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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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쓰기에 적당한 공간은 연구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집필 작업은 연구실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어디를 가든 태블릿 피시와 함께했다. 첫 원고는 도쿄 롯폰기힐스 앞의 스타벅스에서 시작되었지만, 방콕 발 깐짜나부리행 기차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리즈번에서 골드코스트로 가는 기차에서 쓴 원고도 있다. 어떤 원고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다투기도 하고 심지어 공부까지 하는 일산 웨스턴돔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서, 또 다른 원고는 물건 파는 잡상인도 등장하고 노약자 배려석을 두고 언쟁도 벌어지는 지하철 3호선 안에서 썼다. 그렇게 쓴 원고는 잠이 부족한 직장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거나 이어폰을 기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음악도 듣고 다운받은 '미드'도 보고 팟캐스트도 듣는 일산과 강남을 오가는 M7412번 버스에서, 강남역에서 아주대학교까지 가는 3007번 버스속에서 수정되었다. (p.9)



이 책을 읽으려고 펼치면서 머리말에서 만난 위 문장들이 천천히 눈앞에 그림처럼 그려졌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쓰기 위해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틈틈이 몰두하는 저자의 모습과(나는 저자의 얼굴을 모르지만), 지구상의 이쪽과 저쪽,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어딘가에서 집필하는 모습들이. 그리고 그 모습들은 꽤 낭만적이고 이상적으로 여겨져서 부럽기까지 했다. 왜 나는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장소에서 매일 같은 일을 하고 있는걸까, 하고. 만약 내가 집필활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나 역시 노트북을 들고 포르투갈로, 미국으로, 덴마크로, 스웨덴으로 가서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삼아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해보았다. 그러나 이건 꿈같은 일이다. 포르투갈로, 미국으로, 덴마크로, 스웨덴으로 갈 돈이 어디있담? -_-



머리말에서 만난 이 낭만적인 기분을 느끼는 건 잠시뿐. 이 책을 넘기다보면 자꾸만 뜨끔뜨끔한다. 나라는 인간. 합리적이고 나름 성실하게 한 사람의 역할을 다 하며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나 모순된 인간인지를 노명우가 자꾸 콕콕 찔러주는 것 같았달까. 특히 '유권자'와 '소비자' 부분에 대해서는 더 그러했다. 뜨끔뜨끔..






좋은 삶은 선물 받을 수도 없다. 좋은 삶은 삶의 주인의 오랜 습관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좋은 삶은 착한 삶과 동일하지 않다. 착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바보'는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이지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좋은 삶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선한 의지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현실은 선한 의지만을 가진 사람을 겉으로는 칭찬하지만, 그 사람에게 좋은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의 현실적 삶은 좋은 삶이라기보다, 빈한한 삶에 가깝다. (p.17)

우리 시대의 '럭셔리 열품'은 여성적 현상만은 아니다. 미국이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있다는 유명한 말처럼, 된장녀는 반지하에 살면서도 골프라는 럭셔리한 취미를 즐기는 남자, 손수 자동차를 몰지만 에쿠스만을 고집하는 남자, 21년산 위스키를 맥주와 섞어 구정물 맛이 나는 폭탄주로 만들어 삼키는 남자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사치에 관한 한 양성평등은 법률적 양성 평등보다 더 빨리 이뤄졌다. 된장녀를 희생양으로 내세울 경우, 우리는 오히려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럭셔리 열풍'이라는 마법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된다. (p.36)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ㅇ르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나도 탐이 난다. (p.39)

최소한의 비용으로 상층의 과시적 소비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면세점 100퍼센트 활용법'과 명품 아웃렛 정보 수집에 두뇌 활동의 대부분을 할애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화한다. 유권자일 때 유효하던 1인 1표제라는 민주주의의 놀라운 평등은, 소비자로 변화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힌다. 유권자는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 축적된 부를 단죄하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만, 소비자로 변화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승자와 패자로 분리된다.(p.40)

세련된 국제 수준의 표준화된 간판과 실내 인테리어 그리고 포장지까지 화려해졌지만,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의 합리화된 외양과는 달리, 그 체인망이 제공하는 일자리는 고작해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일 뿐이다. 합리화의 끝에서 만나는 어이없는 비합리성은 합리화된 대학도 피해갈 수 없다. 강의 평가로 강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면, 높은 강의 평가 점수를 받기 위해 강의는 오히려 하향 평준화된다. 대학 경쟁력을 높인다고 영어강의 비중을 대학 평가의 지표로 사용하면, 대학들은 앞다투어 영어강의 비율을 확대한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강의실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학문 탐구라는 진지한 목적이 아니라 영어로 강의를 한다는, 영어로 강의를 듣는다는 만족감 뿐이다. (p.50-51)

공감은 동정이라는 따듯한 감정으로 냉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다는 낭만적인 태도와도 거리를 둔다. 동정의 다리 위에선 이따금 불우이웃돕기 모금이나 자선바자회가 열리지만, 공감의 다리 위에선 복지라는 제도의 나무가 자란다. 공감이 복지를 감정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복지는 공감에 제도의 옷을 입힌 것이다. (p.127-128)

