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고 사랑하는 사이였다. 결혼은 그들에게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이혼을 원했고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별거중이다. 여자는 남자가 직업에 대한 열의가 없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질 않았다.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의 아빠로는 이 남자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일에서 성공적인데 남자가 그러지 못하고 있는게 싫었다. 그러나 그런 점이 싫었다해도 어쨌든 이들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고 그동안 떨어져 지내 본 적도 없다. 이들은 같은 사람들을 알고 있고 둘만이 할 수 있는 장난과 농담이 있다. 별거중이지만 매일 붙어다니고 별거중이지만 사랑해, 나도, 를 말하면서 익숙하게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나 이 관계는 주변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너희들은 헤어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라고 말한다. 헤어질 준비가 되는 사이도 있나... 여자와 남자는 우리가 절친이라 그런건데, 그게 뭐가 이상해,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게 왔다. 이별의 순간이.
친하게 지내던 별거중인 이 남자가, 자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음을 고백했다. 게다가 그 '다른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했단다. 이에 여자는 충격을 받는다.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상처.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그녀가 겪는 이별의 과정이 나온다.
남자는 그녀에게 '니가 나를 원하지 않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 '너는 우리 사이의 아이를 원한 적도 없었다'고 말한다. 별거중이지만 친하게 지내던 이 남자와 여자가, 각자의 다른 상대를 찾아 헤매이다가, 결국은 아, 내가 올 곳은 여기로구나, 라고 생각하는 그런 내용의 영화일 줄 알고 봤다가, 이것이 결국은 이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서 놀랐다. 이별을 겪어내는 영화라서 당황스러웠다. 아, 이게 내가 그냥 생각하는 이 사람과 이 사람은 어려움을 겪지만 행복하게 오래오래 둘이 잘 살았습니다, 가 아니네?
극중에서 여자도 다른 남자들과 데이트도 해본다. 그 모두가 실망스럽다. 종국엔 괜찮은 남자를 만나 노래방을 갔는데, 그 남자가 노래방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다 여자에게 키스를 하는 순간, 여자는 자신을 직시한다.
나는 이혼하는 중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이걸 극복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서. 다른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혼자서 헤어지는 것을 극복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를 도대체 몇 권이나 샀는지 모르겠다. 두 권씩 가지고 있었는데도 지금 내 책장에 없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리고 내가 이별을 겪고나서 이 책이 너무 많이 생각나서 다시 들춰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 책이 없다. 왜 사람들은 책을 빌려주면 갖다 주질 않지? 다시 사야겠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속편인 [일곱 번째 파도] 에서, 에미는 레오에게 자신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레오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테지만, 그걸 말하지 않는다. 나는 영화속 에서 여자가 새로 만난 남자에게,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있는 남자에게 '이걸 혼자 극복해내야 해요', '난 이혼중이에요' 라고 말한 것이, 에미가 레오에게 이혼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본다. 내가 극복해내야 하는 이 이별이, 당신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나는, 내가 혼자 이걸 극복해서 다시 온전한 나 자신이 된 후에, 그 후에 너를 다시 만나야 한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 도와주는 이별은 조금 더 쉽게 극복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의 이별이니만큼 혼자서 오롯이 극복해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층 단단해져있겠지. 그 과정은 아주 길고 힘들고 고되겠지만, 많이 아프겠지만.
단단해지긴 뭐가 단단해지냐...안 헤어지는 게 답이지.. 누가 단단해지고 싶대......
아래 노래는 영화가 시작되는 처음에 나오는 노래. (동영상 어떻게 올리는거야 제기랄 ㅠㅠ)
https://youtu.be/Yg7XFVbrEFI
금요일에 이 영화를 봤다. 아, 이별을 말하는 영화구나, 했다.
토요일에 이별을 했다. 아, 이별을 말하는 영화를 봐서 나에게 이별이 왔나, 이 영화를 괜히 봤나, 자꾸 후회가 됐다.
일요일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이별 전에 보았을 때와는 아주 많이 다른 것들이 보였다.
이를테면 이별을 겪어나가는 여자의 모습이랄까.
여자는,
술에 떡이 되고, 폭식을 하고, 약을 하고, 엉망이 된 채로 남자를 만나 돌아와달라고 붙잡아보고, 그게 안되자 남자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여자는 하염없이 엉망이 된다.
어제. 남동생이 거실 소파에 앉아 개그프로그램을 보는데 내가 그 옆에 앉았다. 프로그램에서는 뚱뚱한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남동생에게 물었다.
나도 백키로 찍으면 저렇게 턱 살이 출렁이겠지?
남동생은 그렇겠지, 했다. 나는 나를 위해서 뭘 해야 할까. 술에 떡이 되고, 폭식을 하고, 약을 .. 하진 못하겠구나, 내게는 영화에서처럼 약을 구해주는 남자사람 친구가 없으니까... 그래서 하염없이 엉망이 되어, 턱 살을 출렁이게 만들어볼까. 그러고나면 극복이 되어서 더 단단해져있을까. 그러고나면 쏟아지는 햇볕을, 넘치는 봄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고나면 봄이 봄일까. 아니 나는 여름에 백키로를 찍을까. 가을이면 백키로가 완성될까. 의외로 한 달 뒤에 될 수도 있어.
여자는 친한 여자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축사를 하면서 덧붙인다. 서로를 존경하라고,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그게 그녀가 남자와 함께하고난 후에 깨달은 것들이다.
Be patient.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