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아주 못생기고 뚱뚱했다. 물론 지금도 못생기고 여전히 뚱뚱하지만 고등학교때는 진짜 최악이었다. 나는 공부도 못했는데 외모도 거시기해서 아주 자신감이 없었다. 학교 다니는 것도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도 뭔가 과격하고 날카로운 성격이긴 했던 것 같다. 나의 쌀쌀맞은 태도나 무심한 성격 탓에 여자 애들을 울린 적도 더러 있었다. 그당시 애들은 예민한 법이라 자기보다 다른 친구랑 더 친한 것 같다고 울고 그랬던 것이다. 아침에 제일 먼저 자기한테 말걸지 않았다고 울고...뭐 ..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고.
그당시 내가 가장 잘하는 게 있었다면 공상이었다. 공부를 하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 늘 공상을 하곤 했다. 팝송을 듣다가도 마찬가지. 내 머릿속에서는 아주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생겨나고 그랬다. 공상속의 나는 언제나 멋지고 당당하고 울트라캡숑 아름다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초절정의 미녀였는데, 아마도 내가 그런 공상을 잘했던 건, 내게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등교 준비를 할 때는 항상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를 틀어두었는데, 하루는 내 간절한 소망을 현실로 이루고자 오성식한테 편지를 보냈다.
FBI 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저걸 편지라고 보낸거다.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보낸걸까. 심지어 고딩이. 초딩도 아니고 ㅠㅠ 한참이 지나 오성식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FBI 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방송을 들어줘서 고맙다, 날씨가 어떤데 어떻게 지내라, 등의 일상적 얘기가 타이핑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밑에 서명만 오성식이 했을 뿐. 아마도 많은 편지들을 받느라 일일이 상황에 맞는 답을 해주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여튼, 나는 그 당시에 FBI 에 대한 환상울 품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내가 보았던 외국영화속의 멋진 남자는 죄다 FBI 였기 때문이다. 저런 멋진 남자들하고 같이 일하는, 저들보다 더 능력있는 FBI 요원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FBI 랑 사랑하고 연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 멋진 남자들 위에 서는 멋진 여자가 되고 싶었던거다. 그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추리를 잘하고 더 범인을 잘잡고 더 액션도 잘하는....그러나 이건 진짜 허무맹랑했던 게, 공부도 공부지만 몸이 둔해서 뭐 운동이라고 할만한 걸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단 거다. 백미터 20초 나왔던가...뭐 그런 슈퍼돼지였는데, 액션은 무슨...지금의 나는 내가 FBI 를 할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까, 라는 생각이 그 직업이 멋지다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훨씬 먼저 든다. 여튼 나는 FBI 가 되고 싶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챙겨든 책은 바로 이 책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제일 처음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읽는다.
1957년 미국 미시간에서 CIA 요원 출신의 생물 교사 아버지와 동화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십대 시절에는 찰스 디킨스와 에드거 앨런 포에 빠져 빅토리아 시대소설과 공포소설을 쓰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무용을 공부한 뒤 안무가 겸 무용 교사로 일했다. 스물아홉 살에 첫 소설을 출판했으며,『트롤』『백 가지 모험』『콜 하버에서 보낸 1년』 등 여러 작품을 썼다. 『빨간 그네를 탄 소녀』로 2002년에 뉴베리 아너상을, 『블루베리 잼을 만드는 계절』로 2003년에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판타지와 현실을 뒤섞고, 별난 캐릭터와 기상천외한 유머로 비극을 감싸며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해 주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앗. 뭐..뭐...뭐라고? CIA 요원 출신의 생물 교사 아버지라고? 맙소사. CIA 랑 FBI 는 영화속에만 등장하는 직업군이 아니었던거야? 이렇게 살아 숨쉬는 현존하는 그런 존재인거야? 우와- 완전 엄청 충격 받아서는 내 고등학교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던 거다. 그래, 내가 FBI 요원이 되고 싶었지. 그랬었어...아...내가 되고 싶었던 걸 누군가 어딘가에서 하다가 때려치고 생물 교사를 했구나, 그렇게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훌륭한 작가가 되었구나. 그런데 이 작가좀 보라지. 여덟살 때부터 글을 쓰고 십대에 디킨스에 빠져들었다네? 나는 위대한 유산을 몇 년전에 처음 만났는데!! 게다가 무용 전공에 무용 교사..라니. 무용 교사를 하다가 소설을 썼다고? 흐미...
