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집에 들어가기 싫은 이유는 할머니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편찮으시거나 그런 상상을 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너무 기력이 팔팔하신 게 문제다.

가만 있는 걸 태생적으로 싫어하시는지라

계속 뭔가를 하려고 하시니 우리 입장에선 피곤하다.

예컨대 난 집에만 가면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를 돌보는 아주머니 이 세분으로부터

뭔가를 먹어라는 말에 시달려야 하는데

다른 두분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안먹어요! 저녁 먹었어요!”란 대답을

최소 다섯 번쯤 해야 한다.

그거야 늘상 있는 일이고, 요즘 생긴 일을 지금부터 말하고자 한다.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지가 벌써 일년이 다 되었다.

할머니가 계시건 말건 관리비는 꼬박꼬박 나가고,

가스와 전기 회사에선 체불을 했다면서 공급중단을 협박한다.

다시 할머니가 거기 가서 사실 일이 없는데 이러고 있는 건 낭비여서

어머니가 결단을 내렸다.

그 집을 전세 내주기로 한 것.

문제는 할머니가 겪어야 할 상실감,

뻑하면 “집에 가버리겠다”고 협박하는 할머니에게 갈 곳이 없다는 건

서러운 일이리라.

지금까지 미뤄온 것도 그래서였는데

결단을 내린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짐을 치우러 가셨다.

일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평소 종이때기 하나라도 버리기 싫어하는 성격이신지라

평생 모은 짐이 하나 가득이었고

그 모든 것에 다 할머니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70년이 다 된 재봉틀을 버리자는데도

“절대 안된다”고 악을 쓰신다.

“내가 시집 올 때 사온 것이여!”라며 이유를 설명하신다.


결국 어머니는 다른 날, 할머니 몰래 일꾼들과 더불어 짐을 챙기셨고

쓸만한 것만 우리집에 가져오셨다.

“날 빼놓고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며 화를 내시던 할머니는

어머니가 챙겨온 짐들을 모조리 당신 방에 집어넣으셨다.

짐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무게가 나가건만

기력이 팔팔한 할머니에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찬 할머니의 방은 요새로 거듭났고

거기서 뭔가를 찾는 건 이제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짐을 치우러 두차례나 더 가야했고

그때마다 할머니의 반발에 직면하셨다.

가출을 시도하셔서 내가 붙잡아 온 적도 있고

가슴을 치면서 어머니 앞에서 통곡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뭐, 사정은 이해한다만

나만 오면 붙잡고 통곡하는 게 슬슬 짜증이 난다.

할머니를 모시는 78세 노인 분도 인내의 한계에 달했는지

할머니를 대하는 얼굴에 짜증이 묻어난다.


전세 계약은 성공적으로 됐지만

할머니의 분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전세금을 내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이시는데

돈을 쓰실 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입양한 아들에게 주시려는 걸 뻔히 아는지라 엄마는 그럴 수가 없다.

삶이란 원래 비루한 거지만

할머니의 삶을 보면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셨고,

아이를 더 낳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입양한 아들 때문에

말년까지 고생하시는 할머니,

이제는 우리집 말고 오갈 데가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돌봐줄 사람 없이 혼자 지내는 노인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리 집에 “얹혀사시는” 할머니가 난 더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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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2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안쓰러워요...

다락방 2007-04-2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저희 외할머니 생신이시라 온 가족이 다 모여서 저녁을 먹었지요. 그런참에 부리님의 이 글을 읽으니 어쩐지 마음이 싸해지네요.

진주 2007-04-2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부리 2007-04-2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마음이 아파요...
다락방님/제가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요즘 저도 우울증이 갑자기 찾아와서요...
배혜경님/그러게 말입니다....

레와 2007-04-22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

모쪼록 우울이 녀석이 빨리 부리님 곁을 떠나버리게,
제가 유혹해 버릴까요??

....
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