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하늘을 걷는 남자》란 영화의 예고편을 보게 됐다. 무역센터빌딩 꼭대기에서 저쪽 빌딩으로 줄을 연결해 그 위를 걷는 남자의 얘기였다. 그러자 어, 이것은 혹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가? 하면서 내가 오래전에 사두고 아직 읽지 않았던 책, '칼럼 매캔'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기전에 책을 먼저 읽어야겠구나, 하고서는 정말이지 오만년만에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이 나와 만날 때가 있는 법이라니깐...

















이 책이 이 영화의 원작인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영화의 소개를 찾아봐도 또 알라딘에서 책을 검색해도 그런 말은 없더라. 흐음. 어쨌든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나는 다시 예고를 찾아 보았다. 예고편에서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줄을 타는 남자에 대해서만 다루더라. 그렇다면 이건 이 책에서 이 남자에 대한 것만 쏙 뺀건가? 아니면 그 부분만 소재로 삼은건가?



《하늘을 걷는 남자》 예고편 



책을 읽을수록 더더욱 영화랑 멀어지는 것 같아 영화정보를 다시 검색했더니, 이 영화속의 줄 타는 남자는 실존 인물이며, 줄을 탔던 것 역시 실화라고 한다. 아, 그렇다면 책에서 이 남자의 소재를 가져다 쓴거고, 영화도 이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가? 그러니까, 이 책은 영화랑 별개인데 같은 사람의 얘기를 하고 있는건가?



이 궁금증은 책을 다 읽고나서 풀렸다. 친절하게도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 다 실려 있었던 것.



1974년 8월 7일, 필리프 프티는 세계무역센터 빌딩들 사이를 줄을 타고 건넜다. 나는 그 줄타기를 이 소설의 소재로 사용했지만 그 밖의 다른 사건들과 인물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나는 필리프 프티의 줄타기를 상당 부분 내 자의적으로 바꾸었으나, 그 순간과 그 환경의 질감만은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p.591, 작가의 말)




100자평으로도 썼지만, 세상은 돌고 돌고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어떤 인연으로 얽히게 될지 모른다. 소설속의 재슬린의 말처럼, '우리가 처음에 알던 사람은 우리가 마지막에 아는 사람이 아니다.' (p.587)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 친구와 그런 얘기를 했었다. 어릴 때 단짝친구가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고, 우리는 앞으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거라는. 몇 년전에 내가 가장 친했던 친구와 나는 소원해졌고, 그럴 줄 몰랐던 친구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러니 지금 친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어느틈에 서서히 멀어질 수 있을 것이고, 또 그자리에 나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을 채우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속에서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다.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절망하지만, 다른 식의 인연이 그 옆자리를 대신한다. 대신 들어온 사람이 그전의 사람과 같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다른 식의 만남과 행복을 삶에 채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재즈가 사라지고 남은 아이들은 글로리아를 만나 아름답게 성장했다. 글로리아를 만난 아이들을 보며 틸리는 이제 재즈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한다. 재슬린은 비행기를 타려다가 근사한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고, 그리고 클레어와 이별할 준비를 한다. 코리건은 갔지만, 코리건과의 이별에 결정적 역할을 한 라라가 이제 키아란의 옆에 있다. 휘청거리는 라라였지만 이제는 자기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가야할 곳이, 만나야 할 사람이,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는지도 모른다. 결정적 사건이 우리를 다른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이 우리를 여기에, 지금 이 자리에 데려다놓은 것일런지도 모른다. 자, 이제 네 인생의 이 시점에서, 너는 이 사람을 만나야 해. 그리고 그 사람은 네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게 해줄 수 있을거야. 



우리는 누군가와 잡은 손을 놓을 때가 오지만, 또 누군가가 와서 그 손을 다시 잡아주기도 한다. 어느 여름밤에 잠이 든 순간에도 내 손을 쥐고 놓지 않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던 느낌.



어떤 사람들은 살며시 내 손을 놓을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살며시 내 손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여전히 내 손을 단단히 쥐고 있을 수도 있다. 내 손을 놓은 사람은 자신의 갈 길을 가서 자신의 삶을 살다가 또 어떤 식으로 어딘가에서 나와 마주치게 될런지도 모른다. 세상은 돌고 도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재슬린이 해줘서 고마웠다. 재슬린이 해주면서 키아란과 라라를 만나게 해주어 고마웠다. 그리고 재슬린에게 글로리아와 클레어가 있었단 사실이 고마웠다, 라고 쓰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돈다.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토록 슬픈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났었고, 그 아픔은 결코 극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겠지만, 그들을 버티게 하기 위해 새로운 누군가가 그들의 손을 잡았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책이다.



