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좁더라도 자기 방을 가져라. 자기 방에서 쉬지 않으면 쉰 것 같지도 않다."

300년 전 버지니어 울프 여사의 말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자극해 이른 나이에 독립하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요즘 들어 울프 여사의 경구가 자꾸 떠오르는 까닭은, 방을 빼라는 엄마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난데없이 찾아온 우울증으로 삶의 회의를 느끼고 있는 나, 혹시나 싶어 엄마에게 물었다.

"오늘 혹시 남동생이 온다던가 그런 일 없죠? 어제 세시 넘어 집에 와서 피곤하거든요."

"없다. 푹 자라."

 

말이 씨된다고, 그로부터 20분도 채 못되어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리야, 남동생 온단다."

어제 못본 <행복한 여자> 재방송 시간인 오후 3시까지 푹 잘 생각이었던 난 갑작스럽게 가방을 챙겨서 마포 도서관에 왔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 오늘, 조카와 놀고픈 생각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럴 바엔 물 좋은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도서관에 간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회원등록을 하고 좌석 신청을 하니까 대기인수가 560명이라는 자막이 뜬다. 아니 그걸 어떻게 기다린담?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었다. 그때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 여사의 경구를. 내 방이 있었다면 누가 온다고 잽싸게 도망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한 40분 가량 책을 읽었나보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오늘 약속이 생겨 나가봐야 하거든. 그래서 남동생 못오게 했으니까 집에 와서 푹 자라."

해서 난 가방을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560명이 남은 번호표는 과감하게 버리고. 지금은 피씨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곧 집에 가서 누울 생각을 하니 피로가 싹 가신다.

 

그나저나 방을 빼는 문제는 난항에 부딪혔다. 어머니가 반경 1킬로 이내에 집을 얻지 않으면 못나간다고 고집을 피우시기 때문. 아니 집을 얻으려면 출퇴근이 편하게 천안으로 갈 일이지, 이 근처에 얻을 거라면 뭐하러 집을 나간담? 어머니는 "니가 가까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데, 그 논리를 난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뿌리치고 확 나가버리자니 어머니가 안되어 보이고, 그렇자고 있자니 시시때때로 오늘같은 일이 생길테고. 울프 여사여,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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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04-2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푸덕. orz

이럴땐 정말 어떡해야 할까요? 아, 제게도 어떠한 방법이 생각나질 않네요. 흐음. 어쩌지요?

Mephistopheles 2007-04-2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안에 집하나 사시는 걸 권장합니다...^^ 아님 땅이라도..^^

2007-04-2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7-04-22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딜레마네요. 부리님 결혼하시라고 방빼라 고집하시는 건데 그렇다고 정말 떨어지고 싶지는 않으시고 ^^;

마노아 2007-04-2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구들을 데리고 천안으로 가는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겠죠? 죄송해요..;;;;

부리 2007-04-2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하핫....저도 생활의 중심 50%가 서울이라서요...'
달밤님/오랜만이네요 무슨 일 있냐고 묻고픈데 무서워서 못물어보겠어요
속삭님/앗.... 300년이라고 쓴 건 일부러 그런 건데... 인용구도 당근 농담이어요. 부리는 원래 헛소리 잘하는 존재라서요... 절 배려하시느라 속삭여주셔서 감사
메피님/로또만 되면 무조건 별장 짓습니다
다락방님/님이 제게 잘해주심 되죠^^
속삭님/그, 그럴까요???? 고심 중...
 

 

 

 

 

요즘 내가 집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는 할머니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편찮으시거나 그런 상상을 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너무 기력이 팔팔하신 게 문제다.

가만 있는 걸 태생적으로 싫어하시는지라

계속 뭔가를 하려고 하시니 우리 입장에선 피곤하다.

예컨대 난 집에만 가면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를 돌보는 아주머니 이 세분으로부터

뭔가를 먹어라는 말에 시달려야 하는데

다른 두분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안먹어요! 저녁 먹었어요!”란 대답을

최소 다섯 번쯤 해야 한다.

그거야 늘상 있는 일이고, 요즘 생긴 일을 지금부터 말하고자 한다.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지가 벌써 일년이 다 되었다.

할머니가 계시건 말건 관리비는 꼬박꼬박 나가고,

가스와 전기 회사에선 체불을 했다면서 공급중단을 협박한다.

