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장점을 보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단점을 보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라는 구절을 청소년기 시절에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처음에 그녀는 아름다웠어요, 그 다음엔 결점이 보였죠. 그리고 아름다움과 결점이 모두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익숙해지게 된거죠."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게 없는채로,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채로, 순전히 섹스만을 위해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 만난 날부터 호텔을 잡아두고는 섹스를 한다. 늘 만나던 까페에서 목요일에 만나고 호텔로 들어가고 호텔에서 나와서는 각자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두번째 만남과 섹스 후였던가, 남자는 '술이나 한잔 할까요?' 라고 헤어지기 전에 제안한다. 그들은 그날 저녁을 함께 먹는데, 그 순간 여자는 굉장히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다. 보통 남자와 여자의 저녁 식사 자리라면 상대를 유혹해야 하고 섹스로 이끌어야 되는데, 우리는 이미 그것을 끝내고 왔으므로. 그래서 되게 편하다고. 그리고 이후의 그들의 섹스는 그전과 바뀌게 된다. 여자는 그걸 '사랑의 행위'라고 표현한다. 말에 실린 힘 때문일까, 아니면 감정을 인지했기 때문에 말한 걸까.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다.


만남이 지속되는 내내 그들이 사이 좋고 웃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여자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혼란스러워 울며 집에 가기도 했고, 어떤 날은 남자가 주차가 힘들어 화를 내기도 했다. 물론 이런 눈물과 분노 안에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들어있다. 화가 난 채로 헤어지다가 남자는 여자가 눈 앞에서 사라지고나서야, 그녀가 만약 다음 만남에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녀의 연락처도 모르므로 그녀를 잃게된다는 생각에 휩싸여 두려워진다. 그래서 그녀가 가는 길로 그녀를 잡기 위해 가보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놓쳐버리고난 후다. 그래서 그 후의 만남에서 그는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사실 나는 에로틱한 영화를 보고 싶었고, 이 영화는 그런 때에 추천 받아 이제 보게 된 영화다. [포르노그라픽 어페어]란 제목과는 다르게 또 영화의 시작에서 여자가 몇 번이나 '포르노'라고 언급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야하거나 하지 않다. 어른들이 볼만한 19금 영화를 기대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보기 좋게 뒤통수 맞는다. 둘이 같이 호텔에 들어가는 장면은 여러차례 나오지만, 그 방까지 따라가지 않는다. 어쩌다 방에 따라갈라치면 여자는 침대 시트를 뒤집어 쓴다. 서로의 벌거벗은 육체도, 그리고 벌거벗은 육체로 끌어안고 움직이는 장면도 이 영화에서는 많이 보여지지 않는다. 거의 안보여진다. 그렇지만,



좋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남자가 '이대로 여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마구 그녀를 좇아 달려갈 때, 그때 갑자기 나 역시 생각에 빠지게 된다. 연락처를 모른다면, 그런데 이대로 헤어진다면, 그렇다면 그 후의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 더 두려운 건 이것이었다. 나와 그는 사랑하고 있다. 나와 그는 서로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어느날 갑자기 뿅-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그에게 그 소식을 누가 전할 수 있을까. 남자와 여자는 호텔에 여느때처럼 들어갔다가, 갑자기 쓰러진 한 할아버지를 구해주게 된다. 응급차가 오고, 응급실에서는 할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져 신분증을 꺼내고 그의 아내에게 연락한다. 만약 내가 쓰러진다면, 혹은 그가 쓰러진다면,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우리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채로 지내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어느 한 쪽은 상대의 연락을 받지도 못한 채 갑자기 단절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도대체 왜 그와 연락이 닿지 않을까, 하며 발을 동동 구르게 되지 않을까.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혹은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텐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내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그러니까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알려주세요, 라는 걸 표현하기 위해 결혼을 하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호텔 바닥에 쓰러진 노인을 보고 나는 했다.


이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보니, 일전에 읽은 '전경린'의 소설 속 문장이 떠올랐다. 



어느 날,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말이에요. 당신이나 내가 세상과 작별했다면, 우리, 흘러다니는 소문으로 그 소식을 알리지 말아요. 예의를 갖춘 정식 부고를 주고받고 싶어요. 별세의 날이 다가올 즈음 비밀스러운 주소 하나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그 정도 부탁은 가족에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간 뒤에 말이에요. 우리가 낙엽처럼 가벼워져서 한 걸음으로 훌쩍 공기 속으로 넘어가게 될 때요. (전경린, 「백합과 공룡의 벼랑길」p.35) 


















가슴이 저릿하다.



