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십대 중반이었다.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무렵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텐데, 그 당시에 나와 연애하던 남자는 나보다 나이가 훌쩍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십몇년 전인데, 내 연애를 모두 돌이켜 보았을 때, 잊지 못할 연애는 이 첫 연애와 최근의 마지막 연애가 되시겠다. 마지막 연애가 최상의 것들로 가득찬 좋은 연애여서 였다면, 첫 연애는, 그렇지 못한 게 아주 강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첫 연애로,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인지,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첫 연애를 돌이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연애가 내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연애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 연애로부터 그 다음 연애, 그 다음 연애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사람을 만나 연애를 했고 더 나은 관계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니 최근의 연애가 최상의 연애가 될 수밖에 없었을 터. 그 첫 연애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쥐구멍에 숨고 싶고, 그 당시의 나를 아는 사람들과 다 관계를 끊고 싶은데... 자, 이쯤하고. 내가 이거 얘기할려고 페이퍼 창을 연 게 아닌데, 이놈의 글은 왜 지멋대로 이따위로 흘러가고 난리야.... 돌아와!!



그 연애의 어느날, 나는 내가 잃어버린지도 몰랐던 나의 귀걸이를 그가 갖고 있단 걸 알게 됐다. 그가 자신의 청바지 주머니에서 나의 귀걸이를 꺼내며, '너 어제 내 차에 이거 떨어뜨리고 갔더라' 하는 거다. 나는 내 귀걸이가 없어진지도 몰랐던 터라 어 그러냐고 하며 받아들려는데, 그는 '이거 내가 가지고 있을게' 라고 하는 거다. 응? 왜? 당신은 귀도 안뚫었는데? 하니, 당분간 가지고 다니고 싶다는 거다. 아, 뭐지 이 아련함, 애틋함... 나는 뭔지 모르게 기분이 초큼 좋아져서.. 응 그렇게 해, 했다. 뭔가 살짝 변태스러웠지만, 그 마음이 뭔지도 알 것 같았던 거다. 어쩌면 나는 약간의 변태성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약간의 변태..인 걸지도 모르겠고.



어느 날엔가 나의 다정한 친구는, 자신의 좋아하는 사람의 집에 방문해서 자신이 쓰던 향수를 소파에 두고 왔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새 향수가 아니라 자신이 계속 쓰던 향수, 그래서 조금만 남아있던 향수. 그걸 두고 왔노라고. 내가 늘 뿌리던 향을 그의 집에 두고 오고 싶었다는 친구의 말이, 나는 너무나 잘 이해되었다. 아, 쓰면서 가슴이 좀 두근거려. 그거 너무 좋은 것 같아. 그러니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의 집에 찾아가게 된다면, 나도 내가 쓰는 향수를 놓아두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귀걸이를 가지고 다니고 싶다고 했던 오래전 구남친이 그랬듯, 쓰던 향수를 두고 오는 그 마음은, 어쩐지 내밀하고 둘 만의 것인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나. 그런 느낌이 뽝- 오잖아? 나도 두고 와야지. 최근의 연애에서 '당신 향기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향수를, 그의 집에, 그의 방에, 혹은 그의 욕실에 두고 나오면, 뭔가 은밀하고 내밀하고 뿌듯하고 좋을 것 같은 거다.


라고 쓰고 생각해보니, 향수가 한두푼이 아닌데...그거 두고 다시 사야하나....... 음..... 나는 비싼 향수 쓴단 말이야..... 그러니까 향수는 안두고 오는 걸로...... 음.....



그러고보니 오래전에 읽은 책중에서, 도대체 어떤 책인지 기억이 안나는데, 그런 문장이 있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닌데, 


'그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의 귀 뒤에서는 그 향기가 더 진하게 났다.'


뭐 이런 문장이었다. 어쩌면 이건 내가 남녀를 바꿔 기억하는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 향기 좋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나를 안고, 그래서 내 귀 뒤에 갔다온 후에 말했으므로, 그 이후로 계속해서 저 문장이 떠오르는데, 정말이지, 도대체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1도 안나는 거다. 확실한 건 꼬꼬마 시절에 읽었던 책이었다는 거.....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어디였지?



음...향수가 아무리 비싸도 그래도 그의 집에 두고 오는 게 더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러면 한 십분의 일쯤 남았을 때 두고 오는 걸로 하자. 어차피 다 쓰면 새로 사야 하는 거니까. 

에잇. 같이 살면 그냥 두고 쓰면 되는데... 이게 제일 빠른 해결책인데.... 돈도 아끼고....... 


아 나 지금 멘탈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것 같다. 자, 다시 부여잡고. 돌아와!!



나로 하여금 첫 연애의 귀걸이와 내 친구의 향수를 떠올리게 만든 건, 이 책이었다.
















