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여기서 못 살겠어서' (p.10) 책 속의 주인공 '계나'는 가족들을 두고 호주로 이민을 간다. 6년간 사귄 남자친구랑도 헤어지고 호주로 간다. 호주로 갔다가 잠깐 한국으로 여행와서 두달간 남자친구랑 함께 지내고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하지만, 여자는 다시 호주로 떠난다. 남자친구와 오랜 시간을 사귀었고 그래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마음 속에 많지만, 고맙고 미안해서 결혼할 순 없는거니까.
지명은 고개를 숙인 채 내 얘기를 들었어.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내가 오히려 묻고 싶었지.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거야? 나 따위가 뭐라고 나한테 평생을 걸어? 너무 고맙고 미안했어. 하지만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유로 내가 네 옆에 있을 수는 없어‥‥‥. (p.161)
고맙고 미안하단 이유로 당신 옆에 있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나는 누군가가 고맙고 미안하단 마음으로 내 옆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유로 내가 네 옆에 있을 수는 없어, 라는 계나의 생각이 그대로 와닿더라. 고맙고 미안해서가 아니라, 네 옆에 있고 싶어서 네 옆에 있길 원한다. 마찬가지로 내 옆에 있기를 원한다면 그 마음이 '내 옆에 있고 싶어서'이길 바란다.
지명은 잠이 들어 있더라. 침대 위에서, 옷을 벗은 채로. 아기 같은 자세였어. 나는 잠옷을 입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침대에 앉았어. 조심조심 개한테 이불을 덮어 준 뒤에 옆에 앉아 맥주를 마셨지. 걔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아주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잠에서 깨어나면 얘는 나에 대한 의무감으로 섹스를 하려 들 거야. 그러면 나 역시 의무감으로 걔를 맞이하겠지. 서로 연기 아닌 연기를 해야겠지. 그런 섹스, 너무 슬프지 않니.
걔 얼굴이 과로와 수면 부족 탓에 검고 거칠거칠했어. 입주변이랑 턱에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올라와 있더라. 이불을 덮기 전에 본 배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어. 얘가 아저씨가 됐네, 하고 정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더 짠하고 아프고 그렇더라고. 얘 이렇게 일하다 암 걸리는 거 아닌가 싶고, 내가 이 모습을 10년이고 20년이고 보다가, 그냥 얘는 매일 이렇게 열몇 시간씩 일하는 애다,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고‥‥‥. 막 눈물이 날 것 같았어. (p.156)
'로지 헌팅턴 휘틀리'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놓고 들여다보는데, 최근에는 속옷 화보 사진이 많이 올라왔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디자인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더라. '막스앤스펜서' 속옷 화보였다. 나는 왜 그녀가 속옷 디자이너도 겸한다고 생각했지? 뭣때문이지? 왜지? 암튼 그녀는 디자이너는 아니고 모델인듯. 어쨌든 그걸 들여다보는데, 정말 예쁜 거다.
그러자 다이어트의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지금보다 훨씬 건강한 몸이 되어,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입을 예쁜 속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속옷을 건강한 육체에 걸치면 아름다움은 극에 달하겠지. 그래, 막강 다이어트야! 스파르타식 다이어트에 돌입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뉴스를 들으니 참..욕밖에 안나오더라. [한국이 싫어서]의 지명처럼 저렇게 열시간 이상 근무하며 피곤에 쩔어 지내면 뭐하나. 이 나라는 국민을 죽이고 있는데. 그러자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족발을 포장해오고 와인을 꺼내들었다. 잔에다 콸콸콸 와인을 가득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상추와 깻잎을 포개어 새우젓을 푹- 찍은 족발을 올려놓고는 남동생이 썰어둔 마늘과 고추를 얹어 한 입 가득 쑤셔넣었다. 마구 씹었다. 맛있었다. 아..맛있어..족발 콜라겐은 짱이야 ♡ 와인을 삼키며 족발을 맛있게 먹다가, 뉴스를 들으며 또 빡이 쳐서 욕하다가...아, 이 나라는 진짜 나의 다이어트에 겁나 방해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못끊게 해. 술 없이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뉴스들을 내보낸다. 나는 이 나라를 떠나는대신 이 나라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도록 하고싶은데, 그게 가능할지나 모르겠다. 이미 늪에 빠져버린 건 아닌지... 하아- 자꾸만 깊게 빠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오늘 아침 또 로지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아, 어제도 망했어, 이 나라 때문에 내 다이어트 망했어, 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육체, 예쁜 속옷은...내게 정말 꿈에서나 일어날 일인가. 다음 생애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주말에는 영화 [차일드44]를 봤다. 책을 무척 좋게 봤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기대도 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느 부분에 감동했었는지를 기억했다. 정부를 위해 일하며 정부의 말에 무조건 복종했던 레오가 '설마..이게 아닌건가?'라는 의심을 갖기 시작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이 그것이었고, 그런 그가 연쇄살인범을 잡고자 할 때 그를 도와주려는 알지도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레오의 성장은 약간 드러났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도와주는 장면은 죄다 없앴더라. 게다가 범죄자가 왜 범죄를 저지르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아예 설정을 바꿔버렸다. 영화는, 그저그랬다.