다시 할머니가 거기 가서 사실 일이 없는데 이러고 있는 건 낭비여서

어머니가 결단을 내렸다.

그 집을 전세 내주기로 한 것.

문제는 할머니가 겪어야 할 상실감,

뻑하면 “집에 가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할머니에게 갈 곳이 없다는 건

서러운 일이리라.

지금까지 미뤄온 것도 그래서였는데

결단을 내린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짐을 치우러 가셨다.

일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평소 종이때기 하나라도 버리기 싫어하는 성격이신지라

평생 모은 짐이 하나 가득이었고

그 모든 것에 다 할머니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70년이 다 된 재봉틀을 버리자는데도

“절대 안된다”고 악을 쓰신다.

“내가 시집 올 때 사온 것이여!”라며 이유를 설명하신다.


결국 어머니는 다른 날, 할머니 몰래 일꾼들과 더불어 짐을 챙기셨고

쓸만한 것만 우리집에 가져오셨다.

“날 빼놓고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며 화를 내시던 할머니는

어머니가 챙겨온 짐들을 모조리 당신 방에 집어넣으셨다.

짐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무게가 나가건만

기력이 팔팔한 할머니에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찬 할머니의 방은 요새로 거듭났고

거기서 뭔가를 찾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짐을 치우러 두차례나 더 가야했고

그때마다 할머니의 반발에 직면하셨다.

가출을 시도하셔서 내가 붙잡아 온 적도 있고

가슴을 치면서 어머니 앞에서 통곡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뭐, 사정은 이해한다만

나만 오면 붙잡고 통곡하는 게 슬슬 짜증이 난다.

할머니를 모시는 78세 노인 분도 인내의 한계에 달했는지

할머니를 대하는 얼굴에 짜증이 묻어난다.


전세 계약은 성공적으로 됐지만

할머니의 분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전세금을 내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이시는데

돈을 쓰실 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입양한 아들에게 주시려는 걸 뻔히 아는지라 엄마는 그럴 수가 없다.

삶이란 원래 비루한 거지만

할머니의 삶을 보면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셨고,

아이를 더 낳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입양한 아들 때문에

말년까지 고생하시는 할머니,

이제는 우리집 말고 오갈 데가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돌봐줄 사람 없이 혼자 지내는 노인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리 집에 “얹혀사시는” 할머니가 난 더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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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2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안쓰러워요...

다락방 2007-04-2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저희 외할머니 생신이시라 온 가족이 다 모여서 저녁을 먹었지요. 그런참에 부리님의 이 글을 읽으니 어쩐지 마음이 싸해지네요.

진주 2007-04-2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부리 2007-04-2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마음이 아파요...
다락방님/제가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요즘 저도 우울증이 갑자기 찾아와서요...
배혜경님/그러게 말입니다....

레와 2007-04-22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

모쪼록 우울이 녀석이 빨리 부리님 곁을 떠나버리게,
제가 유혹해 버릴까요??

....
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
 

 

 

 

 

요즘 어머니와 사이가 안좋아졌다.

귀가 얇은 어머님이 “아들 장가보내려면 내쫓아야 한다”는 친구들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 나한테 집을 구해 나가라고 했던 것.

술만 먹느라 모아놓은 돈도 없는 나로선 날벼락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뭐, 나가라면 나가면 된다.

컴퓨터와 인터넷선, 그리고 케이블 TV만 있다면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 수 있는 나 아닌가.


내가 화가 나는 건 엄마가 친구들의 말을 듣고 그러시는 거다.

결혼에 뜻이 없는 내가 집을 떠난다고 해서 결혼할 마음이 생길까.

어머니가 간병 때문에 집을 비운 기간 동안

이 집에서 난 혼자 살았었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렸고, 저녁 때 재료를 준비하러 장을 보러 다녔다.

가끔은 병맥주를 사서 김을 안주로 먹기도 하던 그 시절이

그리 힘든 건 아니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파출부 아주머니를 가끔씩 오게 했고,

난 다시금 손에 물 안묻히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좀 게을러지긴 했지만, 집을 나가면 다시 그렇게 살면 된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너 장가가는 걸 봐야 내가 편히 눈을 감지.”

정말일까. 내가 장가만 가면 어머니는 만사 행복해지실까.

결혼을 하자마자 어머니는 애를 낳으라며 며느리를 들볶으실 테고,

애가 생기는 건 모든 고민의 시작이다.

