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이 책은 놀랍다. 우리는 어린 시절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배우지만, 살아가면서 사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 자주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선 그걸 말해준다. 어설프게 정의가 승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의가 승리하는 건 모두가 바라는 바지만, 그러나 어디 그게 쉽던가. 정의는 빈번하게 불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착한 사람도 늘상 벌을 받고 살고, 그 누구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사람도 고통에 노출될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부유하게 잘 살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서늘한 이야기를, 맙소사, 이 작가 '카트린 아를레'는 고작 자신의 나이 '스무 살'에 해낸다. 스무 살에 이런 소설을 쓰다니, 맙소사. 이 세상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나는 이 나이에도 쓰지 못한 것을 누군가는 스무 살에 쓰는 거지? 왜? 하아-
지난 금요일에는 가수 '심규선'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녀의 노래들을 듣다가, 또 노래 사이사이 그녀의 말들을 듣다가, 아, 그녀는 확실히 '내 과'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아주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그걸 노래로 만들어내는 것을 천직이라 여겼다. 천직이라 여기기까지는 물론 많은 갈등을 했다고 했다. 내가 계속 노래할 것인가, 노래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하고.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구나.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들을 써내고 만들어냈고, 자신이 만들던 그때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를 원했다. 이런 점이 아주 나와 닮아있다고 느꼈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감정들을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은데, 하면서.
그러다 그녀는 콘서트가 끝나갈 무렵 눈물을 보였다. 하아- 이렇게 감정이 풍부해서야 원. 그녀는 콘서트에 찾아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콘서트가 금세 매진된 것에 또 감사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노래를 들으러 찾아와 준 것에 감사하며 결국 눈물을 보였는데, 아, 나는 그때 그녀의 마음을 정말이지 백프로 이해했다. 재작년에 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가 지금 무대에서 우는 저 심규선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예상하지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줘서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결국 여행친구 D 로부터 예쁘게 포장된 딸기타르트를 선물 받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해 펑펑 울어버리고 만것이다. 엄마, 나는 사람들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다 나 잘되기를 바라고 있어, 하면서. 엄마는 일단 지하철 역이니 그만 울고 집에 와서 울라고 했다. 나는 펑펑 울다 눈물을 닦고 집에 돌아갔고, 집에 돌아가서 딸기 타르트를 내밀며 엄마 품에 안겨 또 엉엉 울었다. 사람들이 왜이래, 사람들이 왜이렇게 나한테 잘해줘, 내가 뭐라고. 엉엉.
심규선은 무대에서 눈물을 보였을 때, 그때의 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콘서트가 매진되고 자신이 노래부르는 공간에 빈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꽉 채워졌음을 봤을 때, 그때의 나처럼 벅차고 감사했을 것이다. 그럴때 눈물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토록 여러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심규선을 보면서도 나는 카트린 아를레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저렇게 못해, 나는 저렇게 노래도 잘하지 못하고, 저렇게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못할거야, 하고. 나는 카트린 아를레가 될 수 없었고 심규선이 될 수도 없었다.
주말동안의 밀린 알라딘 글들을 읽으면서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과 여유를 느끼고 또 자기 일을 성실히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이사람이라면' 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나는 아마 그들처럼 그 자리에서 그 일을 잘해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거야, 하고. 나는 이생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역할인가보다. 저 사람은 훌륭한 글을 써내고 저 사람은 노래를 하고 저사람은 저 일을 하는 것처럼,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근무보다 페이퍼 쓰는 것에 더 즐거움을 느끼면서(응?), 내가 선택한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주말에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았다. 이 영화는 영화 내용 자체보다 사실 이 영화에 얽힌 나의 사정이 있는 영화인데, 몇해전 절반쯤을 보고 절반쯤을 보지 못한 채로 여태 지내왔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던 한남자가 내게 이 영화를 당시에 시디로 구워주었고, 나는 그가 좋다는 영화라서 불끈 의욕을 가지고 그 시디를 재생시켜 보았지만, 두번째 시디가 튀었던 거다. 그래서 절반 가량을 보지 못했던 것. 그래서 '본 영화'가 되지 못한채 여태 남아있다가, 최근에야 이 영화를 다시보자, 고 생각했던 거다. 그 남자 생각도 나고 해서..(응?)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미안해 너의 집앞이야~)
하아, 이 영화는 매우 슬픈 영화였다. 마츠코의 슬픈 일대기 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마츠코는 외로운 걸, 혼자라는 걸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번번이 남자들로부터 '맞는데'도 '맞아도 좋아' 라고 생각한다. '혼자가 아니라면' 이라고 생각하면서. 아- 대체 맞아도 견딜만큼 혼자가 아닌 걸 원한다는 건, 그 안에 얼마나 깊은 외로움이 있다는 걸까.
모든 걸 되돌리면, 그래서 처음부터 제자리를 찾는다면 마츠코가 깊은 외로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마츠코는 멋을 내도 데이트를 해도 집 안에서 조용해야 했고 아버지로부터 애정 어린 표현을 받지 못한다. 그녀는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받는다는 걸 확신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아파서 누워있는 마츠코의 여동생을 신경써야 했으므로 마츠코에게 제대로 된 표현을 해주지도 않고 마츠코에게도 늘 조심하라 말한다. 어릴때 부터 그런 말을 들어왔던 마츠코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생각한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마츠코는 마츠코대로 사랑한다고, 마츠코를 기다린다고, 그 마음을 그대로 마츠코에게 얘기해줬다면...그랬다면 어땠을까.
또한 마츠코를 사랑했던 '류' 도 마찬가지. 마츠코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마츠코를 '너무 좋아해서' 수학여행 당시 여관의 돈을 훔치는데, 누군가를 '너무 좋아해서' 대체 왜 그런 식의 수단을 써야한단 말인가. 그 어긋난 표현은 또한번 마츠코의 삶을 변화시킨다.
