상을 하도록 해주고 그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식으로든 중세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게 단순히 재미 차원을 넘어 조금은 학문-인문학적으로 알고 싶게 된 계기는 아날 학파를 접한 다음 부터였다. 요한 하위징아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아날 학파를 언급하는 게 뭔가 앞뒤가 맞진 않겠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중세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만난 것이 중세의 가을이었다.

 

제목부터 문학적이고 낭만적이라 왠지 끌리게 되지만 예전에 읽었을 때도 그렇고 다시 읽어봐도 영 읽기 쉽지 않기만 하다. 그나마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책보다는 조금은 쉽게 읽혀졌는데, 그게 번역이 잘 되어서인지 이것저것 중세를 조금은 알게 된 다음 다시 읽어서 그런 것인지 뭐가 맞지는 자신은 없다.

 

중세 유럽의 문화와 사상을 집대성한 요한 하위징아의 대표작.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본격화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6세기경부터 중세의 유럽은 서서히 기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11세기경 이민족들의 지속적인 이동과 침입이 끝나고 이슬람 세력의 팽창이 주춤해져 유럽은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이후 13세기까지 부흥기를 맞이한다.

하위징아는 이 책에서 전성기를 지나 노쇠해지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단계인 14, 15세기를 '가을'이라고 규정했다. 전성기를 지나 쇠락해가는 시대라는 의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라는 의미로 '가을'인 것이다. 중세는 '대조'의 시대다. 빈자와 부자, 도시와 시골, 빛과 어둠과 같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들이 공존했고, 중세는 그 두 극단을 오가면서 역사를 만들어갔다.

역사에 있어서 암흑기라고 잘못 알려진 중세는 그 나름의 소박한 삶의 양식과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환상 등을 통하여 이미 그 속에 화려한 인본주의의 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이 가을에 열매를 맺듯, 자연스레 르네상스와 근대라는 수확을 거둘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하위징아는 거시적 접근 이외에도 기사도 정신과 성대한 입성식, 기마 시합, 종교적 신비주의와 금욕적 경건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암흑시대라는 말로도 통용되는 중세가 과연 그렇게() 봐야 할 것인지 물음을 던지고 있는 이 책은 르네상스와 비교한다면 어둡고 음산하기만 한 시대겠지만 바로 그런 시대 속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하고 있었음을, 단절을 주목하기 보다는 어떤 이어짐과 그 시대만의 특징들을 다양하게 살펴보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시선이고 흥미로운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봐서는 어느 정도 당연한 시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이 발표된 당시로서는 파격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주로 새로운 것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후대에 와서 찬란하게 빛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활 형식이 어떤 경로로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알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보아 후대의 시대를 밝혀 주는 데 도움이 되는 관점에서만 과거를 살펴본다. 그리하여 근대 문화의 새싹들에 대한 근원을 찾아내려는 목적 아래 중세 시대가 철저하게 연구되었다. 얼마나 철저하게 연구되었는지 중세의 지성사는 곧 르네상스의 이정표이며 그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는다라는 견해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때 경직되고 죽어 버린 시대로 여겨졌던 중세의 도처에서, 우리는 미래의 완성품들을 가리키는 새싹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새롭게 발전하는 생활양식을 탐구하다 보면, 역사나 자연이나 죽음과 탄생의 영원한 순환 과정이라는 사실을 손쉽게 잊어버린다. 낡은 사상의 형식들은 죽어 버리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토양 위에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와 꽃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제목처럼 중세의 끝자락을 두루 살펴보고 있고 읽기가 쉽진 않지만 읽어내고 싶은 욕심이 들게 되는 매력으로 가득한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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