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내용에 앞서, 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팡팡 터질 것임을 미리 밝히는 바입니다.)
어쩌면 신은 누군가를 '특별히' 사랑하기도 하는데, 아델라인에 대해서 더 그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델라인의 시간이 29살에 멈춰,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속 살 수 있게 해서가 아니다. 결국 아델라인에게 그토록 오랜 시간을 노화하지 않고 살게 해준 건, 아델라인이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 너는 진실한 사랑을 만나는 데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걸릴 것 같구나, 그러니 보통사람의 수명으로는 곤란해, 너에게 더 긴 시간을 줄게' 라고 신이 총애한 사람이 아델라인이 아닐까 싶었던거다. 그래서 내가 그런 아델라인을 보며 질투와 시기를 가졌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정말 잘되었다고, 아델라인이 더이상 도망치지 않도록 용기를 내게 해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당신의 시간이 그토록이나 길고 힘들었던건가, 싶으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델라인의 시간은 아주 오랫동안 29살에 멈춰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늙어갔다면 현재 100살이 넘었을텐데, 아직도 여전히 계속 스물아홉살이다. 그런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자신의 특이한 상황-늙지 않음- 때문에 자신이 연구대상이 되고 관심이 대상이 될까 두려워 도망치는 삶을 반복해 살았고,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늙어갈 때 자신은 계속 젊은 상태로 있어 상실감을 느끼는 것들 때문에도 그녀는 도망쳤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상실을 경험해야 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오래 함께 같이있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딸 말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딸은 이제 백발이 가득한 할머니가 되었고, 자신의 엄마인 젊은 아델라인에게 더이상 도망치지 말라고, 사랑을 하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아델라인에게 그건 너무도 먼,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앨리스'를 만나고 바뀐다. 앨리스라는 한 사람 때문이라기 보다는, 앨리스의 아버지인 '윌리엄'의 조언도 컸다. 자, 여기서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아델라인'은 '앨리스'의 집에 방문하게 된다. 앨리스 부모님의 결혼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리는데 거길 같이 가자고 앨리스가 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집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는데, 가서 보니 앨리스의 아버지 '윌리엄'이,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바로 그 남자가 아닌가! 아델라인도 윌리엄을 알아보지만, 윌리엄 역시 놀란다. '너 내가 오래전에 알던 그 여자를 닮았구나!' 그러나 아델라인은, 자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의 딸이라고 한다.
결혼생활이 오래되어 자신의 결혼생활에 푹 빠져 젊은 시절 연애했던 아델라인을 잊고 지냈던 윌리엄은, 덕분에 회상에 잠긴다. 아 그때, 아델라인 덕에 내가 좋아하는 일로 전공을 바꿀 수 있었지, 하는 것도 깨닫고, 그들의 즐거운 시간에 대해서도 회상한다. 그리고 우연히, 지금 아들의 연인으로 찾아온 그녀가, 과거의 그녀임을 알게 된다.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인데, 그는 믿는다. 숲길에서 이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나는 혹여라도 윌리엄이 아델라인에게 '내가 너를 오랫동안 못잊었는데!' 하면서 기쁨과 감동에 겨워 키스를 하진 않을까, 끌어안진 않을까, 좀 신경이 곤두섰다. 이제 그에겐 아내가 있고, 또 아델라인은 자신의 아들의 연인인데, 뭔가 좀 거시기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해 막장으로 흐를까봐 좀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오, 그런데 윌리엄은 그러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그녀의 처지를 이해해준다. 너 정말 힘들었겠구나,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겠구나, 이제 도망치지 말아, 라고.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불쾌한 구석이 없는 영화이다. 빻은 남자들이 나오지를 않아. 물론 영화를 보면서 '어디, 빻은 남자 나오는가 두고보자' 하고 보는 건 아니다. 다만, 책이든 영화든 읽다보면 탁탁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잖은가. 그런데 이 영화엔 그런 게 전혀 없는 거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장면처럼, 여자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다. 이 장면은 내게 꽤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오래전에 봤던 영화 《트랜스포머》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 과학자가 남자 과학자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자신의 짐작을 말하는 장면이었다. 오래전이고 또 내가 과학에 무지하다보니 그게 어떤 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에 여자 과학자의 추측에 대해 남자 과학자들은 듣고 바로 무시해버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라고.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는 게 나오는 거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남자새끼들 진짜 여자 말 안듣네...'라고 생각했던 그 때의 나를 기억하는데, 이 영화 《아델라인》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남자는 오히려 여자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쓰는 거다. 이 장면이 굉장히 잘못될 확률이 많은 장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막장으로 가기 쉬운 장면. 자신이 사랑했던 옛여자가 내 앞에 여전히 젊고 아름답게 있을 때, 그것을 대부분의 영화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생각하면 답답한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들 틈틈이 '윌리엄'의 지금의 결혼생활을 아주 잘 해내가고 있다는 점, 지금의 아내를 오랫동안 깊이 사랑했다는 것도 보여준다. 와- 진짜 너무 좋은 장면들이 가득해.