물론 그것들이 마츠코의 삶을 변화시키는 절대적 요인은 아니었을 거다. 같은 일을 경험했을 때 모두 반응하는 방식은 다르니까. 그러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 사랑을 제대로 표현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건 확실히 필요한 일이다. 나도 상대에게 그걸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그걸 확실히 알 수 있기를 원한다. 얼마전에 조카랑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이제 훌쩍 커버린 조카를 내가 번쩍 안아주었는데, 조카가 그러는 거다.
이모는 왜 자꾸자꾸 타미 안아줘?
나는 글쎄, 이모도 잘 몰라. 라고 하자 조카가 말했다.
타미는 알아. 이모는 타미를 사랑해서 그래.
아, 조카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단다. 흑흑.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사랑받는 다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
그나저나 주말에 접한 것들이 모두 여자가 폭력을 당하는 거라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7층》도 그랬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그랬는데, 지푸라기 여자를 다 읽고 시작하게 된 책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다 도망치는 여자가 나온다. 아..이런 써글노믄 시키들. 하아-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사랑받는 건 이렇게나 중요하다. 제대로 사랑받아본 사람만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상대를 제대로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언제나 옳은 것은 없다. 사랑이라고 그것이 '언제나 옳은'것은 아니다. 언제나 옳은 것은 세상에 술과 버터와 고기 뿐일지도 모른다.
주말에는 제주도에 다녀왔다. 경향신문을 보던 평일 저녁, 나는 신문기사에서 '제주도의 고기국수'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래서 스맛폰을 들어 다다다닥 검색을 해본다. 오, 비쥬얼이 좋다. 다음날 나는 E 양에게 '제주도에 고기국수가 있다는 데 이거 먹으러 가고 싶다' 고 말하는데, 이에 E 양은 그럼 이번 주말에 가자, 고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오냐 가자, 하고는 당장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고 그렇게 고기국수를 먹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잽싸게 택시를 타고 고기국수 집으로 가고, 국수를 먹고는 호텔 셔틀을 타기 위해 공항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마침 시간이 딱 셔틀 도착할 시간, 우리는 45분 여를 걸었다가 셔틀을 탔다. 그리고 호텔에 도착했는데, 아, 나란 인간. 이 호텔에 처음도 아닌데, 여러차례 왔는데도 방향 감각을 상실해서 E 양이 이쪽 이라고 나를 안내해 줘야 했다. 객실에 찾아 들어가고 다시 나와 올레길을 걷고 그리고 다시 숙소에 돌아가기 위해 호텔에 도착해 엘레베이터를 타고 우리 층에 내렸는데 나는 또 멈춰버리고 말았다. 헐. 어디로 가야 해...내 방향감각은 진짜 병신이구나 ㅠㅠ 순간 딱 멈춤, 을 하자 E 양이 또 나를 안내한다. 이쪽이에요, 라고. 매번 나를 이끌어줘서 고마워, E 양. 내 방향 감각은 나에게 지독하게도 치명적이구나.
아, 고기국수에 대한 평을 하자면, 나는 고기국수가 맛있었다. 함께 시킨 비빔국수도 맛있었다. 그런데 부산과 창원, 마산에서 먹었던 돼지국밥이 더 좋다. 돼지국밥을 먹으러 또 부산이나 창원, 마산에 가고 싶지만 고기국수를 또 먹기위해 제주도에 가고 싶진 않다. 어쩌면 나는 면보다 밥을 더 좋아해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고기국수는 맛있었지만 돼지국밥같은 치명적인 매력은 없다, 라고 쓰는 순간 흑, 돼지국밥 먹으러 또 부산 가고 싶다. 창원 가고 싶다. 낮에 돼지국밥 시켜서 낮술 하고 싶다. 밤에는 다른 거 더 푸지게 먹고. 흑흑.
이것이 비빔국수의 비비기 전과 비비고난 후의 비쥬얼.
그리고 이것이 고기국수의 비쥬얼.
음..사진 보니까 또 먹고싶네. ㅠㅠ
좀있으면 점심시간이 온다. 화이팅!!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 얘기도 하고 싶은데 이건 다음으로 패쓰하자. 페이퍼가 너무 길다. 마지막으로 인용문은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의 것이다.
갑자기 함부르크의 불결한 건물이 기억 속에서 꿈틀대며 올라왔다. 그러자 그 지독한 폭격들, 건물이 부서지고 불타고 내려앉은 길에서 설치던 쥐들, 공포와 배고픔과 추위와 고독에 절어 지냈던 쓰라린 시간들이 꼬리를 이으며 떠올랐다. 사람의 삶이란 별난 것 같으면서도 그리 별날 게 없는 것이어서, 해진 이불을 덮고도 잠은 오고, 지그러진 통조림통에 담긴 음식도 목을 넘어가며, 숨을 곳을 찾아서라면, 감자 1킬로그램을 얻기 위해서라면, 마른 나뭇단 한 묶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걸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화염으로 뒤트릴고 내려앉아 뼈대만 남은, 파열된 하수도관과 박살난 유리창들만 남은 건물의 잔해 한복판에서도 그녀는 사랑을 했었다‥‥‥(p.79)
"아니면 뭣 때문에 당신 같은 여자한테 흥미를 가졌을 것 같소? 이보시오, 친애하는 힐데가르트, 당신은 서른네 살이었소. 직업도 없고 미래도 없는 서른네 살. 내 말을 믿으시오. 그 나이에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면, 그건 앞으로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이야기요.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초라하고 별 볼 일 없이 나이만 먹었을 거요. 당신 나이의 여자들한테 예정된 하찮은 미래를 생각해본 적은 있소?"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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