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아직 출간전인 책, 《헬페미니스트 선언》의 북콘서트에 다녀왔다. 윤김지영 쌤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는데, 책에 대한 궁금한것부터 시작해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까지 다 해도 좋은, 그런 자리였다.
책에 대한 요약을 듣고난 후 나는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그간 내내 머릿속에서 의문을 가졌던 '여성혐오'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혐오'라는 단어가 너무 세서 남자들이 더 난리를 치는 것이며, '나는 안그러는데?' 가 된다는 거였다. 혐오 대신 다른 단어였으면 달랐을 거라는 말을 무수히 많이 들었는데, 나는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 않은 거다. 어떤 단어를 거기에 넣었어도 내 생각에 남자들은 '내가 언제?'라고 할 것 같은 거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하면서, 쌤은 '미소지니'가 '여성혐오'로 번역된 것에서, 이 혐오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물었다.
이 책에도 이미 혐오에 대한 이야기는 실려 있었다. 내가 쌤의 발언을 요약하자면, '혐오는 제대로 된 표현' 이었다는 거다. 왜 그런지는 책에서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여성혐오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개념입니다. 무엇보다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여성을 채켜세워 숭배(성녀와 개념녀, 미녀 등) 하거나,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여 낙인(창녀와 보슬아치, 김치녀, 추녀 등)을 찍는 행위-을 통해 여성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도입하는 권력기제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혐오는 숭배의 자리를 환상으로 남겨놓고 여성을 자기 착취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할 통치 방식으로 가부장제는 지금껏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미소지니를 여성비하나 멸시로만 번역하는 것은 여성혐오 개념의 다층적 층위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습니다. 여성멸시와 여성비하는 여성혐오의 하위범주일 뿐입니다. (p.144)
혐오는 단순히 어떤 대상을 싫어하는 개인적 기호가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하고, 무엇을 들리지 않게 하는가를 결정하는 보수적 권력기제입니다. 혐오는 비대칭적 권력 구조 속에서 약자이자 소수자에게 사회의 모순과 불안정의 원인을 돌리는 데 그 기능이 있습니다. 이는 기존 질서를 공고히 지속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보이스 피싱의 책임을 조선족에게 돌리는 것, 범죄율의 증가를 외국인 노동자 탓으로 돌리는 것, 이혼율의 상승이나 삼포세대-연애와 결혼, 출산 포기-의 원인을 이기적 여성 탓으로 돌리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이와 더불어 혐오는 적대의 대상을 개념적으로 분명히 규정하고, 이를 붙이기를 통해 도덕적인 규범을 적용하는 행위가 항시 수반되지요. 즉 혐오는 약자, 소수자를 분류하고 낙인찍어 이들을 부도덕한 것이자 비천한 것, 천박한 것, 열등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비대칭적 권력관계 안에서 소수자를 낙인직어 사회문화적으로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소외의 메커니즘인 것이지요. (p.159)
아직 페미니즘 공부가 얕아서 잘 모르겠다며 질문한 다른 수강생은, 무슨, 질문이 아주 깊고 넓더라. 강의 끝나고 갈비를 먹으면서 친구와 나는, '왜 여자들은 자신의 공부가 깊어도 얕다고 생각하고 똑똑해도 똑똑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겸손이 몸에 익은걸까'에 대해 얘기했다. 남자들은 하나만 알아도 '내가 이렇게나 똑똑하다' 하고 얘기하는데, 하면서. 여러 질문과 답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또다시 얘기했다.
