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17세의 아이가 백혈병에 걸려 당장 수혈을 받지 않으면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아이와 아이의 부모는 수혈을 거부한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상의 이유로. 자신들이 믿는 종교 안에서 수혈은 타락을 의미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이 그들이 선택한 일. 이에 병원에서는 소송을 건다. 아이에게 수혈을 해줄 수 있게 해달라고. 수혈을 하면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만약 내가 이 얘기를 뉴스나 인터넷에서 들었다거나 혹은 지인에게 전해 들었다면, '아 그 종교인들은 왜그리 어리석단 말인가, 사람을 살려야 할 게 아닌가' 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도 결국 이언 매큐언이 말하고자 하는건, 그 종교가 어리석다, 사람을 살리고 봐야한다, 라는 것일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걸 이언 매큐언도 당연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 그 당연함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거다. 그러나 오, 나는 얼마나 내가 믿는 것을 정의라 확신했던가. 책을 읽으면서 내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걸 보고, 아, 내가 너무 나의 정의에 갇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 종교를 믿고 있다면, 그 신앙 혹은 믿음 속에서 자신이 믿고자 하는 바를 따르려고 하는 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몫이 아닌가. 그것이 자신의 삶과 혹은 죽음에 관한 것이라도 그것이 그 사람이 현재 속한 종교, 절대적이라 믿는 종교 안에서 자신의 선택이라면, 그것을 법이나 혹은 그 종교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 강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책을 읽으면서 하게 됐다. 이 책의 주인공인 '피오나'는 판사이고, 이 사건을 맡게 됐다. 아이에게 얼마나 수혈이 중요한지에 대한 병원의 입장을 듣고 또 자신들이 믿는 신앙 앞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아는 아이들의 부모의 입장도 듣고, 피오나는 일단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뒤에 판결을 하겠다고 말한다. 아이가 정말 '강압적'인 것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수혈 거부를 결정한 것인지, 그것을 이야기를 나눠보고 알고자 한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결정을 인지할 수 있는, 그런 아이인지를. 법원은 그리고 법은, 종교에 대해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판단을, 법원에서는 할 수 없는 거라고 한다. 그렇게 피오나는 아이가 입원한 병실을 재판 도중에 찾는다. 나도, 그리고 아이도, 피오나가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수혈을 거부한 결정을 바꾸기 위해서 병원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을 바꾸려고 오신 거예요? 제 생각을 바로잡으려고요?" (p.142)
피오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말해줄게, 애덤. 난 네가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확인하고 싶단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결정을 하기엔 네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 부모님이나 장로들이 영향을 준다고도 생각하지.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네가 굉장히 영리하고 능력이 뛰어나니까 너한테 결정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 (p.143)
피오나가 아이와의 인상적인 면담을 마친 뒤로, 나는 피오나가 어떤 판결을 내리게 될지 궁금했다. 그리고 피오나가 내리는 판결까지 읽으면서, 아, 역시 이언 매큐언 이구나, 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 이런 것이 좋은 책이로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했다.
이것이 좋은 책이기에 나는 내가 가진 생각을 반드시 정의라고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종교와 법 혹은 종교와 삶에 있어서 나는 '관찰자'의 입장으로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지만, 그건 또 그 종교안에서의 그들의 선택과 삶의 문제가 아니던가. 내가 누군가를 어리석다고 말하는 건 순전히 내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닌가. 수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죽음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혀를 쯧쯧해대는 것이,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들은 그들 나름의 생각과 믿음을 기준으로 선택한건데. 이 판결은 얼마나 어려울 것이며, 어떻게 해야 공정할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나는 이 책을 읽기전보다 확실히 생각이 더 많아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유연해진 것 같다고. 결국 좋은 책이 하는 역할이란 그런 게 아닐까. 내가 가진 생각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리하여 책을 읽기전보다 나를 더 유연하게 만드는 일.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해준 책이라니,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독서라는 행위가 굉장히 고맙게 느껴지는 거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다뤄준 이언 매큐언을 자꾸 생각하게 됐다. 속으로 몇 번이나 아, 이언 매큐언! 한 것이다.
피오나가 더 나은 것, 더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계속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 무릇 판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면, 그렇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옳은 것일테니까. 그런 한편, 아, 나는 판사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내리는 결정들이 과연 옳다고 내 스스로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과연 그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것도 의심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피오나처럼 현명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는 거다. 피오나는 백혈병 걸린 아이에 대한 판결을 내렸고, 나는 그 판결에 수긍하며 또한 감탄했다. 그 결론을 내기까지 피오나가 그렇게 결정하기로 한 이유를 읊었을 때, 아,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유인데 내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고 자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언 매큐언은 작가이고 피오나는 판사이며, 나는 여기에서 독자로 남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이 책의 3분의 2정도에 해당한다. 나머지 3분의 1을 어떤 이야기로 진행하려는지 몹시 궁금했던 나는, 이만큼만으로도 일단 이언 매큐언의 이름을 몇 번이나 생각했으니, 이만큼만으로도 내 생각이 조금 더 유연해진 것 같으니, 이만큼만으로도 이 책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책이다, 했으니, 그걸로 이 책의 본론은 다 끝난 게 아닐까 했다. 그러니까 남은 건 그저 뒷이야기 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물론, 나머지 부분이 뒷이야기인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 뒷이야기는 내가 생각하는 '흘러가야 할 대로 흘러가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고, 결국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이언 매큐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이렇게.
아! 이언 매큐언, 이 아저씨야!!
그래서 그랬구나, 처음에 피오나의 부부 이야기를 한 것, 오래 함께한 부부의 이야기를 한 것. 이 모두가 그래서 그랬구나. 이것은 단순히 종교와 삶 종교와 법에 대한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맹목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오래된 관계의 신의를 이야기하고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책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 이언 매큐언 이 아저씨야,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하지는 말아주지 그랬어, 하는 생각도 당연히 들었다. 어떤 것들은 받아들이는 데 조금 더 힘들기도 하니까. 그렇다고해서 그게 나빠서가 아니었다. 역시 이언 매큐언은 '세다'는 생각을 해서였다. 역시 이 아저씨는 센 이야기를 하는구나.
최근에 독서에 좀 심드렁해졌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독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졌다. 몇 번이고 아, 이런 책이 좋구나, 했으니까. 그걸 이언 매큐언 아저씨가 해줬다. 좋은 소설가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같다. 생각에 유연성을 더해주는 일을, 좋은 소설가들이 하고 있는 것 같다. 3분의 2를 지난 시점에서부터의 아이의 선택과, 피오나의 멈칫함, 그리고 오래된 남편의 옆에 있어주는 모습 같은 것들이 마음에 남는다. 오래 남는다. 오래 남아 자꾸 생각난다.
신체 각부가 적절한 형태로 제자리에 달려 세상에 나온다는 것, 잔인하지 않은 깊은 애정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난다는 것, 혹은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인 우연으로 전쟁이나 빈곤을 모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연한 행운이었다. 그리하여 선한 사람이 되기가 훨씬 쉽다는 것도. (p.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