이 책의 작가 '시리 허스트베트'의 남편은 너무나 유명한 '폴 오스터' 이다. 책의 앞장 헌사에도 <폴 오스터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닌데, 책 읽다보면 이 여자 되게 똑똑하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쨌든 이 책은 '소설'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에 대해 적고 있다. 뭐 이렇게 희귀한 남자들을 만나나 싶을 정도로 독특하고 괴랄한(?!) 남자들이 연달아 나오는데, 첫번째 장의 남자 역시 마찬가지. 여자주인공 '아이리스'를 아르바이트로 고용해서, 사물에 대해 보고 말하는 것을 일로써 시킨다. 아이리스는 장갑 한 쪽을 보고 이건 어떤 질감이고 어떤 색이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얘기를 해야 되는 거다. 그걸 이 남자는 다 기록해서 뭔가 책을 쓸 예정인 것 같은데, 이 일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이 남자가 이 장갑의 주인인 여자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아이리스는 하게 된다. 그러니 이 남자가 실제 존재했으나 살해당한 여자에 대해서 대체 왜 이렇게 전기를 쓰려하는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고 싶은데, 이 남자는 그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문다. 너 뭐야, 왜 말안해줘! 라고 아이리스가 분노하고 남자는 계속 말을 안하는 과정에서, 혹여라도 남자는 이 여자가 다시는 일을 하러 오지 않는다고 할까봐 겁이 난다. 그리고 다음번 일도 할거지? 라고 하면서 가기 전에 그녀에게 그녀가 가진 물건 중 하나를 놓고 가달라 말한다. 오오, 이 남자에 대해 뭔가 복잡하고 짜증나는 심정을 가진 그녀는 무엇을 놓고 갈 것인가. 




문 앞에서 그가 양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습니다. 가기 전에 당신 것을 하나 놓고 가주면 좋겠어요."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싫어요."

"왜 싫습니까?"

그 손아귀에서 내 손을 잡아 뺐다.

"싫어요."

"작은 거 하나만."

그가 내게로 바짝 몸을 기울이자 풀린 셔츠 섶 사이로 쫙 갈라진 쇄골이 보였다. 희미한 콜롱 향이 풍겼다.

가방을 열고 책·봉투·열쇠들을 마구 헤치고 뒤져서 시커멓게 흑연 때가 묻은 오래된 녹색 지우개를 하나 찾아 그 손에다 휙 던지며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p.54-55)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나 웃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우개라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좋은 아이템, 신선한 아이템이 아닌가! 이 남자, 사물을 관찰하며 그걸 글로 쓰는 남자에게, 뭔가 내밀한 거 주기 너무 싫잖아. 게다가 좋아하는 남자도 아니고, 비밀이 가득한 남자이고, 자기가 살인자인지 아닌지 말도 안해주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귀걸이를 주기도 싫고 향수도 주기 싫잖아? 그런 참에 가방에 지우개가 있다니. 그녀가 이 시점에서 대학원생인 게 넘나 다행인 것이다!! 지우개. 은밀하지도 내밀하지도 않은 그것!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내 가방에도 지우개를 넣고 다녀야 하는걸까? 알라딘 굿즈로 지우개 좀 만들어 주세요!!!



작은 물건이라도 하나 놓고 가달라고 말한 사람에게도, 처음에 내가 언급했던 것처럼 약간의 변태성이 있다 하겠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의 변태성은 내게 '싫을까'? 왜 누군가의 약간의 변태성은 훗, 웃음이 나고 좋으면서 누군가의 변태성은 아우 싫어~ 이렇게 될까?  내가 어떤 것을 포용하고 허용하는 것, 거기에는 그 '특징'이 주는 게 아니라, '그 무엇'이 주는 게 아니라, 애정이 바탕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변태성'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의' 변태성을 좋아하는 것. '너니까' 그것이 괜찮은 것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라고 끝맺으면 너무 진부하니까....



어떻게 끝내야되지?




그냥 

끝.




그나저나 아직 이 책 읽고 있는 중인데, 제목이 너무 좋아서 골랐다.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

어차피 내 연애를 떠올렸던 거니 계속 떠올려보자면, 아아, 그간 내가 연애했던 남자들은 만약 내가 '당신을 믿고 추락할게' 하면, '응, 내가 잡아줄게' 할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다들 그렇게 말했을 거야. 다들 착했어... 단 한 명, 칠봉이만은 ... '야, 너 무거워서 나 받을 자신 없어, 너 받다가 허리 나가, 추락할 거면 다이어트 좀 하고 해!' 라고 할 게 분명하다... 나쁜놈.... 공대생 쉐키.......


라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분노하며 진짜로 이만


끝.