고민이란 가족 수의 세제곱에 비례해서 생기는 거니까.

드라마긴 하지만 <행복한 여자>에서

주인공은 강부자의 강권으로 낳은 애 때문에 수많은 고초를 겪여야 한다.

실제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누나가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의 소원은 누나가 시집가는 거였지만

누나가 결혼한뒤 엄마가 신경써야 할 일은 훨씬 커졌다.

돈이 없다고 징징거리는 누나를 위해 엄마는 돈을 보내야 했고

애들은 툭하면 아팠고

수시로 애를 봐줘야 했다.

결혼했다고 “그건 이제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엄마는 누나가 뭔가를 호소할 때마다 이리저리 뛰셨다.

남동생도, 여동생도 다르지 않았다.

여동생의 둘째가 경기를 했을 때,

엄마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내가 장가만 가면 엄마는 과연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내가 아내와 사이가 안좋아 맨날 다투거나

내가 외도를 해서 팔등신 미녀가 부른 배를 안고 우리집에서 행패를 부린다면

엄마 마음이 편하실까?

아무리 모범적으로 산다고 해도 고민이 없을 수는 없다.

내 애가 몸이라도 아프면-감기 정도가 아니라 좀 심하게-

그 애가 걱정되어 어떻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인가.


난 다른 사람의 삶을-그게 설사 자식일지라도-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겐 내가 터득한 삶의 철학이 있고

엄마는 엄마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이다.

엄마의 철학을 내게 강요한다면, 사이만 나빠질 뿐이다.

엄마 시대에는 결혼해서 사는 게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꼭 그런 것도 아니잖는가.

난 지금까지 내키지 않아도 엄마 뜻대로 해왔다.

이젠 그러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편히 눈을 감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가 편히 눈을 감는 거니까.

방은 뺀다.

하지만 그게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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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4-1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244998

전 그래서 서울 올라왔잖아요..ㅋ


chika 2007-04-1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을 일은 아니지만 일단은 웃음이 나와서...^^;;;
- 제가 아는 수녀님은 동생이 직장도 안다니고 집에서 빈둥거려서 부모님이 내쫓은다,했더니 어느 순간 연애해서 시집을 가더라던데요? ^^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안될까요? 결혼해서 좋은 아내를 얻고 어쩌면 이쁜 아기가 생길수도 있고, 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딸보다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어머니가 편히 눈 감으실수도 있고, 마태님 역시 편해질 수 있는거 아니겄습니까? ^^

- 근데 우리 부모님은 포기가 빠르셔서... 몇년 전부터 조카녀석들에게 (이제 초등학교 졸업도 안한 녀석들인데 말이지요 ㅡ,.ㅡ) '니들이 나중에 작은고모 잘 모셔야된다. 알지?'하며 주입교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자식의 말년을 걱정하시는 부모님 마음을 자식은 따라가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니까... 제말은 어머니를 이해하도록 노력하시라는...헤헷 ^^;;;

저도 한때 방빼라는 말을 들었었지만 끝까지 집에 들러붙어있습니다. 물론 돈도 없을뿐더러... 방을 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방값으로 어머니랑 할머니 맛난 음식, 멋진 옷 사드리는 건 어떻슴까?
쓰읍~ 음식 얘기하니까 또 뭔가 땡기네.....아, 살은 언제 빼려나~
(헉, 결론이 왜 이렇지? =3=3=3=3)

클리오 2007-04-1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안에다가 집 얻으신다더니 그걸 실행에 옮기시게 되는건가요? ㅎㅎ 그나저나 부리 님이 없으면 외려 어머니가 서운하실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어머님들이란, 사이좋게 살아도 며느리를 질투하시는거 아닌가요.. 호호호...

Mephistopheles 2007-04-1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해 너무 걱정이 많으신 건 아니신가...
싶습니다...^^

세실 2007-04-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마태님 아니 부리님. 결혼하면 크고 작은 힘든 일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부모님 입장에선 지금보다는 작은 걱정거리 겠죠? 최소한 고부간의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저를 보세요 저를~~~ ㅋㅋ)

세실 2007-04-15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결혼에 관심없는 나야나도 요즘 가출을 심각하게 고려중이라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간듯^*^ 전 뭐 당연히 '그래 잘 생각했다. 독립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고 싶을때 언제든지 갈 수 스위트 홈이 생기는 거야. 아 좋아라~' 이럽니다. ㅋㅋ

하늘바람 2007-04-16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어머님을 이해해 주셔요

2007-04-16 0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7-04-1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진짜 방 뺀다고 하면 그냥 보고 계실까요? 저희 엄마는 진짜 방뺀다고 했더니 울고불고 내가 뭘 그렇게 서운하게 했냐고 난리였거든요. 결국 방은 뺐습니다만.

