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번역되어 있는지를 몰라서 한 번 검색해봤더니 2012년에 이미 번역되어 책이 나와 있었다. 표지만 보면 딱딱한 인문서적 같은데, 혹여나 2012년에 이 책을 알았어도 그저 내가 잘 모르는 인문서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것 같다.
《웰컴, 삼바》는 말해야 할 것을 말해야 하는 영화였다. 그러므로 필요하고 의미있는 영화였으며, 그 영화를 보는 쪽이 보지 않는 쪽보다 더 나았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그 영화를 보고나서 바로 무언가 액션을 취하지 않더라도, 혹여라도 나중에 어떤 액션을 취하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영화. 책이든 영화든 그게 뭐든, 본다고 바로 삶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감상한 후에 느꼈거나 생각한 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그것들을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 만들고자 선택해 보는 건 아니다. 그 시간들이 즐거워서 선택하는 거지. 어쨌든 《웰컴, 삼바》가 '필요한' 영화였다면, 내게 《와일드》는 '좋은' 영화였다. 여기서 '좋은'의 의미는 '좋아하는'을 뜻한다. 나는 이 영화가 몹시 좋았다. 내 마음이 더 끌리는 건 이쪽이었다.
여자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가난한 집에서 엄마와 또 남동생과 살고 있었다. 가난하고 가진 게 없는데도 엄마는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기도 했지만, 엄마는 여자의 삶의 중심이었다. 그러다 엄마를 병으로 잃고난 후 그녀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엄마의 죽음과 또 그녀의 이혼은 그녀를 바닥까지 추락시켰고, 그녀는 아무하고나 섹스하고 마약을 하는등 하염없이 처참하게 무너져버리고 반다. 그러다 원치 않는 임신까지 하게 된 그녀는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망가져있다는 걸 자각하고 '내가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와 '엄마에게 자랑스런 딸이 되고 싶었어' 라는 생각을 하고 달라지고자 한다. 그때 선택한 것이 하이킹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듣는것은 몹시 뿌듯하고 흡족한 일이며, 그런 욕망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삶은 후회 없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밀크》에서 죽기전의 밀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말을 들어서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 그는 죽지만, 그렇지만 그의 죽음이 그에게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아, 나 정말이지 잘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속의 밀크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자랑스럽다는 말을 듣고는 감동에 젖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기둥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속에서 여자가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멀고도 험한 길을 걷기로 선택한 것이, 내게는 전혀 뜬금없게 느껴지질 않았다. 사람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저마다의 기준이 있고 저마다의 방법이 있다. 그녀가 걷기를 선택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 그런 그녀를 나는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걷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언제든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렇게 힘겹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첫날의 야영은 작은 소리에도 무서워 잠을 못자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시간이 지난 후의 그녀는 발톱이 빠져도 걷고 눈 속으로 발을 푹푹 담그면서도 걷게 될만큼 강해졌다. 그녀는 하이킹 코스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따뜻한 죽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걷는 동안 그녀는 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어린 시절 자신에게 행복했던 기억과 불행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물론 성인이 된 후의 일들도 떠올린다. 하이킹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떠올리기 싫은 것도 떠올리게 된다'고 그녀는 말하는데, 걷는 동안에는 내가 원치 않았던 기억들도 저절로 떠오르는 법. 그 먼 길을 그 오랜 시간 걷는 그녀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됐을까. 그래서 내게는 그 험난한 여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도 없다는 것, 가끔 갑작스레 동물을 마주치게 된다는 것, 그저 막막하게만 여겨진다는 것들이 무섭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내가 온전히 내 자신에 집중해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나도 그렇게 걷고 싶다고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그저 걷기만 하는 게 대체 무슨 재미를 줄까, 지루하고 단조로우며 심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가 너무 재미있어서 놀랐고, 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 영화, 《와일드》가 무척 좋아서 놀랐다. 어쩌면 그 단순한 '걷기'는 위에 쓴것처럼, 오롯이 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선물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해럴드도 그랬다. 그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내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제대로 사랑해주지 못했던 것 같은 아들을 생각한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고되지만, 걷는 시간 동안 그는 아주 많은 사연들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게 된다. 물론 내 자신에 대해 들여다보기 위해 꼭 그렇게 오랜시간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걷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번쯤 그런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목표가 있다면 더 좋겠다. 천천히 걸어서 언젠가 당신에게 닿겠다는 그런 목표 같은 것.