-추가-


여러분. 내가 이 글 썼더니 우리 오빠가 이런 링크를 보내줬다. ㅠㅠ 짱 멋진 오빠임. 최고. 내 인생의 성공관계 되시겠다 ㅠㅠ 지구에서 센스로 1위 먹을 오빠여..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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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2-2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자도르 같은 향수 여기저기 두고 오면 넘 아깝지만 ㅋㅋㅋㅋ 지우개라면 여기저기 뿌려도 될 것 같네요. ㅋㅋㅋㅋ 알라딘 굿즈로 지우개를... ㅋㅋㅋ

전 이 책 얼마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사왔는데, 조만간 읽어봐야겠네요. 지우개라니, 이 작품 의외인걸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7-12-21 11:31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니깐, 뭔가 의심스런 남자라 뭐 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지우개가 딱인 겁니다. 넘나 좋은 것. 지우개 몇 개쯤 가방에 넣고 저런 변태성 발휘하는 별 거 아닌,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남자가 뭐 달라고 찡얼대면, 지우개 좀 던져야겠어요. 이거 먹고 떨어져! ㅎㅎㅎㅎㅎ

쟈도르~ 향수를 놓고 오면 너무 아까우니까, 그런 향수는 1/20 쯤 남았을 때...두고 오는 걸로 합시다. 아하하하하.

syo 2017-12-21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남자는 아마 다음 사람을 고용해서 지우개를 보고 얘기하도록 시키겠죠??

다락방 2017-12-21 12:32   좋아요 0 | URL
음... 전기를 쓸 만큼의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아요.... 음...... 이 소설에 짜증나는 남자 많이 나와요. 하하하하하

다락방 2017-12-2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 추가했는데 많은 분들이 보시지 못할까봐.

https://youtu.be/-bOLDPhN8fE

위의 글을 읽고 우리 오빠가 보내준 영상!!

건조기후 2017-12-21 14: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틋하고 변태같은 느낌 너무 좋네요 ㅋㅋㅋ 근데 나는 귀걸이도 안 하고 향수도 안 쓰는데 그런 느낌을 뭘로 내야하지 갑자기 막 고민되다가 음 나는 그럴 사람이 없구나를 깨닫고 마음이 아주 편해져버렸어요. 참 추운 겨울이네요? ㅎ

다락방 2017-12-21 16:05   좋아요 0 | URL
애틋하고 변태같은 느낌 좀 좋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귀걸이도 안하고 향수도 안 쓰면 뭘로 해야될까요... 흐음.... 손수건? 손수건도 안쓰시면... 어....음..... 어.... 일단 패쓰.
저도 그럴 사람이 없어요. 향수는 그냥 제가 다 쓰는 걸로...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돈 아끼고 좋네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쩐지 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양이라디오 2017-12-2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을 쓰려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야하는 걸까요?? 다락방님은 뭔가 디테일한 기억력이 좋으신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기억들이 죄다 망각의 늪에 빠져버려요ㅠ

다락방 2017-12-21 17:38   좋아요 1 | URL
저야말로 기억들을 죄다 망각의 늪에 빠뜨리는 대표적인 1인인데요 ㅎㅎ
어떤 강렬한 것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게 되어 그런 것 같아요. 남아 있는 기억인지도 모르는 채로 살다가, 책을 읽는 중에 파다닥 떠오르는 거죠. 하핫.

고양이라디오 2017-12-22 16:44   좋아요 0 | URL
저도 재밌는 에피소드를 글로 써보려고 했는데 쓰면 쓸수록 재미없어져서 지금 중단상태입니다ㅠㅋㅋㅋ
의외로? 그 상황과 대화를 글로 옮기려느깐 무지 힘들더라고요. 현장의 생생함은 없어지고 뭔가 설명충이 되는 느낌?

역시 글쓰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락방님 이야기는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재밌습니다ㅎ

다락방 2017-12-22 17:28   좋아요 1 | URL
제 경우엔 사실 ‘재미있게 쓰자‘는 생각을 하면서 쓰지는 않거든요. 다만, 제 글쓰기가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서 ㅋㅋㅋㅋㅋ 생각나는 그대로 다다다닥 손이 옮겨요. 가끔은 손이 생각보다 빠른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고양이라디오님, 부지런히 씁시다. 잘 쓰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쓰는 게 답인 것 같아요. 부지런히 쓰다보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잘쓰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제 경우에도 열심히 썼다니 과거의 글보다 더 나은 글을 쓰게 됐어요. 물론, 부지런히 읽기도 해야 하고요. 잘하고 싶은 게 있다면, 열심히 하는 게 답인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세요, 고양이라디오님!!

고양이라디오 2017-12-22 17:41   좋아요 0 | URL
네ㅎ 많이 읽고 많이 쓰겠습니다!

읽는 거 만큼 쓰는 것도 재밌는 거 같습니다ㅎ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저도 써야겠어요ㅎㅎ 생각하면서 쓰는게 더 어려운거 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