근데 나는 이제 좀 지친다, 아무리 말하고 얘기해봤자 남자들이 달라지는 것 같지 않다. 조금씩 변하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잘 모르겠다, 사람들 만나서 설득하려고 하는 것도 피곤하고, 내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무식한 댓글들 달릴 때마다 상대하는 것도 너무 짜증난다, 너무 모르고 무식하면서 공부할 생각도 않고 댓글다는 거 보면 아예 가망이 없다는 생각도 들고, 심지어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남자들도 페미니즘 꼬투리 잡기에만 급급하다, 강남역 사건이 있은 후로 솔직히 나는, 남자들이 다 죽어야 세상이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공부할 사람만 공부하고, 정작 해야되는 남자들은 안한다, 그러면서 가르치려고만 든다, 지친다,
라고 말을 했다. 내 발언 사이, 다른 학생도 그랬다. '이번 생에서는 안될것 같죠..' 라고. 그러자 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단 한명이 전사가 되어 남자들을 바꿀 수는 없다고 하셨다. 그건 되지 않는다고,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러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다만 우리는 빗방울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누군가 아닌 발언을 했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한 명이 말하고, 옆에서 또 다른 한명이 '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하는 분위기가 된다면, 빗방울처럼 옷을 적셔서 조금씩 변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자 다른 수강생이 덧붙였다. 본인은 중학교에서 성교육을 담당한다 하셨는데, 세상은 분명히 변하고 있다는 거였다. 예전에 비해 페미니즘 책을 보려는 학생들이 많고, 많이 궁금해하고, 그래서 많이 질문해서 자기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하시는 거다. 그러자 다른 수강생이, '그렇게 변화한다고 하지만, 중학교 남학생들이 선생님 앞에서 '딸치는' 거 보면, 아니지 않냐' 고 되물었고, 그러자 그 수강생과 쌤은, 이미 그것이 뉴스에 기사화 되어서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달라진 거라는 거였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게 아닌데, 예전에는 그런 일이 뉴스로 나오지도 않았다고. 이것만 봐도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나는 지쳐있었고, 다 꼴보기 싫었고,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공부를 '하나도' 안하면서 맨스플레인을 지껄이기만 하는지(얼마전에는 '페미니즘 인정 받고 싶으면 여자도 군대가야 된다고 발언해라' 라는 댓글도 받았다.), 변화를 기대하기 보다는 산속으로 들어가 사는게 더 나을거라는 생각도 했는데, 사람들이 그런 나에게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얘기해주니 다시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 라고 다시 의욕을 다지게 되는 거다. 쌤을 비롯한 학생들이 여러 질문들을 해주고 또 기운내라고 해주니 뭔가 좋아가지고 ㅠㅠ 나는 중간에 이렇게 말해버렸다.
"좋은 시간이네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모든 시간이 끝나고 책을 들고 작가님께 싸인을 받으려는데, 아니, 윤김지영 쌤, 어떻게 문구 생각하시려고, 매 사람마다 다른 사인을 해주신다. 아아, 이 정성 어쩔....그거 어떻게 번번이 생각하시려고.... 그리고 내가 받은 사인은 이거였다.
나는 이 수업시간과 쌤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이 쌤의 강의를 찾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에 페미니즘 공부를 좀 더 깊이있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스터디에 들어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대학원은 너무 빡셀 것 같고, 스터디가 적당할 것 같아서. 그런데 인터넷이나 트윗에서 검색해보니 확 끌리는 게 없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볼까, 사람을 좀 모아서 만들어볼까, 생각했는데, 내가 모으면 어차피 나 정도의 공부를 가지고 모일텐데, 누군가 한 명은 많이 알아서 이끌어줘야 발전이 있는게 아닐까 싶어지니, 그도 아닌 것 같은 거다. 나는 스터디를 이끌만큼의 실력이 안되니까..그러면 우리는 계속 이대로 멈춰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그래서 다시 강의를 찾아 다니기로 했는데, 마침 윤김지영 쌤의 북콘서트 소식을 알게 된거였고, 들어니 진짜 너무 좋았던 거다. 찾아다녀야겠다. 움화화핫.
강의가 끝난 후 친구랑 소주를 마시다가, 내가 친구에게 말했다. '나 이성애자 여자로 살아가는 거 너무 힘들다'고. 친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페미니즘 알기 전으로 돌아가는 게 연애하기 더 쉬웠던 것 같아' 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나는 그냥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면서 혼자 술이나 홀짝이면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한 것 같아' 라고 하자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해주었다. 요즘에는 가끔 어쩌면 내가 이성애자는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의심도 해본다. 내가 그간 이성애만 해와서 이성애자인줄 알았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그렇지만 이도저도 다 떠나서 그냥 혼자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면서 술이나 마시는 게 세상 행복하다.