영화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성격이 '낭만적' 이라고 말한다. 나는 남자가 자신의 성격을 낭만적이라고 드러내는 게 그렇게나 보기 좋더라. 여하튼 그래서 남자는 맨처음, 여자가 낸 광고를 보았던 잡지를 비닐로 싸서 잘 보관해 놓았다. 여자는 자신이 막 이십대가 되던무렵, 털 많은 남자와 사귀는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연애를 하게 된 남자들이 다 털이 없어서 실망했노라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머리카락이 검은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게 되서 털이 많겠구나 기대했는데 역시나 털이 없어서 싫어졌다고. 그러면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털이 많아요?


남자는 처음에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여자가 뭐, 괜찮아요, 라고 답하자 털이 많다고 답한다. 그런데 이건 물어보지 않아도 너무 알 수 있는게, 이 남자는 무슨 목까지 털이 나있어...이걸 굳이 물어봐야 아나. 그냥 딱 봐도 보이는구먼.




여자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그남자는 여전히 멋지다'고 말하는데, 음, 역시 제 눈에 안경이군 싶었다. 영화는 여자와 남자를 각각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는데, 여자가 대답하기 힘든 질문 앞에서 갑자기 벌컥 와인을 마시던 순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도 너무 와인 마시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당장 집에 가서 와인 따고 싶어! 남자와 여자가 호텔에 가기전 까페에서 만났을 때에도, 남자는 가볍게 꼬냑 한 잔, 이라던가 와인 한 잔, 을 주문한다. 아, 나도 당장 뛰쳐나가서 아무 레스토랑이나 들어가서 와인 한 잔, 이라고 주문하고 싶다. 이제는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으니 '많이 주세요' 같은 거는 하지 말고 참아야지 ㅠㅠ



덕분에 남자랑 와인 마시던 거 막 추억하고 그랬다. 이랬었지, 저랬었지, 하면서. 하아- 좋은 영화는 이렇다. 사람을 멜랑콜리하게 만들어..자꾸 막 추억 되새김질시켜...ㅠㅠ



영화의 마지막까지 보고나면, 마음이 참 싸-해지는 게, 상대의 마음을 내가 짐작하지는 말자는 생각이 든다. 상대의 마음을 내가 짐작해서, 그 짐작으로 상대를 배려하지 말자. 내 짐작은 틀릴 수 있다. 내 짐작이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상대의 마음을 짐작해서 배려하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에 더 가까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닥친 슬픈 엔딩이, 우리의 실수였다면, 상대의 마음을 '잘못'짐작해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걸 대체 어떻게 수습할거야. 상대의 마음을 배려한답시고 슬픈 엔딩속으로 걸어가지말고, 내 마음을 솔직히 고백해서 해피엔딩으로 걸어가자. 



가슴 한 켠이 싸-해지는 영화다. 다른 표현을 뭐 생각할 수가 없네. 오늘은 집에 가면 와인이나 한 잔 마셔야겠다. 안주는 뭘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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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5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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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8-05 16:42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았어요. 잘봤어요. 고맙습니다. 꾸벅. (--)(__)

2015-08-05 1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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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6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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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5-08-0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 한 잔 드셨어요? 안주는 뭘로?
저도 자기 전에 한 잔 할까 생각 중입니다.
일단 애들을 먼저 재워놓고요.

다락방 2015-08-06 09:36   좋아요 0 | URL
와인 대신 소주를 마셨습니다. 갈비찜이 안주였어요. 궁중갈비찜. 으흐흐흐흣
어떻게, 한 잔 하셨나요? 안주는 간단히 드셨나요? 뭘 드셨어요?

왜 술마시는 다른 사람들의 안주가 궁금할까요? ㅋㅋㅋ

감은빛 2015-08-06 23:45   좋아요 0 | URL
휴가 때 고향 집에서 어머니께서 담근 포도주를 한 병 얻어왔어요.
어제 애들을 재우고 나니 시간이 새벽 1시가 다 되었길래,
간단히 포도주에 얼음을 띄우고,
계란 프라이 안주로 한잔 마시고 잤어요.

궁중갈비찜이라니! 그냥 갈비찜과는 뭔가 다른건가요?
맛있었겠어요! ^^

LAYLA 2015-08-0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마시러 갑니다..술을 부르는 페이퍼!

다락방 2015-08-06 09:38   좋아요 0 | URL
꺅 >.<
안주는요? 안주는 뭐 드셨어요 라일라님? 술은 어떤 거 드셨습니까!!!!!!!!!!!!! 건배를 외쳐요, 우리!!

moonnight 2015-08-0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보고 싶어요. 와인을 부르는 영화@_@;

2015-08-07 0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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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0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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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08: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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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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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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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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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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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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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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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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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8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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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8-10 08:53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거였어요? 전 몰랐어요. ㅎㅎ
전 이번 주 수요일부터 휴가에요! >.<

2015-10-09 18: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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