그러나 여자가 등에 짊어진 가방의 무게가 내게는 너무도 힘겹게 느껴진다. 너무 크고, 너무 무겁다. 게다가 오랜 시간 너무도 먼 거리라 발톱도 빠지고. 그녀의 몸은 멍 투성이이며 길에서 뱀을 만났을 때 그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이라니. 아, 나로서는 그렇게 힘들고 싶지 않은거다. 그 먼 길을 걷는데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완주한다면 정말이지 짜릿하게 기쁘겠지만, 그 무거운 가방을 나로서는 짊어지고 싶지 않다. 또한 길 한가운데에 텐트를 치고 자고 싶지도 않고. 나는 끼니때마다 맛있는 걸 먹고 싶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싶고, 좋은 침대에 누워 자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호텔을 정해두고 반나절을 걷고 맛있는 식사를 한 뒤 또 반나절을 걷는,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다. 다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걷고 생각하고, 저녁때면 내 쉴 곳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고 싶다. 그리고 쿨쿨, 잘도 자고 싶다. 낮에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그저 걷는 것만으로 시간들을 채워나가고 싶다. 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를 보고난 후, 나는 언젠가 이 직장에서 벗어난다면, 내가 직장생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면, 내게 그런 시간을 꼭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중간중간 숙소가 있다면, 매일매일 걸었다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 쭉쭉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할텐데. 걷고 먹고 마시고 그 모든 시간에 생각하고. 한 두세달쯤 그렇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걷다가 그 길 끝에서 당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걷고 싶다.
그렇게 걷고 싶다는 삘을 받고 오늘 일자산엘 갔는데, 하아-, 비온 뒤의 산은 정말이지 걸을 게 아니더라. 신발이며 바지가 죄다 흙투성이가 되었다. 너무나 질어 발이 빠졌고 그러므로 너무 지저분해져, 산에서 내려온 뒤 까페로 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겠다는 생각을 금세 지우고 말았다. 이렇게 더러워진 바지와 신발로 까페를 가는 것은 민폐일 터.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책장에서 몇 권의 책을 빼내어 중고샵에 팔기 위해 정리를 하다가, 《목신 판》에 내가 책 모서리를 접어둔 부분을 펼쳐 읽게 되었다. 사랑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장미꽃들 사이에서 속삭이는 바람-아니, 피 속의 노란 인광. 가장 늙고 가장 쇠약한 심장조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죽음의 무도'. 사랑은 밤이 다가오면 활짝 피는 마거리트 같고, 가벼운 입김에도 꽃잎을 닫고 살짝 만지기만 해도 죽어버리는 아네모네 같다.
사랑은 그런 것.
사랑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그에게 다시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 사랑은 변덕스러워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내일 밤은 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또 한편으로는 불변성을 갖고 있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봉인처럼 굳게 지속될 수도 있고, 죽음의 순간까지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하늘에 별이 빛나고 땅에 향기가 가득한 여름밤이다. 하지만 왜 사랑은 젊은이로 하여금 은밀한 길을 따라가게 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외로운 방에서 발끝으로 서 있게 할까? 아아,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버섯밭으로, 신비롭고 무참한 독버섯이 자라는 무성하고 뻔뻔한 밤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사랑은 수도사로 하여금 한밤중에 높은 담장을 둘러친 정원에 몰래 들어가 침실 창문을 통해 잠자는 사람들을 엿보게 한다. 사랑은 수녀를 어리석음으로 사로잡고 공주의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사랑은 왕이 혼잣말로 음란한 말을 속삭이고 소리내어 웃고 혀를 내밀 때 그의 머리카락이 길가 먼지를 쓸 만큼 왕의 머리를 길가에 낮게 내려놓는다.