진주 2007-04-1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부리야~
어쩜 너는, 그리 똑같니?
처한 형편이나 생각하는 것, 그리고 부모님 속을 헤아릴 줄 모르는 거는 내 동갑내기 마모 교수님이랑 어쩜 그리 똑같니...쯔쯔..

레와 2007-04-1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서 독립했어요~!!

레와독립 만세만세 만만세!!!

비연 2007-04-1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방빼라고 해주셨으면 좋겠어요...ㅜㅜ
제가 나간다고 해도 못 나가게 하십니다..

2007-04-16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4-2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근데 문제는요 어머니가 집을 천안에 얻는 걸 결사반대하고 있다는 거죠 홍대 근처에 얻지 않으면 못나간다고 하시네요... 이해가 안감... 글구 여러가지로 감사
속삭님/아, 저 서운한 게 아니라요 동기가 영 잘못되었다는 거죠...
비연님/아 그렇군요... 나가고 싶으심 나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레와님/언제 독립에 대해 이야기 나눠요^^
진주님/ 이런 걸 보고 난형난제라고 한다는... 그래도 진주님, 제가 조금 더 낫지 않나요
브리니님/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방을 빼되 홍대앞 근처, 엄마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방을 잡으라니 도무지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속삭님/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님은 역시나 절 잘 이해해주시는군요
하늘바람님/그래야지 어쩌겠어요. 근데 이해가 잘...
세실님/가족이란...굴레이기도 하다는 걸 요즘 절실히 느낍니다...나야나님께 안부 전해주삼.
메피님/아, 전 늘 미래를 생각해요. 그게 그래도 참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예컨대 전 제가 잘리면 어떻게 살 것인지도 많이 생각하고 있답니다
클리오님/제말이 그말이어요 제가 없으면 엄마가 얼마나 심심하실까 싶거든요.... 전 그래서 제 존재가 엄마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구요 엄니도 그렇게 느끼시거든요
치카님/그렇다면...살을 빼고 방을 뺄까요...^^ 정말 천문학적인 결론에 망연자실...^^
해적님/으음 그렇군요 님같은 결단력이 제게 없는지라...
 

 

 

 

 

자연대와 의대를 대상으로 개설된 과목이 있다. 의대 선생 20명이 한시간씩 강의를 하는데, 그 과목의 책임자가 나라서 좀 비협조적이거나 강의를 성의없게 하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곤 한다. 물론 대부분이 비협조적이고 강의를 안하려고 해 내가 사정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말이다.


오늘 강의 제목은 ‘동성애 어떻게 볼 것인가?’였는데, 내가 존경하는 정신과 교수님이 몇 년째 강좌를 맡아 오셨다. 난 오늘 처음으로 그 강의에 들어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60대인 교수님께서 동성애 얘기를 하시는 건 무리였던 것 같다. 선생님은 시종일관 동성애자를 ‘유아성폭행자’와 같은 성도착증 환자로 분류하셨고, 원인을 설명하면서 “뇌에 병변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신 걸로 보아,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그 바람에 학생들은 시종 동성애에 대한 보수적인 견해를 주입받아야 했다. 외국에선 동성애자의 비율이 4%라고 하신 선생님은 “통계는 없지만 동료 의사들끼리 얘기를 해보면 우리나라는 서양보다 동성애자 비율이 적은 것 같다”면서 여러 가지 원인을 든다. 동성애자가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지 않고, 아직도 많은 동성애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자 비율이 서양보다 적다는 것도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원인으로 든 것은 더더욱 동의하기 힘들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자식을 낳아야 하는 억압이 강하고.....유교적 영향...대가족제도... 또한 한국인의 식생활이 리비도(성욕)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 성폭행 비율이 세계 정상권인 것과 리비도를 저하시키는 식사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지만, 성욕이 강하면 동성애가 된다는 논리 역시 흥미로웠다. 선생님 강의의 백미는 말미에 나왔다.

