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이가 다섯]에서 소유진은 안재욱에게 이별을 말했다. 헤어지자고 했다. 아니, 어제였나 그제였나. 어쨌든 헤어지자고 했다. 안재욱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안재욱의 가족들-어머님과 장모님-이 소유진을 반대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과 계속 연애를 하는 것이 안재욱을 힘들게 할 거라는 게 이유였다. 각자의 아이들이 있고 그래서 그들이 결혼을 하게되면 아이가 다섯이나 생기게 되니 그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을거라며 어떻게 '이혼녀'에 '아이가 셋이나 딸린' 여자랑 결혼하려는 거냐고 안재욱의 어머님은 아들에게 헤어지라 말하고, 장모는 장모대로 소유진을 찾아가서 해코지를 했던 터다. 안재욱 역시 혼자이며 아이가 둘이나 딸린 남자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안재욱의 아이들을 잘 살펴줄 다른 여자가 그들에겐 필요했던 거다. 자신의 아이들은 없는, 그러나 안재욱의 아이들은 잘 돌보아줄 여자.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랑 연애를 지속시켜나가고 또 나랑 결혼을 하기로 선택함에 있어서, 그 남자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면, 혹은 다른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써야 한다면, 나 역시 소유진과 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다. 당신과 내가 함께하는 게 서로 함께 행복하자고 결정한 일인데, 그 행복하려고 하는 과정들 속에서 게속 힘들어야 하고 싸워야 한다면,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질테니까. 그래, 그냥 내가 물러나자. 그 사람의 가족에게 환영받는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도록, 그냥 내가 뒤를 돌아 가자, 라고 나 역시 생각할 것이다. 이건 뭐 슬픈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것보다는, 그 편이 그에게도 나을 것이며 나에게도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함께 살고자 하는 여자가 이왕이면 식구들한테 환영받는 여자라면 더 좋을테니까. 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역시 반대를 무릅쓰며 선택해야 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소유진의 선택을 이해한다. 정말 잊을 수 없을거라고, 너무나 고마운 시간을 선물해준 좋은 연애인이었지만, 결국은 '우리 헤어져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소유진을, 나는 이해한다. 나였어도 다르지 않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나였어도 헤어지자고 말했을 것이고, 나였어도 울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재욱이 소유진에게 말한다. 왜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나와 의논하지 않고 너 혼자 고통받고 너 혼자 결정하냐, 나는 너에게 뭐냐, 나는 지금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나를 좀 기다려주면 안되겠냐, 나랑 상의 좀 하자, 고.
크- 좋구먼. 좋다. 역시 연애를 하려면 이런 남자랑 하는 게 진리구나. 나 혼자 고민하고 절망하며 고통속에 빠져있을 때, 그래서 나 혼자 방법을 찾고 결정을 내렸을 때, 그 방법이 반드시 최선이 되리란 보장도 없고 좋은 방법이란 보장도 없다. 내 딴에는 최선이라고 내린 결정이며 또 해결방법이라 해도, 다른 사람과 의논했을 때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다. 나는, 그걸 몰랐다. 아니, 그러니까, 소유진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는 거다. 내가 지금 내 감정에 빠져있는데, '이럴 때 둘이 의논하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어' 라고까지는 잘 생각하지 않게 되니까. 그보다는 '어느 게 그를 위한 걸까' 하고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그를 위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때로는 상대에 대한 지나친 배려가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배려가 배려가 아닐 수 있는 것.
안재욱이 같이 의논하자고 말하는 사람이라서, 둘이 함께 고민하자고 말하는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이런 사람이라면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 조차도 깨닫지 못한 것을, 그러니까 소유진이 되어 혼자 고민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조할 때, '아, 함께 의논하면 더 나은 방법이 나올 수도 있겠구나' 라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웠다. 나 역시 소유진이 되었으므로 몰랐다. 그런데 안재욱이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웠다. 그런 남자의 손이라면 잡고서 함께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안재욱이 같이 의논하자고 말할 때, 몇달 전에 읽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5』의 이 부분이 생각났다.
시오리코 씨가 돌아보며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산너머에 있는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듯이.
"무서웠어요 ‥‥‥. 나도 언젠가 어머니처럼 멀리 떠날지도 모른다, 당신을 홀로 남겨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 때문에 답을 미루기만 했어요 ‥‥‥."
"네? 왜 날 두고 떠난다는 겁니까?"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지만 왜 그런 일로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데리고 떠난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이미 내 마음은 정해져있다.
