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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선수 중 최충일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아마추어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는 등 기본기 하나는 확실하게 갖춰진 그는 그 실력 그대로 프로무대마저 평정할 기세였다. 스트레이트를 위주로 한, 상대를 껴안는 법 없이 때리기만 하는 그의 스타일은 팬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프로에 데뷔한 지 별로 오래지 않아 그에게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졌다. 상대는 필리핀의 롤란도 나바레테였다.
경기는 최충일의 압도적 우세였다. 그는 시종 스트레이트를 쭉쭉 뻗어가며 나바레테의 얼굴을 때렸다. 견디지 못한 나바레테는 결국 링에 쓰러졌다. 근데 이게 웬일? 나바레테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참에 갑자기 공이 울려버린 것. 그 라운드 종료시까지 13초나 남았는데 말이다. 그 시점에선 두세대만 더 때리면 경기가 끝날 수도 있었던 터라 아쉬움은 컸다. 물론 그건 필리핀 심판의 애국심이 작용한 결과였고, 그의 기대대로 나바레테는 원기를 회복해 역전 KO 승을 거둔다. 그 경기를 통해 최충일의 약한 맷집이 문제로 지적되었는데, 그는 두 번째 챔피언 도전에서도 라파엘 바주카 리몬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 단 한방을 복부에 맞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권투 인생은 그게 마지막이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 13초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최충일 측은 세계복싱연맹에 항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패자의 변명”이란 대답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다. 김철호라는, 알지도 못하는 선수가 베네주엘라로 날아가 세계 챔피언 라파엘 오르노에게 도전한단다. 질 게 뻔했기에 우리나라 방송에선 위성중계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오르노가 경기를 앞두고 맹장 수술을 한 것. 김철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연습부족으로 후반 들어 스피드가 떨어진 오르노의 배에 필살의 펀치 두방을 날렸다. 믿기지 않는 승리였다.
그 뒤 김철호는 비교적 약한 선수들과 방어전을 치루며 챔피언 벨트를 지켰다. 돈도 제법 벌었는지 나중에 그는 자기 이름을 내건 권투 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설욕의 기회를 노리는 오르노의 도전을 언제까지 피할 수 없었다. 이미 5차 방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우리나라 챔피언 중 최다 방어 기록을 수립했던 그는 서울에서 오르노와 리턴 매치를 가졌다. 김사왕이 에우제비오 페드로사에게 진 경기 이래, 난 우리나라 선수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는 건 처음 보았다. 오르노의 맹장이 다시금 재발하지 않는다면 김철호가 이길 확률은 없어 보였다. 4회쯤 되었을까. 로프에 몰린 김철호가 열나게 맞고 있을 때, 갑자기 공이 울렸다. 나는 물론이고 경기를 보던 우리 아버지도 놀라셨다. TV의 시계에 의하면 아직도 1분 40초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김철호가 맞는 걸 더 못보겠던 심판이 공을 울린 거였고,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아무 말도 안한 건 그 심판과 같은 심정이기 때문이었으리라. 필리핀의 경우와는 다르게 김철호는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그 다음 회에 완전히 쓰러짐으로써 타이틀을 빼앗기고 만다. 13초를 가지고 뭐라고 했던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중계도 되는 경기에서 1분 40초를 남기고 공을 치다니 스케일도 크다. 미리 종을 친 심판은 그 다음날로 사표를 제출했는데, 그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애국심이나 국가주의가 촌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자는 유시민의 주장은 진보 측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가해졌던 무시무시한 통제를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축구만 하면 붉은 옷을 입고 생난리를 치고, 소신에 의해 해설을 한 유명 해설자가 중간에 잘리기까지 하는 등 애국주의의 광풍이 이따금씩 휘몰아치는 걸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월드컵을 앞두고 평가전 때 역주행을 한 설기현을 풍자의 소재로 삼았다고 해당 개그맨을 마녀사냥하는 그런 광적인 애국심보다는 우리 선수가 맞는 게 안타까워 일찍 종을 쳐버리는 그 심판의 애국심이 훨씬 소박하고 정겨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