“어머니가 드센 경우 남성이 여자처럼 돼서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가 꽤 있다.”

동성애를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 장애로 보시는 거야 그렇다 쳐도, 동성애에 대한 선생님의 초점이 게이에게 맞춰져 있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연약하면 여자가 남자처럼 돼서 레즈비언이 되나요?”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역으로 나가는 것 같아요. 기성세대가 동성애에 비판적이니까 젊은 세대들이 우호적이라고.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동성애에 대해 과거보다 지금이 더 관대하다면, 이건 소수자에 대한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의 성숙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문제가 왜 세대갈등과 상관이 있을까. 여전히 난 그 선생님을 존경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내년에는 그 선생님한테 동성애 강좌를 맡기면 안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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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7-04-1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백분 토론감인데요, 완전히.^^ 진보진영 강사를 하나 초빙해서 더블 캐스팅을 한다면...? ^^;;

해적오리 2007-04-1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44900

페퍼 읽으면서 생각나는 분이 한분 계신데... 그분도 학생들은 감당하기 힘들까요?

글코 정신과 선생님이라면 자신의 시각을 새롭게 바라보는 부단한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안하면 직무유기란 생각이 드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쩝..

하긴 제가 몇 번 갔던 정신과 선생님 보면서 제 속이 터져갔던 걸 생각하면... 무리다, 무리...


비연 2007-04-13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정말..맡기면 안되겠네요...-.-;;

Mephistopheles 2007-04-1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다음 강좌에는 홍석천..씨가...???

부리 2007-04-15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오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인데요^^
비연님/제말이요...
해적님/제말이요.... 자신의 시각을 교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전혀 그게 아니라서...
진우맘님/음...동성애가 진보 보수의 문제가 되는 현실은 참 안타깝지만.... 그래야 할 것 같네요.
 

 

 

 

 

권투선수 중 최충일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아마추어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는 등 기본기 하나는 확실하게 갖춰진 그는 그 실력 그대로 프로무대마저 평정할 기세였다. 스트레이트를 위주로 한, 상대를 껴안는 법 없이 때리기만 하는 그의 스타일은 팬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프로에 데뷔한 지 별로 오래지 않아 그에게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졌다. 상대는 필리핀의 롤란도 나바레테였다.


경기는 최충일의 압도적 우세였다. 그는 시종 스트레이트를 쭉쭉 뻗어가며 나바레테의 얼굴을 때렸다. 견디지 못한 나바레테는 결국 링에 쓰러졌다. 근데 이게 웬일? 나바레테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참에 갑자기 공이 울려버린 것. 그 라운드 종료시까지 13초나 남았는데 말이다. 그 시점에선 두세대만 더 때리면 경기가 끝날 수도 있었던 터라 아쉬움은 컸다. 물론 그건 필리핀 심판의 애국심이 작용한 결과였고, 그의 기대대로 나바레테는 원기를 회복해 역전 KO 승을 거둔다. 그 경기를 통해 최충일의 약한 맷집이 문제로 지적되었는데, 그는 두 번째 챔피언 도전에서도 라파엘 바주카 리몬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 단 한방을 복부에 맞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권투 인생은 그게 마지막이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 13초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최충일 측은 세계복싱연맹에 항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패자의 변명”이란 대답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다. 김철호라는, 알지도 못하는 선수가 베네주엘라로 날아가 세계 챔피언 라파엘 오르노에게 도전한단다. 질 게 뻔했기에 우리나라 방송에선 위성중계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오르노가 경기를 앞두고 맹장 수술을 한 것. 김철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연습부족으로 후반 들어 스피드가 떨어진 오르노의 배에 필살의 펀치 두방을 날렸다. 믿기지 않는 승리였다.