아델라인이 젊게 오래 사는만큼 공부도 많이 한다. 책도 많이 읽지만 할 줄 아는 외국어도 많은데,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다가 앨리스가 포르투갈어로 업무 얘기를 해야 해서 우아아아아 스트레스를 받자, 그 전화기를 확 가져와서는 포르투갈어로 막 다다다다다다다다닥 얘기를 해주는 거다. 개멋짐!! 이 영화속의 사소한 장면들은 아주 잘 짜여져 있는데, 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아델라인이 앨리스의 집에 놀러가 앨리스 식구들과 다같이 게임을 한다. 일반적인 상식문제들을 풀어내어 겨루는 건데, 여기에서 아델라인이 제일 잘 맞히는 거다!! 연습문제는 권투에 관한 거였는데, 권투 선수에 대한 상식을 아델라인이 얘기하자, 앨리스가 '여자와 권투라니 귀엽군' 이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거다. 중요한 건, 이 장면에서 앨리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몰라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거나 무시한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다' 라는 걸 알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까지도 다 생각해서 가벼운 농담으로 한 것. 아니나다를까, 앨리스가 이 말을 하자마자 아델라인도 그에게 지금 뭐라는 거냐며 야유를 보내고, 앨리스의 엄마도 그에게 게임하던 작은 도구를 집어 던진다. 그리고 모두 함께 웃는다.
아, 너무 좋은 장면이다. 모두에게 장착되어 있는 거다, 성평등의식이. 멋져 ㅠㅠ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가족이다 ㅠㅠ
아델라인은 다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동안 도망쳐왔던 일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곁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이제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다. 그녀의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그때, 그러나 그녀가 다시 생을 붙잡은 그 때, 눈을 떴더니 자신의 눈 앞에 자신을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아, 너무 좋지 않은가!
그녀는 병원에 실려가고, 그리고 병원에서 자신에 대한 얘기를, 자신이 왜 도망치려 했고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를, 앨리스에게 말한다. 아델라인의 딸은 엄마 문병을 왔다가 앨리스를 만나게 되고, 여느때처럼 자신을 '아델라인의 할머니예요' 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나 아델라인이 딸을 바라보며,
'이 사람은 알아'
하고 말한다. 아 또 쓰다가 눈물날 것 같은데, 나는 이 장면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델라인의 딸도 '이 사람은 안다고?' 하면서, 그것이 뭘 뜻하는 지 알기에 같이 기뻐하며 눈물 흘린다. 그러니까 자신의 감춰온 비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 계속 감추기만 해야했던 과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다는 거, 털어놓을 누군가가 있고 또 그걸 기꺼이 듣고 받아들여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거,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거, 이 모든 게 너무 좋아서 나는 그 장면에서 울어버리고 말았어 ㅠㅠ
내가 '블레이크 라이블리'를 검색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 아니, 이 좋은 영화가 왜 묻힌거지? 나만 묻혔다고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은 다 본건가? 아, 여러분 이 영화 참 좋다. 여러가지로 생각할 것도 많고 걸리적 거리는 장면 없이 모두가 소중하며 참 좋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찾았다는 거, 진짜 너무 좋지 않나.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 결코 쉽지 않고, 또한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아아, 신은 아델라인을 특별히 더 사랑하여 긴 시간을 그녀에게 주었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너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니까,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만나게 해줄게, 하고 말이다.
아..정말 좋은 영화였다. 외국어 잘 하는 아델라인 넘나 멋지고, 자극적이지 않게 해야 할 이야기를 하는 것도 넘나 멋지고, 당연하게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나오는 것도 너무 멋지고... 좋은 영화다. 네이버 굿다운로드 1천원이고, 옥수수에서는 심지어 무료라네. 나는 이 영화를 핸드폰에 다운 받아 놓았는데, 그녀가 책을 읽던 장면 같은 것들을 돌려보고 싶어질 것 같다. 그런 장면들, 너무 좋잖아? 짧게 나왔지만 말이다.
아, 데이지 밀러도 사야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