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라비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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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M 아람에게 선물로 받은 책. 표제작을 읽고, 나머지 단편들을 완독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전에 읽은 [핸드메이드 픽션]의 첫 작품 {너의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과는 달리, {끄라비}는 딱히 흥미롭지도 잘 읽히지도 않았다. {아르판}까지 그랬다. 이 두 작품에서 보이는 자아 혹은 이야기에 관한 탐험과 성찰은 내겐 '얕거나 혹은 진부하거나'로 다가왔다.


이어지는 세 작품은, 이제 조금은 익숙한 박형서표 지식소설(?)이다. 장은수의 표현을 빌리면 '의사-논리'의 영역, 어떻게 보면 의사-SF라고 불러도 되겠다. 특히 {티마이오스}는 천체물리학에 기댄 장대한 SF로 읽힌다. 한편 {QED}는 아마 한국 문학을 통틀어 수학 개념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편이 아닐까 싶고(보르헤스의 방대한 가짜 주석과 얼마간 비슷한 효과가 있다). {무한의 흰 벽}은, 뭐랄까, 공간을 놓고 싸우는 승부사를 그린 이상한 판타지(경계소설)다.


이들은 스케일과 디테일 면에서 [핸드메이드 픽션] 수록작들보다 뭔가 업그레이드된 인상을 준다. 아쉬움이 있다면, '의사'라는 접두사에 있다. 이 접두사는 동세대 작가들과 다른 글을 쓰는 이 아저씨의 정체성이지만, 동시에 한계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가령 나는 의사-SF가 아니라 진짜 SF인 {티마이오스}를 상상해보고, 사유 또는 뻥을 더 극한까지 몰고 간 {QED}를 상상해보고는, 조금은 실망하고 마는 것이다.


{맥락의 유령}은 제한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속도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다 결말에서 맥이 빠진다. 마지막 {어떤 고요}는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자전(+위트+뻥)이다.


이 아저씨는 분명히 남들과는 다르게 지(知)와 농(弄)을 결합한다. 작품의 폭이 넓고, 문장은 대개 읽는 맛이 있다. 어느 정도 지적 즐거움도 준다(무려 표제작에 흥미가 없는 걸로 보아 나와 작가가 코드가 맞는 지점은 특히 이쪽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충분하지만, 사람(나)은 뭐든 금방 익숙해지고 점점 많은 걸 바라게 된다. 그가 {티마이오스}와 {QED}에서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갈지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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