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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평점 :
스물 다섯, 직장에 다니던 그때. 내가 일하던 부서의 팀장은 여자였다. 나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여자. 어떤 대화중에 나는 '무섭다' , '겁난다'는 등의 단어를 내뱉게 됐는데, 그 때 팀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덩치는 산(mountain)만한 애가 왜 그리 겁이 많니?"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너무 기분이 나빴는데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대체 덩치가 크다고 겁이 없어야 된다는 건 무슨 개같은 말인가. 덩치가 커도 겁날 수 있고 덩치가 커도 아플 수 있다. 덩치가 커도 슬픔을 느끼고, 덩치가 커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도 한다. 그 날 그 말을 듣고 나는 친구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술과 안주가 놓여진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니네, 나만한 산 본 적 있냐?"
분노는 곧 웃음으로 바뀌어 우리는 그날 나의 말에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산보다는 작거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에서의 올리브도 덩치가 컸고, '천명관'의 《고래》에서 '춘희'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의 여자도 덩치가 컸지. 그러나 이렇게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소설속에서 덩치 큰 여자들이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작고 가냘프거나, 안작아도 말랐거나, 마르지 않으면 육감적으로 통통하거나 아름답다. 그런데 이 혼불에서, 아아, 나는 또 만나고야 만것이다. 덩치가 큰 여자를! 나는 덩치 큰 이 여자에게 순간적으로 공감이 되어 부들부들 떨리고야 말았다. 그녀가 시집간 첫날, 그녀의 덩치에 겁을 먹은 신랑이 그녀와 첫날밤을 치르지도 않기 때문에. 아니, 겁을 먹긴 대체 왜 먹어. 너 그럴래, 응?
밤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그러나 방안의 두 사람은 아직도 말이 없다.
오직 밀촛불만이 촛대 앞에 놓인 작은 술상과 그 술상 위의 흰 술병, 술잔, 그리고 밤, 대추, 등을 비추면서, 신부의 등뒤로 펼쳐진 백수백복(百壽百福) 병풍에 그네의 그림자를 드리워 주고 있다.
신랑 강모(康模)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림자처럼 앉아 있기만 한다.
얼마 동안이나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일까.
(크다 ‥‥‥.) (p.26)
강모는 그네가 태산 같기만 하다. (p.28)
아...슬퍼..슬프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물론 강모가 단순히 그녀의 덩치때문에 그녀랑 잠을 자지 않은 건 아니다. 강모의 마음속엔 이미 강실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실이 역시 수줍고 여리여리한 처자가 아닌가. 왜 가슴속에 여리여리한 여자를 품고 태산같은-정말 태산 같을 리가 없잖아!- 여자를 제대로 보아주지 않는가. 이 태산만큼 큰 여자는 분하다. 자신이라고 이 어린 소년을 신랑으로 두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런데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다니. 그녀는 첫날밤 신랑이 풀어주지 않은 옷고름을 자신이 스스로 푼다.
두 손으로 발을 감싸며 주무른 뒤, 그네는 다시 새 버선을 챙긴다.
초록 저고리와 붉은 치마로 갈아입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큰비녀를 뽑더니 머리를 풀어 내린다.
숱이 많고 칠흑 같은 머리채다.
그네는 잠시 그러고 앉아만 있다.
네가 나를 어찌 알고 ‥‥‥나를. (p.41)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때가 시대적 배경인데, 나는 현재가 아닌 아주 오래전의 배경을 접하게 되면 그저 막막해진다. 만약 내가 그때 태어났다면 어떤 역할이었을까, 그 신분제 사회에서 나는 어떤 신분으로 살아갔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양반이었을까? 내가 양반이었다면 하인을 막대하는 그런 양반이었을까? 나는 노비였을까? 누군가의 몸종이 되어 종종걸음치며 시키는대로 일하는 몸종이었을까? 만약 내가 몸종이었다면 그것을 현실이라 받아들이며 묵묵히 일했을까, 아니면 신분제는 인간에게 옳은 게 아니라며 이를 가는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결혼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신랑으로 맞이해 내 옷고름을 풀어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그런 삶이라니? 게다가 이 책에도 여러차례 등장하지만, 남편하고 몇 번 만나지도 못한 상황에서 청상과부가 된다면? 심지어 이 책에는 죽은 남편을 따라 자결해 열녀라 칭송되며 열녀문까지 받게 된 여자도 등장하는데, 와, 지금의 나는 대체 그 열녀가 뭔가 싶은거다. 아니, 열녀가 뭐라고, 남편이 죽었다고 내 삶까지 포기해야 하지?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삶을, 대체 왜 그들은 칭송했던걸까? 결국은 그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은 열녀 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된걸까?
물론 이 책에도 열녀를 칭송하기 보다는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 하는 여자도 나온다. 내가 왜 남편 따라 죽냐? 안그러겠다! 하는 여자.
"허엉. 열녀? 니가 멋으로 열녀를 했능가는 모리겄다마느은, 너도 참말로 불쌍헌 헛세상을 살다가 갔다. 인생이 한번 왔다가 죽고 말먼 그거뿐인디 어디 눈에 맞는 머심 등짝에라도 엡헤서 밤도망을 갔다먼 또 말도 않겄다. 속저없이 죽어간 것은 누구 보라고 헌 짓이냐고오. 너도 매급시 넘으 비우 맞출라고 애간장 녹게 아까운 목심을 덜컥, 끊었겄지마는, 그거이 무신 지랄이냐. 나는 지발도 먼저 죽은 서방 따러 죽었다고 누가 열녀라고 해 주도 않지마는, 내가 죽도 안헌다. 내가 왜 죽겄냐. 나느은 살란다아. 나는 살라안다아." (p.268)
열녀가 숭고하다 칭송받았을지언정, 나는 이렇게 말하는 옹구네에게 기립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옹구네, 당신 말이 맞소. 삽시다. 우린 살아갑시다!