사랑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아니,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또 다른 무엇이다. 사랑은 젊은이가 두 눈으로 두 눈을 보는 봄날 밤에 지구를 찾아온다. 젊은이는 응시하고, 입술에 입을 맞춘다. 두 개의 빛이 그의 가슴속에서 만난 듯한 느낌, 별을 섬광처럼 비추는 태양 같은 느낌이다. 그는 그녀의 품에 안긴다. 온 세상이 조용해 지고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고, 하느님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 첫 생각이었다. 하느님이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사랑이 있었다. 하느님이 만든 것은 모두 아주 좋았고, 그 가운데 하느님이 다시 파괴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은 창조의 원천, 창조의 잣대였다. 하지만 모든 사랑의 길에는 꽃과 피가 흩뿌려져 있다. 꽃과 피가 ‥‥‥ (p.229-231)
사랑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다고 크누트 함순이 말한다. 사랑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바깥으로 뿜어내는가. 한 남자를 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는 게 사랑이라면, 멀고 험한 길을 묵묵히 견디며 걷게 하는 것도 사랑이 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랑스럽고 싶었던 여자가, 그 길을 걸었다. 사랑이 한 일이었다. 발톱이 뽑혔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것, 그건이 사랑의 길에 흩뿌려져 있는 꽃과 피였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내 안에, 내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에너지들을 끌어낸다. 창조의 원천이며 창조의 잣대라는 크누트 함순의 말은 그러므로 틀리지 않았다.
설 연휴에 친척들이 방문했고, 그중에는 이제 고2가 된 외사촌 여동생이 있었다. 그 여동생의 엄마인 나의 막내이모와 둘러 앉아 괌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간 내가 갔던 곳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이에 여동생은 '언니는 왜이렇게 간 데가 많어?' 라며 약간의 부러움을 담아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고2가 된 외사촌동생에게 말했다.
너도 가능해. 넌 나보다 더 많은 곳을 가볼 수 있어. 네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면.
하하하하하. 나는 동생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이모가 지청구를 늘어놓을거라 생각했는데, 이모는 오히려 한술 더떠 당신의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지 않으면 연애도 계속 할 수 있어, 라고. 하하하하하. 이에 삘받아 말했다. 그래 얘야, 결혼하지 않으면 넌 전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게 가능하고, 그때마다 남자를 바꿔서 여행 갈 수도 있어. 엄마에게는 친구들하고 간다고 말해. 나라고 그 모든 여행에 친구들과 함께였겠니? 심지어 어디에 가서든 현지 남자와 교제하는 것도 가능해, 니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잠시후 내 여동생의 가족들이 도착했다. 올해 막 여섯살, 세살이 된 나의 조카들이 함께 도착했고, 세살이라고는 하지만 개월수로는 고작 17개월인 둘째조카가 아장아장 걸으며 방싯방싯 웃으니 온 식구들이 까르르 웃고 예뻐서 어쩔줄을 모르는데, 그때 이 외사촌동생이 내게 말했다.
언니 얘기 듣고 결혼 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어.
라고. 그래서 내가 왜? 라고 물으니 이 소녀는 나의 둘째 조카를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며 '아기가 너무 예뻐' 라고 하는거다. '나도 이런 아기 낳아서 살고 싶어' 라고. 오, 소녀여, 그렇다면 그렇게 하렴.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대로 살아가야 하는 법. 소녀가 자라서도 이 생각을 바꾸지 않고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될지, 혹은 그 생각이 바뀌게 될지는 모르겠다. 소녀가 꿈꾸던 것이니 일찍 결혼하게 될지, 혹은 꿈꾸었지만 좀처럼 결혼을 하지 않게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녀가 더 나이 들고, 또 더 나이 들고, 또 아주 나이 들어도, 그때까지 소녀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 친척언니가 되고 싶다. 설사 그때에 이르러 내가 결혼해있다고 해도, 소녀에게 결혼하라고, 결혼이 얼마나 좋은줄 아냐고, 그딴 말은 하지 않는 친척 언니가 되겠다.