그 뒤 김철호는 비교적 약한 선수들과 방어전을 치루며 챔피언 벨트를 지켰다. 돈도 제법 벌었는지 나중에 그는 자기 이름을 내건 권투 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설욕의 기회를 노리는 오르노의 도전을 언제까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5차 방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우리나라 챔피언 중 최다 방어 기록을 수립했던 그는 서울에서 오르노와 리턴 매치를 가졌다. 김사왕이 에우제비오 페드로사에게 진 경기 이래, 난 우리나라 선수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는 건 처음 보았다. 오르노의 맹장이 다시금 재발하지 않는다면 김철호가 이길 확률은 없어 보였다. 4회쯤 되었을까. 로프에 몰린 김철호가 열나게 맞고 있을 때, 갑자기 공이 울렸다. 나는 물론이고 경기를 보던 우리 아버지도 놀라셨다. TV의 시계에 의하면 아직도 1분 40초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김철호가 맞는 걸 더 못보겠던 심판이 공을 울린 거였고,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아무 말도 안한 건 그 심판과 같은 심정이기 때문이었으리라. 필리핀의 경우와는 다르게 김철호는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그 다음 회에 완전히 쓰러짐으로써 타이틀을 빼앗기고 만다. 13초를 가지고 뭐라고 했던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중계도 되는 경기에서 1분 40초를 남기고 공을 치다니 스케일도 크다. 미리 종을 친 심판은 그 다음날로 사표를 제출했는데, 그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애국심이나 국가주의가 촌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자는 유시민의 주장은 진보 측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졌던 무시무시한 통제를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축구만 하면 붉은 옷을 입고 생난리를 치고, 소신에 의해 해설을 한 유명 해설자가 중간에 잘리기까지 하는 등 애국주의의 광풍이 이따금씩 휘몰아치는 걸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월드컵을 앞두고 평가전 때 역주행을 한 설기현을 풍자의 소재로 삼았다고 해당 개그맨을 마녀사냥하는 그런 광적인 애국심보다는 우리 선수가 맞는 게 안타까워 일찍 종을 쳐버리는 그 심판의 애국심이 훨씬 소박하고 정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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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4-10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권투가 언급된 페퍼가 등장했군요. 저 어려운 선수들 이름을 전부 알고 계신 것에 감탄하며 추천 한방 때리고 자러갑니다. ^^ 부리님도 일찍 주무셔요. 나이 생각하셔야죠...ㅋ

부리 2007-04-1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해적님! 제가 권투 매니아거든요!!! 글구 사실 저 요즘 괜히 피곤해요...몸이 한번 아프고 나니까 이런 현상이...ㅠㅠ

Mephistopheles 2007-04-1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투라면...아시따노 조(내일의 조) 라는 만화와 더 파이팅은 꼭 보시길 바래요..^^

비로그인 2007-04-11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투의 승부는 이미 링 밖에서 결정이 난다라고 말들 하잖아요.
링 밖에서 선수가 흘린 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링 위에선 단지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 뿐이라고요.

그래서 전 권투를 꽤나 공정한 스포츠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는데... 이건...ㅎㅎ
제가 모르는 다른 면도 있었군요?!

oldhand 2007-04-1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충일의 원투 스트레이트는 정말 예술이었지요. 조금만 더 터프하고, 지저분했으면 중(中)량급에서 한 획을 그을만한 자질이었는데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근데 나이가 들어서 최근에 리몬과의 경기를 다시 보니 그렇게 일방적이지만은 않더라구요. 약간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내내 감돌았습니다. 물론 KO 당하기 전까지 점수상으론 매라운드 계속 10-9로 이기고 있긴 했지만요. 나바라테도 그렇고 리몬도 그렇고 아주 일류 챔피언은 아니었으니, 최충일의 한계는 거기까지였을지도요. 비슷한 시기에 같이 승승장구하다가 황준석이라는 국내의 암초에 걸려 좌초해버린 황충재 생각도 납니다..
아 그리고 최충일만큼 깔끔한 원투 스트레이트를 구사하던 허영모 선수도 있었지요. 프로에 데뷔하진 않았지만.

진/우맘 2007-04-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 부리.^^

부리 2007-04-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안녕하세요 근데 왜 반말이지????????^^
올드핸드님/권투에 대해서 님과 해야 할 말이 아주 많군요! 황충재도 제법 했었는데 당시 챔피언이 슈거레이였죠 아마^^ 그리고 허영모를 얘기하려면 문성길 얘기를 꼭 해야겠지요... 아까운 선수였는데 둘 다요.
고양이님/스포츠는 대개가 정치랍니다. 뭐, 쓰러뜨리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아마 경기에서 판정시비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요...
속삭님/아앗 제게 그런 멋진 칭찬을... 전 님을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메피님/아앗 전 권투만화는 그다지 안좋아하는데...허영만이 그린 링의 미치광이들인가, 그건 재밌게 봤지만...기본적으로 권투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