참고로, 하늘을 걷는 남자의 실제모델인 '필리페 페티'는 《맨 온 와이어》란 영화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하기도 했다. 몇 해전 이 영화의 예고를 보고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또 만나게 되는구나. 역시, 세상은 돌고 돈다. 내가 어딘가에서 누구를 어떤식으로 만나게 될지, 또 '다시' 만나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맨 온 와이어》 트레일러 





"난 그냥 갑자기 멈춰 섰어요. 완전히 길거리 한가운데서 말이에요. 청소차에 치일 뻔했답니다. 근데 난 그냥 거기 서 있었어요, 손을 무릎에 대고, 시선은 따응로 향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이에요. 왜 그랬는지 알아요? 왜 그랬는지 말할게요."

다시 말을 멈춘다.

그들 모두 앞으로 몸을 기울인다.

"왜냐면, 그 불쌍한 아이가 떨어졌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네." 글로리아가 말했다.

"난 그저 그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요, 네."

글로리아의 목소리, 마치 에배에 참석한 것 같았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벽난로 위 시계는 째깍째깍 가고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럼요, 그렇죠."

"그리고 만일 그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떨어지지 않았어요?"

"알고 싶지 않았어요."

"네, 알 것 같아요."

"왜냐면, 어찌어찌 그곳에 머물렀고, 또 안전하게 내려왔다면,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멈춰 서서 발길을 돌려 지하철을 타고 이리로 올라 온 거예요. 두 번 다시 눈길도 돌리지 않고 말이에요."

"할렐루야."

"만약 살아 있다면 마이크 주니어일 리 없으니까요." (p.171-172) 

그녀는 다시 길게 한 모금 담배를 빤 후 연기가 폐 안에 머무르게 한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슬픔에는 담배가 좋다고 한다. 길고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면 어떻게 우는 건지 잊게 된다. 몸이 그 독과 대응하느라 너무 바쁜 때문이다. 군인들에게 공짜로 나눠 주는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럭키 스트라이크. (p.142)

전쟁은 무의미한 겁니다, 아이가 말했다. 더 이상 거울을 들여다볼 수 없는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내보내 죽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헛됨을 한데 모으는 일이다. 그들은 단순하게 만들고자 한다. 적을 증오하라, 적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마라.(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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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0-20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방에서 망각에 대한 짧은 소견을 나눈 차에 누군가 떠난 자리를 또 새인연들이 채우고 그런 삶이 삶이지...마냥 아파만 하는 건 스스로의 삶에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걸거란 생각을 이젠 합니다.
망각도 숙제마냥 부지런히 비우고 채우는 술잔 같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다락방 2015-10-21 08:35   좋아요 1 | URL
소중한 누군가와 잡았던 손을 놓게 된다는 건 정말 슬픈일이지만, 마냥 슬퍼만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 슬픔을 가슴에 묻은채 또 새로 누군가 내미는 손을 잡아야겠지요. 누군가에게 내가 손을 내밀어도 좋을테고요.

살리미 2015-10-20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기다리고 있어요^^ 조토끼씨가 출연하잖아요 ㅎㅎ
이렇게 인연이 되어 잊었던 책도 만나고, 제가 기다리고 있던 영화 얘기도 듣게 되고! 역시 어떤 인연으로 얽히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건가봐요^^

다락방 2015-10-21 08:35   좋아요 1 | URL
네, 조토끼! ㅎㅎ
이 책은 읽어보셨어요, 오로라님? 이 책 좋더라고요. 영화를 보고싶어서 책을 본거였는데, 책 보길 잘했다 싶어요. 헷. 그러니까 진짜 타이밍인것 같아요. 이 책을 산 시점은 몇 년 전이지만 읽는 때는 이렇듯 지금이었어요. 흣.

단발머리 2015-10-21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나고 헤어지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 너무 공감되요.
주말 만남에 대해 짧은 글을 써놓았는데, 다락방님이랑 같은 걸 말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 글이 더 좋았어요.
나랑 같은 마음이라서요. *^^*

2015-10-21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1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