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마르소' 주연의 영화 《어떤 만남》에서 소피 마르소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남자는 유부남이다. 남자와 소피 마르소 모두 서로에게 반하게 되지만 한 명이 기혼자인 마당에 그 사랑을 쭉쭉 뽑아나가기는 쉬운 게 아니다. 소피 마르소는 자신이 그에게 빠져있음을 자신의 친구에게 얘기하는데 친구는 그녀에게 '그는 유부남이니 네가 절대로 그와 사랑에 빠져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는 대신, 그를 붙잡으라고 말한다. 진행하라고, 사랑에 풍덩 빠지라고 말한다.
사랑에 빠지는 건 예정에도 없이 찾아온다. 그러니 이미 내 옆에 누가 있는데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고 싶진 않지만 나에 대해서도 단언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건 모두에게 마찬가지.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라고 말해도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거다. 그러나 내 주변에 누군가가 그런 사랑에 빠져 있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에게 '사랑이란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고 그토록 강렬하게 빠질 수 있는 상대가 또 있는 것도 아니니 거침없이 그 사랑을 마음껏 진행해'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사람이 누구든 '절대 그러면 안된다' 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사랑과 연애는 오로지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 해, 해, 질러버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영화 《어떤 만남》에서의 남자와 여자 주변의 친구들을 보는게 꽤 놀라웠고 신선했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도리 혹은 관습보다는 사랑이 우선인 것 같았다. 사랑은 그 모든 제도와 가치 위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그런데,
'에릭 오르세나'의 소설, 《오래오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쯤되면 사랑을 모든것의 가장 위에 놓는 것이 프랑스 사람 모두의 속성인가 싶을 정도인데, 소설 속에서 이미 아내가 있던 남자가 이미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데, 맙소사, 주변인 모두가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고 지켜보며 도와준다. 그들중 어떤 누구도 '그 사랑을 하지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또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뜨거운 사랑이 찾아오는 게 쉽지 않다고 한들, 어째서 단 한명도 그들의 아내나 남편에 대한 동정표를 주지 않는걸까? 일순간의 충동일 뿐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단 한명도 없을까? 어째서 처음 보는 사람도, 늘 알아오던 사람도, 심지어 남자의 친아버지 조차도 그들의 사랑을 응원할까??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것이어서, 만약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았다면, 내가 그들의 편이 되어, 사랑에 빠지는 게 잘못이냐고, 너무 늦게 그들이 서로를 발견했는데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이냐고, 한사람하고만 살아야 한다고 약속하는 결혼이란 제도가 불합리한거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모두가 그들의 '혼외 사랑'을 응원하는 걸 보노라니, 나는 남자의 버려진 아내의 편에 서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보세요들, 당신들은 당신들의 사랑에 몰두한 나머지, 남겨진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모른척 하는건가요? 하고.
남자와 여자가 사십년간 혼외 사랑을 유지하며 결국은 함께했다는 이, 어찌보면 아름다운 이야기에서, 나는 세상 사람 모두가 그들의 사랑을 응원했다는 데에 갸웃해진다. 진짜 그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프랑스의 한 정원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전설로 남기고자 아이를 만들고, 영국에서 스페인에서 만남을 갖는다. 벨기에에서는 365일간 동거를 하기도 한다. 사실 이 벨기에에서의 동거는 내게 꽤 낭만적으로 느껴졌는데, 언젠가부터 나는 저기의 그와 여기의 내가 거기에서 만나 잠깐 함께하는 것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책속의 엘리자베트 처럼, 이런 제안을 살면서 한번쯤 해보고 싶어졌다.
「당신에게 1년을 제안하겠어요. 우리 함께 살아요. 프랑스에서 말고,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말고. 하지만 아주 같이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p.363)
물론 여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편이었다. 남자도 마찬가지. 언제 여자로부터 연락이 올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기다림은 일로 채워졌고, 그러므로 그도 자신의 일에서 단단한 위치를 잡아두고 있던 터다. 그러니 여기가 아닌 다른 나라에 터를 정하고 살아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다. 그들은 그렇게 벨기에에 집을 구하고 짐을 싣고 함께 이사를 온다.