이 영화 니가 좋아할 것 같아, 라며 예고편 영상을 받은 [리틀 포레스트]도 보았다. 보내준 예고편을 틀자마자 일본 영화라서, 으음, 나는 일본 영화는 별론데, 라고 생각하고 예고편을 보는데, 오!! 이건 자급자족 라이프!! 요리하는 장면들이 나오고 그 요리들이 꽤나 깔끔하다. 그래서 당장 굿 다운로드 받아서 보았다.
영화는 요란한 내용도 없고 어떤 사건도 없다. 그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혼자 사는 여자가 농사를 짓고 밥 해먹고 간식을 만들어 벅는 소소한 모습을 보여준다. 요리를 하는 모습, 또한 그녀가 만들어둔 요리까지 '정갈하다'는 단어가 적합하겠다. 여름에는 땡볕에 나가 농사를 짓고 오니 땀이 뻘뻘난다. 그런 그녀가 식혜를 만들어먹고, 빵을 구워먹고, 잼을 만들어 먹는다. 이것은 마치 영상으로 보는 킨포크 테이블 같았다.
묵묵하게 자신이 먹을 밥을 자신이 준비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보기에 좋다. 게다가 혼자 정갈하게 밥상을 차려두고서는 그녀는 매번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잘먹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밤이 되면 온갖 곤충들이 날아들어 문에 붙고, 산에 가면 곰을 조심해야 하는 이 시골마을에서,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서로 만든 것을 나누어 먹는다. 한 번은 '밤조림'이 어쩐일인지 유행하게 됐는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밤조림을 만들어서는 마실와서 나누어 먹는다. 더운 여름, 여자도 식헤를 차갑게 만들어서는 마을에 사는 청년에게 전화한다. 와서 식혜를 먹으라고.
깜깜한 밤에 전화를 받고 여자의 집에 찾아온 남자는, 정말, 식혜를 먹는다. 그게 전부인 장면.
굉장히 담백하다. 한밤중에 둘이 식혜를 마시는 이 장면에서 친구는 '다른 걸'기대했었다고 했는데, 다른 걸 기대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더란다. 그렇지만 나도 혹여나 다른 걸(?) 기대했는 걸. 한 마을에 살면서 같이 일을 할 때도 있고 또 서로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기도 하는데, 한국이 싫어서 떠나게 된다면 이런 곳으로 떠나야 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산수유를 따고 밤을 줍고 고구마를 말릴 수 있는 이 멀고도 조용한 시골.
여자는 어릴때부터 이곳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날아드는 온갖 곤충들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이 한적한 집에서 혼자 밤에 잠드는 것에 대해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때는 자기가 먹을 도시락도 정성스레 준비하는데, 이런 장면들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까도 친구와 긴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로지를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얘기했었다. 로지 헌팅턴 휘틀리에게 관심을 갖게된 건 사실 제이슨 스타뎀 때문이었지만, 그 뒤로는 그녀가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에, 열심히 운동을 하며 자신을 가꿔가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그녀는 제이슨 스타뎀과 오랜 연인이고, 그것이 내게는 무척 좋게 느껴지지만, 만약 그녀에게 제이슨 스타뎀이란 애인이 없었어도 혼자서 충분히 강한 여자일테고, 나는 그 점이 좋다. 안젤리나 졸리를 좋아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누구의 애인이기 이전에 그녀 혼자 일단 강한 사람인거다. 혼자 스스로 강한 사람이 또 혼자 스스로 강한 사람을 알아보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차곡차곡 자신이 할 일을 해가면서, 자신의 먹을 거리는 자신이 준비해가면서, 자신의 건강 역시 자신이 챙겨가면서 혼자서 충분히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내게는 근사하게 느껴지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자 희망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런 모습이기를 원한다.