일요일인 어제는, 그래서 나의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 계속 생각해봤다. 나는 즐겁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 하고. 윤김지영 쌤의 다른 강의에 대한 걸 검색하다가, 문득, 아, 나는 이런 걸로 즐거워하네, 싶었다. 나는 다른 게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 가는 게 재미있어, 하고. 나에겐 지금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회사든 친구든 지금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면 충분할 것 같다. 여름휴가엔 혼자 여행을 떠날 계획인데, 여행을 가서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걷고 혼자 침대에 눕고 또 멍때리는 이 모든 과정들이 즐거울 것 같다. 누군가 더 있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이대로도 충분한 것 같다. 더 큰 행복을 원한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분명 있었는데, 딱 이만큼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바람이 있다면, 내 조카가 헬페미가 되는 것..... 조카야, 이모랑 헬페미가 되자!
금요일 밤에는 조카네가 왔다. 조카를 오랜만에 보는데, 조카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내게 달려들었다. 옆에는 우리 아빠도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할아버지 보지도 않고 나한테 달려들어 안겼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감동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는 한참을 안고 있으면서 조카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타미야, 보고싶었어."
그러자 나의 조카는 내게 말했다.
"나도."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사랑하는 나의 조카야, 이모랑 헬페미가 되자꾸나! 그리고는 늦은 밤, 제부랑 엄마랑 여동생이랑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제부가 구워준 버섯을 안주로 먹는데, 모기가 나 물었던 얘기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조카가 안방으로 뛰어가서는 버물리를 가져온다.
이모, 물린 데 어디야? 버물리 발라줄게.
그래서 내가 바지를 들어올리며 물린 자국을 보여주자, 조카는 스윽스윽 버물리를 발라줬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뭐 이런 애가 다있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조카는 오자마자 내 방에 들어와서 내 가방을 다 뒤지고 (이모 이건 뭐야?), 내 서랍을 다 뒤지고, 기어코 지가 가져갈만한 걸 골라서는 '이모 이거 나 줘' 하고는 몇 개를 챙겼는데, 그걸 보고는 여동생이 그랬다.
"아우 타미야, 니가 그렇게 자꾸 이모꺼 가져가니까 엄마가 미안해서 이모껄 못가져가겠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이것들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뭘 그렇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카는 그런 제엄마에게 "난 이모방이 너무 좋아" 했다. 그러자 옆에서 제부는 제엄마랑 다르니까 신기한가 보다고 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근데 알라딘에서 받은 부채 줬더니 안가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싫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면서 내 몽블랑 만년필 가져가려고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돼!! 부채나 가져가란 말이닷!!!!!
일요일 아침에는 라면에 매운 고추를 넣고 고춧가루도 넣어서 끓여 먹었는데, 먹으면서 걸어서 세계속으로 아이슬란드 편을 보았다. 마침 나는 리베카 솔닛으로 인해 아이슬란드에 관심이 갔던 터라, 흥미롭게 보았는데, 저기, 저렇게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내가 갈 수 있을까, 한번쯤 가서 머무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는,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지만, 한번쯤 가보고 싶어지는 거다. 오십년간 생선을 잡았다는 어부도 잠깐 등장했는데, 오십년동안 하나의 일을 한다는 것, 그래서 그 일에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걸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오십년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데, 나는 이제 무슨 다른 일을 시작해도 오십년을 할 수도 없을텐데,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작년에 역삼동에서 사주를 봤을 때, 쌤은 내게 '자꾸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는 사람이다' 라고 하셨고, '그리고 실제로 많은 답을 얻어낸다' 라고 하셨다. 그 말이 불쑥불쑥 생각나, 자꾸자꾸 질문을 던지는 나를 격려한다.
방금 전에 중학교 동창으로부터 오만년만에 연락이 왔다. 오늘 아침에 문득 아주 오래전, 내가 우리동네 맛집이라며 줄서서 치킨을 사왔던 게 떠올랐다고. 이십대 중반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 문자를 받고 나도 피식 웃었다. 간장치킨이었지, 라고 답을 보내면서, 나도 그 날이 떠오른 까닭이다. 친구는 응, 정말 맛있었지, 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