그들 앞에 둘만의 아늑한 공간과 시간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껏 섬 같은 공간과 시간만을 경험해 온 그들에게 갑자기 거대한 대륙이 나타난 셈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이사 온 집에서 해야 하는 갖가지 일들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되도록 소음을 적게 내려고, 특히 상대방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들은 무대 공포증과 비슷한 일종의 울렁증과 맞서 싸우면서 조금씩 서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란히 놓인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p.370-371)
어제 텔레비젼에서 아빠와 딸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중 배우 조재현의 집이 인상적이었는데, 딸이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항상 방문을 열어두고 있는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조재현과 그의 아내가 친구처럼 다정하다는 데 놀랐다. 딸은 인터뷰에서 '엄마와 아빠는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와인도 같이 마신다' 라고 했는데, 그런 모습을 아마 자주 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이틀밤을 바깥에서 보내고 돌아온 조재현의 대본 연습을 아내가 도와주고, 연습이 끝나고난 후에는 같이 텔레비젼을 시청하며 나란히 앉아 와인을 함께 마시는 거다. 늦은 밤이었고, 안주는 만두와 김치였고, 장소는 그들 집의 거실 테이블 이었다. 와- 이 장면이 진짜 엄청 좋은 거다. 부부가 갖추어야 할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결혼했음에도 가끔 후회하고 싸우고 이혼도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도 하는 것일텐데, 그렇게 자신들의 일과를 끝내고 나란히 앉아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대단치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함께 마실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거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렇게 와인을 마시는 저 자리에 딸이 함께여도 될텐데? 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다. 딸은 스물네살이고 술을 마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 본인의 의지로 안마시는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저자리에 딸도 함께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잔을 부딪친다면 좋을텐데. 그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 책속에서 자신의 '평생의 여자' 라고 부르는 여자와 함께 살 수 있게 된 남자는 얼마나 좋았을까. 매일매일 침대위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기쁨이다. 그러나 이 '평생의 여자'를 만나기 전, 그때도 그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어져서 결혼하지 않았었나. 여자 역시 마찬가지. 그러고 싶어서 한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고 살았던 게 아닌가. 왜 시간이 지나고나서 그들은 지금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이토록이나 간절히 원하게 된걸까. 그들은 사십년간 그들의 사랑을 지속한다. 어쩌면 그들이 함께 살지 않았으므로-벨기에에서 1년을 같이 살았지만- 그 관계, 혹은 그 사랑이 유지됐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랑은 뭘까?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게 만들며, 또 기다리게 만들까? 대체 그것이 뭐길래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을 원하게 만드는 걸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삶의 한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경험이 많아도 아무 쓸모가 없다. 경험이 도리어 방해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것에서 느끼는 감동, 그 아찔한 기분이 사랑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만날 때마다 세상의 첫날 아침을 맞는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p.333)
새로운 것에서 느끼는 감동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이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이 시작 되는 걸까? 그러나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지금 헌것도 처음엔 새것이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미도리'가 말했던가. 마음이란 불완전한 거라고. 어차피 사랑도 마음이 하는 거라면, 사랑 역시 불완전한 것이 아닐까. 이 사람에게 영원을 맹세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다시 영원을 맹세하게 만드는 게, 그게 결코 완전하다고는 볼 수 없는 게 아닌가. 마음도 사랑도 불완전하고, 마음과 사랑의 주체가 되는 인간 역시 불완전하다.
「당신의 의도가 정확히 뭐죠?」
당황한 가브리엘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언젠가, 아마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겠지만, 제가 당신의 팔을 잡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애가 다하는 날까지 서로 헤어지지 않고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p.558)
어느 날 저녁의 일이었다. 그들은 인근의 대학에서 오승은의 『서유기』를 각색한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함께 걷는 것을 여전히 크나큰 행복으로 여기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은 많아도 팔짱을 끼고 함께 걸을 사람은 없던 고독한 시절은 갔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푸근하고 즐겁고 황홀한 축제였다. 그들은 침대에서 각자의 자리를 정해 놓고 매일 같은 자리에서 잤던 것과 마찬가지로 걸을 때도 항상 가브리엘이 엘리자베트의 오른쪽에서 걸었다. 함께 걷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p.586)
엊그제였나. 남동생과 둘이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좀 추워서 남동생에게 넌 춥지 않니? 물으니 춥다는 거다. 그러면 수면 양말 신어, 라고 했더니 가지러 가기 귀찮단다. 어디있는데? 내 침대 위. 내가 가져다 줄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남동생 방에 들어가 침대에서 수면양말을 가져다 주었다. 남동생은 그 틈에 텔레비젼 화면을 정지시켜 놓았더라. 여기있어, 라고 주면서 야 정지시키지 않아도 되는데, 라고 하자 남동생이 말했다.