개인적 성공은 소유한 승용차의 크기와 은행 잔고로 측정될 수 있겠지만, 사회의 성공 여부는 공감이 제도화된 복지의 크기와 넓이로 가늠할 수 있다. 하늘이 혹은 계급이 선택한 소수의 사람만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동정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독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회가 홀로 성공하는 게 더 좋다. 복지국가는 성공한 소수의 개인보다는 성공한 사회가 공공선에 가깝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성공의 단위는 하늘이 돕는 개인뿐이라는 오래된 사유의 관습과 이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지국가와 만날 수 있다.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기계발서가 그 나라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기계발서는 읽을 만큼 읽었다. 이젠 그 책을 덮고 한번 물어보자.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인지,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 이었기 때문인지. (p.128)

강제에 의해 억지로 해야 하는 행위를 하며 신바람이 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억지로 하는 일은 하는 시늉마 내지, 자신이 하는 활동에 대한 애착도 긍지도 몰입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 행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돌변한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동작이 굼떴던 사람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며,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던 사람도 하룻밤쯤은 거뜬히 지새울 수 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자발성이다. (p.153)

먹고살기 위해 취직으로 시작한 임금노동을 사표를 내던지며 그만둘 수 있다면 그보다 짜릿한 순간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나 홀로 탈출을 기도하는 임금노동자는 매일매일 마음속으로는 사표를 쓰지만, 의지할 곳은 복권뿐이다.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김대리 앞에는 전문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임금노동자에 불과한 대학교수도, 월급쟁이 의사도, 마트의 비정규직 종업원도 서 있을 수 있다. 복권을 사는 사람의 소박한 소원은 당첨이 되어 마음속으로 수백 번 쓰고 또 썼던 그 사표를 마침내 내던지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복권의 유일한 효용가치는 이런 백일몽을 꿀 수 있는 권리이다. 퇴근길 혼잡한 지하철에서 혼자 웃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선 복권 당첨이라는 짜릿한 백일몽이 상영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해결책은 꿈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복권 따위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세상에는 여전히 복권을 사는 사람과 더이상 복권에 기대하지 않고 연대라는 죽어 버린 단어에 귀 기울이는 두 종류의 임금노동자가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p.193)

'콜드 팩트'와 마주했을 때 발생할 고통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모르고 있고, 고통을 치유해 준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당신 마음 속의 고통을 끝없이 만들어 내는 어떤 존재가 있다. 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콜드 팩트'라 부를 수 있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삶은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 채 치유될 수 없다. 이 명확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혹은 마치 상처받은사회가 치유되지 않아도 개인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우리가 좋은 사회 속에 살고 있지 않아도 개인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권유는 성공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긍정성으로 뒤범벅된 자기계발서만킁이나 거짓말에 가깝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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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6-2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참 괜찮지요?
글을 쉽게 알아 먹게 잘 써주고
또 꽤나 여러번 뜨끔뜨금하게 만들어주니 말이에요.





다락방 2014-06-23 13:46   좋아요 0 | URL
제가 밑줄을 그어놓질 못해 여기에 옮기질 못했는데, '보수는 사람을 향해 거짓말을 하고 진보는 사물을 향해 말한다'는 구절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 보수인 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강경히 유지하고 있고, 진보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자들은 '우리편은 무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뭔가 머리가 띵-해지는 구절이었어요.

아무개 2014-06-23 14:10   좋아요 0 | URL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도 좋은 글이 참 많아요.
제목만으로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 안드십니까? ^^:::

저는 첫 부분에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라'양식'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 있었던게 제일 기억에 많이 남네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내가 믿고 있는 상식이 언제나 옳은것은 아니라는걸...
여러모로 내 생각을 깨주는 부분이 많아서 좋더라구요.

단발머리 2014-06-24 10:06   좋아요 0 | URL
저는 위의 책을 어서 읽고 싶은데, 아무개님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도 좋은 글이 많다고 하시니, 저는요, 무척이나 바쁘답니당~~~ *^^*

단발머리 2014-06-2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바로 읽어야겠는데, 머리를 팡팡! 내려치는 좋은 구절이 많아 줄을 치다보면 읽는 게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저는 특히 요 대목...

<'면세점 100퍼센트 활용법'과 명품 아웃렛 정보 수집에 두뇌 활동의 대부분을 할애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화한다.>

...이 눈에 들어 오네요. 합리적 소비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사실 눈먼 소비자가 되는 건데요.
대단하네요, 이 책이요. 노명우라는 사람도요.

다락방님 페이퍼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제목만 아는 책이 되었을텐데, 다락방님이 많이 인용해 주셨지만, 저도 직접 읽어보고 싶어요. 추천 감사해요~~~~~

다락방 2014-06-24 11:55   좋아요 0 | URL
저도 소비자와 유권자 부분에서 뜨끔했어요, 단발머리님.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게다가 중산층이 럭셔리풍을 좇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도 사실인 것 같고요. 제 자신이 모순적이란 걸 들여다보게되서, 허황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참 씁쓸한 독서였습니다.

네, 단발머리님도 읽어보세요.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도 살짝 끌리지만 전 음...중고알림등록 해놔야겠네요. ㅋㅋㅋㅋㅋ

dreamout 2014-06-24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를 읽으시면 아마도 폭풍공감하실껄요~ ㅎㅎㅎ

다락방 2014-06-24 14:10   좋아요 0 | URL
폭풍공감...이란 말씀이십니까??? 이런 ㅋㅋㅋㅋㅋㅋ 읽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