나는 가끔 사람들이 대학때 전공을 물으면 '무용이요' 라고 해서 질문한 사람들을 빵빵 터뜨리는데,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무용을 전공한 사람이 또 글을 쓰고 있었네. 뭔가 이 가족은 현실에 존재할 법하지 않은 가족인 것 같다. CIA 출신 요원을 아버지로 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위험하게 느껴질까? 스릴있게 느껴질까? 난 CIA 요원 출신 아버지를 갖는건 이미 글렀으니, FBI 가 되겠다는 꿈마저 포기한지 오래이니, 할 수 없다. FBI 요원 남자를 사귀어 보는 수밖에. 역시 미국엘 가야겠구나. 크-
이 책 속 주인공인 소녀 '래칫'은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데, 여름방학을 보내기 위해 이모할머니들(이었던가..) 댁에 가게 된다. 이모 할머니들을 쌍둥이인지라 두 분이었고, 그 집에는 틸리와 펜펜, 그 두분 만이 늙어가고 계셨다. 집 안에 설치된 전화는 받는 거만 가능하고 집 또한 숲 속 깊은 외딴 곳에 있었던지라 결혼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지금까지 늙어온 이 두 노인은, 한 명이 죽으면 다른 한 명도 바로 따라 죽자고 늘 약속하고 있던 터다. 운전조차 스스로 습득한 이 할머니들은 당연히 운전이 서투를 수 밖에 없었는데 여튼 자신들의 집에 여름을 보내기 위해 온 래칫을 데리고 읍내에 쇼핑을 하기 위해 나간다. 쇼핑을 하고 우편물을 찾고, ㅋㅋㅋㅋㅋ(앞으로 쓸 걸 생각하다 웃겨서 미리 웃음) ㅋㅋㅋㅋㅋ, 한 잔 하러 가자며 할머니 두 명과 소녀 래칫은 읍내의 술집엘 간다.
"자, 이제 한잔하러 가자고."
자매는 래칫을 데리고 읍내 술집의 육중한 문을 밀었다.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생경한 냄새가 래칫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맥주, 습기, 담배, 나무 연기, 해묵은 나무, 시원하고 어두운 술집에서 몇 년을 살다시피 한 수많은 남자들의 땀 냄새였다. 틸리와 펜펜이 그곳을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래칫도 그곳이 좋았지만, 정작 셋 다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남자 냄새라는 것을. (p.33)
아우...출근길에 이 부분을 읽는데 진짜 완전 눈 앞에 풍경이 확 그려지는 거다. 그리고 바로 내 앞에서 그 남자 냄새가 나는 것 같은거다. 맥주, 습기, 담배, 나무 연기, 해묵은 나무, 땀...공기 중에 느껴지는 그 뭐라 말로 설명하기 거시기한 육덕진 냄새..라고 해야할까. 살아 숨쉬는 육체들이 그 안에 가득하지 않았을까. 끈적하고 찐득하고 짭쪼름하며 확- 열기가 뻗치는 그것. 색은 구릿빛 혹은 진한 갈색빛 이라고 하면 딱 맞겠다. 아우 너무 좋네.. 여튼 그래가지고 이 책을 계속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읍내 술집이며 맥주 담배 땀냄새..는 FBI 랑 어울리지 않는데...그건 약간 육체노동자 스타일이고. FBI 는 늘 검정색 양복을 입는 걸로 상상하고 있었는데..아 근데 구릿빛 피부에 땀냄새...이런것도 나는 또 엄청 좋은데...내가 원하는 게 대체 뭘까. 막 땀을 흘린 근육질의 구릿빛 남자일까, 곱게 양복을 차려입은 FBI 일까...
오늘은 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진지하게 그리고 아주 깊게 들여다봐야겠다. 뭐가 됐든, 여튼 세야 돼. 강해야 해. 스트롱맨. 울트라 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