"네? 다이스케 군도 알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10년 전에 홀연히 떠난 뒤로 얼마 전까지 연락조차 ‥‥‥."
"그게 아니라, 나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녀는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이토록 멍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봤다.
내 말이 그렇게 이상했나? 아니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건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시오리코 씨가 쫓고 싶을 만큼 재밌는 일이라면 나한테도 분명 재밌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어디 있어도 어차피 고서점을 할 거잖아요. 그럼 일손이 필요할 테고, 나도 공부가 되니가 좋고. ‥‥‥ 그럼 안 됩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지만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걱정이 됐다.
"아, 뭐,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놈하고는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 꼭 따라가겠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시오리카 싫지 않으면 ‥‥‥."
순간 시오리코 씨는 지팡이를 짚지 않은 쪽 손을 나에게 뻗었다. 그녀의 손이 내 앞치마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자신도 몸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싫기는요 ‥‥‥. 그럴 리 없잖아요 ‥‥‥." (p.302-304)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엄마를 닮아, 자신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게 될까봐 시오리코씨는 늘 두려웠다. 그것이 걱정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버리면 남겨진 사람이 얼마나 상처받는지, 남겨진 자였던 시오리코씨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래서 다이스케 군을 좋아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불쑥, 자신이 떠나게 되진 않을까, 그를 남겨두고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만약 그녀가 이런 걱정을 끝내 다이스케 군에게 말하지 못했다면, 그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국 그리워만 하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다이스케 군에게 말했고, 다이스케 군은 '나를 떠나지 말아요' 라든가 '안떠나면 되잖아' 라고 말하는 대신, '나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라고 한다.
아...
진짜 저 부분을 읽을 때 놀랐다. 저런 방법이 있다고는 내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같이 갈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몰랐다. 시오리코 씨도 몰랐고. 그래서 울컥했다. 한 사람이 한 두개의 문제 해결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역시 자신만의 문제 해결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그 방법들을 얘기하다보면,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들로 결론지어져서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면 둘이 함께 행복할 수 있고 둘이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혼자 보다 둘이 낫다. 내가 혼자라면 그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그뿐이겠지만, 내가 만약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었다면,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다면, 문제 해결을 둘이 함께 하는 게 온당하다. 또한 그 편이 더 행복할 수 있을 확률이 높다. 나 혼자 문제에 직면하고 나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하지 않아야 더 좋을 것이다. 예전에,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시리즈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었다. '당신의 문제는 내 문제' 라고. 우리가 둘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그렇다면 당신의 문제는 결국 내 문제가 되어 함께 의논해서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어제부터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문득 생각난 것이지만, 너무 사랑을 하고 있어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알고있겠지, 케이트, 당신의 문제는 내 문제이기도 한 거야. 어떤 일이든 도움이 되어 줄게."(엘리자베스 게이지, 터부, 하권, p.286)
둘이면 정말 좋구나.
멋지다, 안재욱, 화이팅!
토요일에 아이가 다섯을 볼 때는 여동생네 가족도 함께였는데, 함께 술을 마시다가 내가 '아 안재욱 너무 좋아' 했더니 남동생이 '큰누나가 좋아할 스타일이지' 했다. 내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큰누나는 골프선수 싫어해. 저런 스타일 딱 싫어하지.' 라며 덧붙였다. '안재욱처럼 조곤조곤하고 예의바른 스타일 좋아하고 골프선수처럼 저렇게 막 제멋대로 하고 예의없는 스타일 싫어해' 라고. 내가 너 나를 진짜 잘아는구나 하고 깔깔대자 남동생은 한마디를 더했다.
"그러면서 사귀는 건 골프선수 사귀지. 자기보다 어린 골프선수."
야!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 라고 부르짖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아.........
어제 엄마랑 길을 걷는데 엄마가 내 엉덩이를 톡톡 쳤다. 그러면서 '이거 성희롱인가?' 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말했다. '엄마가 내 엉덩이를 쳤을 때 내가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엄마한테 사랑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면 성희롱이 아니지' 라고. 그러자 엄마가 '그래? 그러면 더 쳐줄게' 하시더니 내 엉덩이를 더 쳐주셨다.
아이가 다섯에서 안재욱의 엄마는 결혼 생각이 없다는 소유진에게 '그게 무슨 인생의 낭비냐'고 했는데, 이 말이 계속 귀에 맴돈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연애만 하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