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저녁을 늦게 먹었다. 전날 먹은 쫄면순두부가 너무 맛있어서 남동생에게 그거 먹으러 가자, 해서는 여덟시에 출발하다보니 다 먹고 식당에서 나온 시간은 아홉시쯤이었다. 나는 대체적으로 큰 길로, 인도로 다니는데 골목길엔 차가 지나다니는 게 싫기도 하고 또 어두울 땐 사람들 별로 없는 것도 싫기 때문이다. 어제는 덩치 큰 남동생과 함께하다보니 부러 내 갈 길을 내가 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얘가 옆에 있으니까, 하고는 남동생이 가자는 길로 갔다. 남동생은 내가 평소에 잘 다니지 않던 길로 데리고갔는데, 주말 밤이어서인지 상점들은 문을 닫아 어두웠고 골목이라 음침한 곳들을 지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잘 다니지 않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으슥해서 아, 여기 혼자서는 이 시간에 못다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남동생에게도 말했다. 야, 내가 너랑 같이 가니까 여길 갈 수 있는 거지 여긴 나 혼자서는 쫄려서 못다니겠다,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남동생 옆에서 걸었다. 남동생 걸음이 좀 빠를라 치면 야, 천천히 걸어, 하면서 같이 걸었고, 너무 무섭게 느껴지는 곳에서는 남동생한테 팔짱도 꼈다. 야, 쫄려 쫄려, 하면서. 이 길을 이렇게 갈 수 있는게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만약 내가 나 혼자 있을 때 뜬금없이 이 길을 선택했다면 울면서 뛰어갔을 것 같은 거다. 여기,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였는데, 여기 이렇게 무서웠었나? 분위기가 어쩜 이렇지? 하고 정말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제 이 길이 이 시간에 무섭다는 걸 아니까 내가 혼자 갈 때는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다. 여튼 엄청 쫄렸다. 휴.. 남동생은 내가 너무 쫄려하니까, 다른 길로 갈 걸 그랬다고, 원래 이 길로 오려던 게 아니었는데 걷다보니 이렇게 됐다고 했다. 정말 무섭고 정말 많이 쪼그라들어있던 나는, 만약 그때 혼자였고 뒤에서 걷는 남자가 있었다면, 정말 너무 큰 두려움으로 머리까지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그만 읽을까'를 몇 번이나 고민했다. 아, 정말 고민했다. 어떤 책들은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런 책인걸까, 하고 초반부터 쪼그라들었다.
그녀는 안개 자욱한 어둠 속에 서 있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누런 안개등 밑을 지날 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어둠과 안개와 혼자 걷는 길을 마뜩잖아 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소리를 내면 안심이 되는지 울퉁불퉁한 인도 위로 힘차게 내딛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길로 당장 그녀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사실은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가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처럼 힘차게 걷지도, 빨리 걷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가 뒤에서 걷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휘청하기라도 한 것처럼 하이힐 소리가 유난히 한 번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속도를 높이지 않고 계속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보폭만 넓혔다.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는 쉽사리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무 일렀다. 둥그런 혹이 솟아 있는 길 중간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간격을 좁히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옆으로 다가가면 그녀는 살짝 비명을 지르거나 헉 하고 숨을 내뱉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부드럽게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한마디일 뿐인데 그녀는 전보다 더 불안해하겠지. (p.9-10)
안개와 어둠으로 이미 불안해있는 여자를 그는 알고있고 또 즐기고 있다. 게다가 어떻게 하면 그녀가 더 불아해할지도 안다. 그녀가 그 곳에서 얼마나 불안했을지를 생각하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 남자, 뭐지? 주인공이잖아? 그런데 밤에 혼자 걷는 여자의 불안을 즐겨? 게다가 더 불안하게 만들려고 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남자주인공인데.. 이걸 계속 읽어야하나? 혼자 걷는 여자에게 더 두려움을 주면서 만족하는 남자인데, 이런 남자가 앞으로 어떤 정의롭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단거지? 이 남자가 뒤에서 무슨 선한 행위를 한다해도 나는 이 하나의 행위만으로 그를 어떤 식으로든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일단 이 행위 하나를 던져놓고 그가 바뀌어가는 걸 보여주려는 걸까? 하아-
그래서 고민했다. 이 두려움이 내게는 끔찍했으므로, 남자의 행동이 너무나 역겨웠으므로 그 다음을 읽는다는 게 망설여졌다. 결국 조금만 더 읽어보고 다시 고민하자, 하고 책장을 넘겼는데, 몇 장 넘기지도 않아서야 왜 저남자가 저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게 됐다. 이해라는 단어는 잘못 선택된 것일 수도 있겠다. 혼자 밤길에 두려워하는 여자를 더 두렵게 만들고 싶어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저 남자는, 주인공임과 동시에, 연쇄살인범 이었다. 이게 처음부터 나온다. 그 자신이 연쇄 살인범임이. 그러자 그가 여자의 두려움에 미소를 짓는 까닭이 수긍되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여자를 더 두렵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를 두렵게 만들어놓고 미소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재미있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자를 한 달에 한 번씩 죽이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그런 남자가 옆 집에 사는 여자 '로렐'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와 단단히 사랑에 빠져 그녀와 늘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래서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다.