누나 이거 좋아하잖아. 저녁 먹는거 보는 거.
아유 ♡ 이쁜 녀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를 너무나 잘아는 녀석이다. 어제는 아빠,엄마,남동생,나 이렇게 넷이 치킨을 시켜놓고 술을 마시는데, 우리 다같이 뭐볼까, 하면서 또 《나는 자연인이다》를 봤다. 이 프로그램은 남동생의 페이버릿인데, 보다가 또 저녁 먹는 장면이 나오자 남동생이 말했다.
누나 좋아하는 거 나온다. 밥먹는 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더니 엄마와 아빠를 돌아보며 말한다. 이 누나 밥 먹는 거 보는거 되게 좋아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사람들이 맛집 찾아다니며 먹는거 보는건 별로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데, 생활하면서 밥 만들어 먹는 거 보는 건 진짜 좋다.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프로그램도 별 관심없는데 저녁 만들어 먹는 건 보는 게 좋고, 걸어서 세계속으로 에서 그 나라 그 지역 사람들이 밥 먹는 거 보는 것도 참 좋다. 저 사람들 뭐 먹나, 어떻게 먹나, 맛있게 먹나, 이런거 보는게 너무 좋아! ♡
좀전에도 남동생과 얘기했다. 삼일절이 내일이었으면 오늘도 술마실 수 있는데, 하면서. 오늘을 술마시지 않고 내일을 맞이 해야 한다는 건 슬픔이다. 흙 ㅠㅠ
그나저나 오랜 시간이 걸려 《오래오래》를 다 읽었는데, 자, 다음 책은 뭘 읽지? 이거 고민 하는 순간이 진짜 행복하다. 이히히히히히히히히.
「세상에, 새벽빛이 밝아 오고 있어요!」 그런 외침과 함께 그녀는 몸을 빼냈다. 갑자기 찬 공기가 느껴졌다. 그는 입을 벌렸지만 공기를 들이마실 수가 없었다. 그녀를 붙들고 싶었지만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달려가서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홀로 버려진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자기가 곧 죽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기분을 맛보아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지금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이 정말 불행하다고 느끼면, 살아 있어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살아있어도,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꺼지고 모든 것이 얼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p.105-106)
인생은 언제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p.122)
나는 할아버지로서 그대에게 크나큰 애정을 품고 있고, 그대가 조금만 아파도 엄청난 불안을 느낄 것이다. 그런 내가 그대에게 사랑의 고통을 느껴 보라고, 정말 절절하게 아픔을 느껴 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오로지 고통만이 자기 안에서 유랑 부족처럼 떠도는 감정들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사랑의 감정이란 그저 모호하고 불안정한 감정일 뿐이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지만, 나는 그대에게 사랑의 고통을 느껴 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치료약을 알려 주고자 한다. 사랑의 고통에는 걷는 것이 약이다. (p.464)
그는 정원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자마자 늘 그랬던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지도록 감격스러워했다. 내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냅킨을 펼치자마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상세르산 백포도주를 따라 주던 튀니지계 종업원은 허공 속으로 스러져 버렸고, 바스크 지방 출신의 사이클 애호가인 뚱보 주방장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빨간 벽지며 마른 꽃들이며 유명한 운동선수들의 사인이 들어간 사진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스토랑은 가뭇없이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리 공간의 외부에 있었다. 우리는 두 명의 사람이 아니라 텅 빈 바다 한복판에 떠있는 하나의 섬이었다. 살갗, 말, 영혼, 성애, 웃음, 고통, 계획, 추억 등과 같은 미묘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섬이었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면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밀려온다. 우리 사랑의 명명백백함 앞에서 현실이 기를 못 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금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은 정정당당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우리에게 모든 자리를 내주었다.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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