일전에 《문학동네 2014 가을》에 실린 황정은의 글을 누군가 인용한 것을 보았었고, 그 인용문을 보고 이 책이 너무 읽고 싶어져서 샀었다. 그리고 황정은의 글을 읽었고 박민규의 글을 읽었다. 그 후에 두어개쯤 더 읽은 것 같은데 뭔지 잘 모르겠고, 어쨌든 토요일에 외출을 하면서 이 책을 가방에 넣었다. 아직 읽지 않은 글들을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살짝 고민하기는 했다. 내가 이 책을 들고 외출하면 읽을 시간은 광화문에 도착하는 지하철 안의 시간 뿐이다. 도착하고나서 영화를 보고 친구들을 보고 술을 마시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읽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두꺼운 책을 가져가는 게 옳은가? 라고. 그러나 이 책은 단편들의 모음이고, 그렇다면 적절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기랄,
집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으로 가면서 하아- 나는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방이 너무 무거웠다. 정말 더럽게 무거웠다. 짱 무거웠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었고, 나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어야 했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어야 하고, 나는 우산을 드는 게 너무 싫고, 또한 나는 양 손에 뭔가 드는 게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싫다. 게다가 무거운 것도 짱싫어! 그런데 가방은 무겁고 한 손엔 우산을 들고, 내가 싫어하는 온갖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 아... 여튼 그렇게 광화문까지 가는 지하철 역에서 두 개의 단편을 읽었고, 광화문에 내려 가방에 이 책을 넣고 진짜 엄청나게 무겁다고 여기면서 내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저지르다니, 하고 계속 짜증이 났다. 무거워, 무거워... 난 배낭 무거운 거 싫어서 하이킹도 안할 사람인데, 이게 무슨...영화를 보는 내내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는데 나중엔 다리가 저려오기까지 하더라. 내 이걸 그냥 콱 ㅠㅠ
그리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인 알라딘 중고샵 종로점엘 갔다. 종로에 약속이 있으면 약속 장소는 항상 알라딘 중고샵이 되는데, 조금 일찍 도착해 중고샵으로 들어가 책들을 구경하고 또 사는 게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일찍 도착했고 나는 중고샵안으로 들어가 책을 보며 마음에 드는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아- ,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도무지 책 구경에 집중이 안되는 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래서 나는 책 구경하기를 포기하고, 책을 읽는 공간에 앉아 그냥 이 책을 꺼내서 읽다가, 아, 근데 무거워, 무거워, 나는 이 책을 들고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생각에 휩싸여 이 책을 들고 카운터에 들고 가 이 책 매입하겠습니다, 했다. 그렇게 팔아버렸........................
무거운 책을 가지고 외출하지 말자. 무거워..
친구들과 2차로 간 을지로 술집에서 한창 술을 마시던 중, 술집의 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혹시 티븨에 나오지 않으셨냐고. 나는 뻔히 아닌데도 잠깐 멈칫, 생각했다. 나 티븨에 나온적 있었던가... 아뇨, 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다시 물으신다. 혹시 직업이 공무원 아니세요? 라고. 또 멈칫, 나 공무원이었던 적이 있었던가...생각하다 아뇨, 라고 답했다. 그러자 티븨에 나온 사람 같다며 내게 '형사 아니세요?' 하는거다.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형사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처럼 생긴 형사가 티븨에 나와서 뭔가 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튼 아니라고 했다.
참나원. 알라딘 공식 미녀 마노아님은 너무 예쁘다며 전화번호 물어보는 남자가 있는데, 나는 형사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구나. 뭐, 어쩔 수 없지. 세상에 미녀가 너무 많으면 미녀의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형사냐고 물어본 게 미녀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원래 세계적 스파이들은 또 미녀가 아닌가. 형사나 스파이나, 뭐. 미녀 형사일 수도 있는 거고. 미녀는 뱀파이어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뭣이냐, 안젤리나 졸리도 뭐 그 무슨 요원으로 나오고 그랬잖아? 남자가 예쁘다고 번호 물어보는 일은 없었지만, 뭐, (예쁜) 형사 아니냐고 물어본 걸지도 모르니까. 호프집 사장님이 예쁜 형사님 아니세요? 라고 물은 건 아니지만, 예쁘다는 말은 생략된 걸수도 있으니까.
라고 제기랄 겁나 혼자 위로해도 좀처럼 위로가 되질 않는구나.
그거슨 연휴가 끝났다는 걸 알기 때문일거야.
방금전에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다 끝났어...
라고.
야, 그렇게 슬픈 말,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