그는 샤워를 마치고 문을 열었다. 그 사이 그녀가 빠져나갔으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지만, 거의 욕실 문 바로 앞을 지키고 있었다.
"커피 좀 더 따라가지고 왔어요."
"고마워요. 시끄러울 텐데 면도 좀 해도 될까요?"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p.124-125)
여자의 두려움을 즐기고 한 달에 한 번씩 여자를 죽이는 연쇄살인범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시끄러울텐데 면도 좀 해도 될'지 묻는다. 지극히 사소한, 묻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정도로 지나치게 사소한 것조차 그녀에게 묻는다. 이렇게 예의가 바르며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인데, 로렐로서는 그 당시에 어떻게 이 남자, 내가 지금 막 관계를 맺게 된 남자가 연쇄살인범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로렐 뿐만이 아니다. 다른 세상의 모든 여자들도 마찬가지. 식당에 갈 때 문을 열어주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날 웃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가끔은 토닥토닥 나를 다독여주기도 하는 남자인데, 그런 남자가 사실은 다른 여자들의 두려움을 즐기는 그런 남자라면.. 내 앞에서 너무나 정상적인 행동을 앞에 두고 어떻게 '이남자가 밤에는 다른 여자의 두려움을 즐기는 남자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게 너무나 절망적이다. 게다가 연쇄살인범의 애인이라면, 그녀도 그 살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아닌가. 언제 살해당할지 모를 위험을 안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 딕스 스틸과, 소라넷에 자신의 발가벗은 여자친구 사진을 올려놓고 호응을 바라는 남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나중에 본 게시물 중에는 '내 여친이 소라넷 한다고 하면 되게 싫어해서 사진 찍어 올리기가 힘든데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어서 술 취해 있을 때나 후배위때 찍었다(용어는 내가 자체 순화)'며 올린 사진도 있더라. 진심으로 탐지기 같은 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가 소라넷을 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 있는 탐지기. 머리에서부터 다리까지 쫙 훑어서 소라넷을 한다면 삑- 소리가 나는, 그런 탐지기. 그렇다면 그런 남자와는 연인 관계를 시작하지 않을 수 있을텐데. 저 게시물을 올린 남자를 보니 '여자친구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남자였고, '그럼에도불구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남자였다. 왜 싫어하는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단체-그러나 잘못인지 모르고, 알려들지도 않는-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런 남자였던 거다. 그래서 나는 딕스와 소라넷에 여자친구의 사진을 올리는 남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 책은 1940년대에 쓰여졌는데,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남자들은 별로 달라진 게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로렐에게 도망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서 도망치라고, 그 남자는 연쇄살인범이라고, 여자의 두려움을 즐기는 남자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얼마전에 읽은 '데이비드 버스'의 《이웃집 살인마》 생각도 났다. 그 책에 보면 여자가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가도 어떻게든 찾아내서 죽이는 전연인과 전남편이 등장하지 않던가. 로렐은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도망간다한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러나 역시 《이웃집 살인마》에서는 여자들에게 말했었다. '네 직관을 믿으라'고. 로렐은 그와 함께하면서 그를 두려워한다. 무서워한다. 그녀는 자신의 직관을 믿는다.
남성들이 자신을 버린 배우자를 살해한 반면, 여성들은 살인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될 만큼 심하게 자신을 격리하고 학대하며 위협한 배우자를 살해했다. (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 p.174)
자기 전에 이런 책(고독한 곳에)을 읽는 것은 확실히 도움될 게 없다. 아, 무서운데..하면서 잠들었더니, 아니나다를까 가위에 눌리고 악몽에 시달렸다. 자꾸만 낯선 남자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죽이려고 시도해서 내가 막 소리를 지르는데 소리도 안나오고 그러느라 몇 번이나 깨야했다. ㅠㅠ 그래서 계속 후회했다. 자기전에 이런 책 읽지 말걸, 이럴 줄 알았으면서.. 하고. 그러면서 생각했다. 야한 책 읽을 걸. 야한 책 읽었으면 야한 꿈 꿨을텐데 ㅠㅠ 괜히 무서운 책 읽어가지고 이게 뭐야 ㅠㅠ
야한 책, 야한 영화 추천 받습니다.
아니, 지난주에 너무 야한 영화를 보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을 부탁했더니 다들 아는 바가 없다고 추천을 못해주더라..아놔 이 사람들..그래서 네이버에 '야한 영화' 이렇게 검색어에 넣었는데 사람들이 야하다고 추천한 영화들이 있더라. 어떤 건 제목도 모르는 한국 영화들이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중에 누가 야하다고 추천한 게 [투 문 정션] 이었다. 오, 좋았어! 하고 봤더니 굿 다운로드가 안되는 영화였어...하아- 그래서 유튭에 검색했더니 자막이 없어........
아, 인생..지겨워...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
어쨌든 지금 개봉한 영화 [마담 보바리(소피 바르트 감독)]의 남자 주인공이 '아즈라 밀러' 인걸 보고 급 호기심이 생겨서, 사두고 계속 미뤄왔던 책인 《마담 보바리》를 다음 읽을 책으로 정했다. 우어엇- 기대된다! 다 읽고나서 영화 보고 싶은데, 독서력이 현저히 떨어진 내가 다 읽을 때쯤이면 아마도 상영관에서 내려지지 않았을까... 시무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