오늘 출근길에 양재역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오다가 화장품가게 앞을 지나는데 염색약 광고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색이 예쁘더라. 아, 나도 꼭 저색으로 머리 염색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사진출처는 사진 내의 블로그 주소)
한듯 안한듯한 갈색머리 말고 와인색 말고, 검정색 말고, 저렇게 눈에 확 띄는 노랑색으로 나도 하고 싶은데!! 주말에 할까? 하고 잠깐동안 멈춰 광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아-. 답은 '안된다' 였다. '하지말자'가 아니라 '안된다'. 내가 만약 지금 속한 이 부서가 아니라 다른 부서였다면 나는 기꺼이 염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운 부서에 있지 못하고, 내가 맡은 보직은... 이걸 허락할 수 없는.... 아아- 더 말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어렵게 다시 걸음을 사무실 쪽으로 옮기는데, 아, 하고싶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염색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니 단 하나의 답이 나왔다. 그 답은 바로,
회사를 관두는 것.
회사를 관두면 된다. 회사를 관두면 내가 노랑색으로 염색해도 된다. 지금 이 자리만 아니라면 내가 노랑색으로 염색해도 아무도 나를 터치할 수 없어! 나의 염색 자유를 제약하고 나를 구속하는 유일한 한가지가 바로 이 자리였다. 아아,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어쩌다 여기로 흘러오게 되었나.
어쨌거나 대학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하게 돼 한숨 돌렸지. 거기 아니라 다른 데 붙었더라도 아무 데나 갔을 거 같아. 그러면 또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지. 나의 장기적인 커리어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냥 백수가 되지 않고 다달이 월급을 받는 게 중요했어. (p.17-18)
나도 그랬다. 나도 이 회사, 이 부서에 올 생각 같은건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전공을 살려서 이걸 해보자, 하는 생각 같은 것도 없었고, 이런 업종에 종사하고 싶다, 하는 것도 없었다. 내가 가진 꿈이라고는 타임지 표지모델을 할 수 있는 책을 한 권 써내는 것 뿐이었다. 회사를 선택하는 나의 기준도 까다롭지 않았다. 그냥 여기 왔다. 전직장을 관두고 백수로 잠깐동안 있으면서, 당시에 대학생이던 여동생의 수업에 따라 그냥 들어간 적이 있다. 원서로 진행되는 생물학 수업이었는데, 여동생은 교수 수업 듣기도 벅차니 옆에 앉아 필기라도 해다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 기꺼이 해줄게! 라며 뭔 말인지 모르면서 교수가 칠판에 쓰는 대로 여동생 책에다 부지런히 옮겨 적었다. 그러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나오는데 전화가 왔고, 그 회사가 이 회사였다. 면접 보러 오라고..그래서 면접을 봤고, 나는 면접만 봤다하면 최강 매력 캐릭터라 붙을 수 밖에 없으므로, 붙었고, 그래서 다니게 되었는데, 다니다가 또 최강매력캐릭터가 뿜어져나와 지금의 부서로 스카웃되었...다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여튼 그런데 지금 이 부서에서의 나는 염색을 해서는 '절대' 안되는 거다. 아, 노랗게, 샛노랗게 물들이고 싶다!!!!!
회사를 그만두고 염색하자!
했다가 현실 감각이 금세 돌아온다.
그래서 이렇게 바꿨다.
회사를 그만두면, 그때 염색하자.
회사가 싫어서 떠나고 싶고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다.
야, 나랑 바다로 놀러갈래? 라고 남동생한테 문자 보냈는데, 이새끼는 답이 없다...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