혼례잔치의 음식들에 대한 묘사부터 시작해서 이 책은 재미있다. 1권만 우선 구입했다가 2,3권을 내처 구입할만큼 재미있다. 게다가 진득한 사투리의 대화는 어쩐지 따라해보고 싶어져서, 지하철안에서도 나는 입을 들썩이며 속으로 읽으며 따라해보는 것이다. 또한, 창씨개명에 대해 양반인 청암부인이 분노를 하는 것을 당연히 이해했지만, 상놈인 남자가 창씨개명이든 뭐든 우리가 언제는 인간답게 살았던가, 하고 한탄할 적에는, 아, 이름을 바꾸라는 것만이 모욕적인 게 아니구나, 하는 뒤늦은 생각도 했다. 창씨 개명이 억울하고 분한 까닭은 내가 지켜야 할 이름이나 성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애초에 지킬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분노할 힘이 남아있지 않은 건 아닌가. 그들이 체념했다고 그들을 원망할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이 분노는 슬픔이다. 분노와 슬픔은 한끗차이다.
"아, 창씬가 머인가 허능 것도 그렇제, 우리덜 쌍놈이 머 언지는 성씨 갖꼬 이름 갖꼬 살었간디요? 성짜가 있다고 빤듯이 써 볼 일이 있능교오, 이름짜가 있다고 어따 대고 떳떳허게 불러 볼 일이 있능교. 양반들이나 그렁 거 챙기제 우리가 멋 땀세 속이 상헌다요? 말이사 바로 말이제, 우리들 이름이랑 거이 맹랑허다고요. 달구새끼, 뒤야지, 퇴깽이 이름이나 머 매한가지 아닝교?" (p.250)
청암부인은 자꾸만 《토지》의 서희를 떠올리게 한다. 기개와 위엄이 그렇다. 이 책은 재미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토지 만큼은 아니다. 그러나 효원이 궁금하다. 그 큰 덩치로 남편과 합방한 적이 없는데 아들을 낳으라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며 대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하고, 강실이를 품은채로 종가집의 종손인게 싫어 어디로든 도망가려는 강모의 삶도 어찌될지 궁금하다. 한사람 한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누군가의 삶을 책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퍽이나 흥미로운 일이며 고맙지만 간혹 미안하기도 하다. 많은 부분들이 달라졌다고 해도, 사람 사는 건 어디나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돈을 제대로 쓰는 부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닫는다. 책속의 오래전 사람들에게 나는 배우고 또 배운다. 이렇게 배우면서 나는 오늘 하루를 또 살아간다.
문득 강실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하기야 '문득'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네는 그저 습기처럼, 모습도 보이지 않으면서 무심코 느껴 보면 언제나 촉촉히 강모를 적시우고 있었으므로. (p.127)
"실제로는 어때? 토지 없는 농민이 대다수다. 실제로 땅바닥에 엎드려서 고개 들 날이 없는 사람은 제 땅이라고는 한 뼘도 없는데, 하얀 주먹 쥐고 앉아 소출을 고스란히 받아먹고 있는 몇몇 사람은 아무 일도 안하고 불로소득이야. 손가락 까딱 않고 앉은 자리에서 받아들이는 재산이 얼만 줄 알어? 이게 모순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단 말이냐?" 강모가 무어라고 미처 하기도 전에 강태는 손바닥으로 밀어내듯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던진다. "강모 너도 나면서부터 가진 게 너무 많아. 그러니 부르조아 맛이 너무 들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까?" "형." "그렇게 해서 자연히 인간 사회에 계급이 생길 수밖에.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심을 품고서 말야. 낡은 부르조아지 사회의 근원적인 모순이지. 있는 자는 없는 자를 경멸하고, 그러면서도 노동력을 착취한다. 반면에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증오하고, 그러면서도 생존을 위하여 노동력을 바친다. 이게 얼마나 야비하고 비굴한 상태냐. 이런 체제는 반드시‥‥‥무너져야 한다. 무너뜨려야 한다." (p.140-141)
"형이 가진 생각은, 혼자서 하게 된 건가요? 아니면 강호형‥‥‥." "배우기도 하고 책도 읽지. 또 나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던 일들이기도 하고. 무릇 사상은, 제 속에 그런 소양이 있을 때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니까." (p.141-142)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 (p.155)
"네 말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자기 가솔을 굶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열 섬지기 짓는 사람은 이웃에 배 곯는 자 있으면 거두어 먹여야 하ㅑ느니라. 백 섬지기 짓는 사람은 고을을 염려하고, 그보다 다른 또 어떤 몫이 있겠지. 우리 집은, 집이라도 그냥 집이 아니라 종가다. 장차로 내려온 핏줄만 가지고 종가라고 한다면, 그게 무에 그리 대단하겠느냐? 그 핏줄이 지닌 책임이 있는 게야. 장자란 누구냐? 아버지의 맞잡이가 되는 사람 아니냐? 아버지를 여의면 장자가 아버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장자는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지. 그렇다면 그런 장자로만 이어져 내려온 종가란 문중의 장자인 셈이다. 어른인 게지. 어른 노릇처럼 어려운 게 어디 있겠느냐? 제대로 할라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어른 노릇이니라." (p.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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