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포르투갈인가요?
얼마전 나의 후버까페는 자신의 트위터에 사진을 한 장 올렸다. 그 사진을 보고 나는 이런 멘션을 보냈다. '이것은 마치 《저지대》의 가우리가 혼자 산책하고 혼자 앉아 다른 사람들을 보았던 바로 그 학교의 풍경같다' 고. 그러자 후버까페는 맞다며 자신도 《저지대》를 읽으며 이런 풍경을 떠올렸었다고 했다.
이 대화는 조금 시간이 지난후에, 며칠 뒤에 아주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먼 곳에 있는 친구가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 같은 풍경을 상상하고 떠올렸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이 경험이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해서.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니!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나이나 성별이 같은 것도 아닌데,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니. 혼자 가만히 이 일을 떠올리면서도 씨익 미소지을 수 있었다. 아, 행복해.
지난 금요일. 그 날은 먼 곳에서 오는 친구를 만나는 날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기 전,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나는 까페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졸음이 쏟아져왔고, 결국 나는 그 친구와 그 날 함께 묵기로 했던 호텔에 짐을 두려고 혼자 먼저 들렀다가, 침대의 강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드러누웠다. 아, 그리고 잠에 빠졌다. 한 삼십분간, 정말로 자고 일어났고, 그리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하하, ㅂㄱㄹㄴ님을 처음 뵙게 됐는데, 나는 그 앞으로 가 겁도 없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넨 뒤, 저 누구게요? 라고 물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는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했다. 또한 그 날 두번째로 뵙게 되는 ㅅㅂㄷㅇ님께도 인사를 건넸는데, 그 분은 내게 '책은 잘 팔려요?' 라고 물으셨고, 나는 '아니요 안 팔려요' 라고 답하면서 함께 웃었다.
또한 오랜 벗인 ㅅ 님과 내가 친구라는 사실이 기뻤다. 나를 보자 알은체를 해주시는 ㅅ 님에 대해 솟아오르는 다정한 마음, 이랄까. 히히.
나는 내가 오랜 시간 다정한 벗을 옆에 둘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이, 다시 보는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이 모든 작은 일들이 자꾸자꾸 생각났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건, 내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어서,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 지난주에 강하게 나를 공격했던 외로움과 우울증은, 금요일과 토요일을 보내며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안락함이, 편안함이, 소중함이, 다정함이, 그리고 행복함이 찾아들었다. 나는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여도 무척 좋을거라고, 이대로도 참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지 못한 채 영화를 봤다.
영화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매 사건의 개연성이 떨어져, 나는 영화속 등장인물들 중 누구에게도 몰입을 할 수가 없었고, 누구에게도 감정 이입을 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으니 영화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감동이어야 할 장면이, 사랑스럽거나 슬퍼야 할 장면이 그 감정 그대로 내게 다가오질 못했다. 그 자리에는 의문들만 찾아왔다. 왜? 왜 갑자기 저렇게 리스본으로 떠나? 왜 갑자기 혁명이 사랑이 됐지? 왜 사랑이 갑자기 이별이 됐지? 그 모두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님은 당연하지만, 그 당연함을 자연스럽게 풀어내지 못해서 나는 그들이 될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뭐야 별로잖아, 라는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이 책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이 영화속의 결말을 책에서 어떻게 자세하게 풀어냈을 지 그걸 꼭 읽어보고 싶었다. 안그래도 잘 읽히지 않는 책이라 영화만 보고 책 읽기는 포기할까 했는데, 영화속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거다. 그 결말을 꼭 책으로 확인해야지, 하는 마음에 책을 다시 펼쳐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어려웠던 이유는, 책 속의 등장인물인 '아마데우'가 쓴 책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념과 관념으로 가득찬 그의 책이 도무지 내가 읽어 소화해낼 수 없는 책으로 여겨진거다. 내가 딱 싫어하는 책 스타일이랄까. 이를테면 이런거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p.28)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384)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이런 문장들에 푹 빠져서 그를 찾아 리스본으로 떠나지만, 나는 도무지 이런 문장들에 아무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는거다. 이토록 추상적인 문장들,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문장들이 내게는 벅차게 느껴지는거다. 그레고리우스는 고전학자이고 여러개의 외국어를 습득한 사람이니, 이런 문장들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기 어렵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좋아했지, 나는 이런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면 몇 장 읽지도 못한채로 멘붕에 빠졌을 것 같은거다. 이게 뭔말이여...하고. 이것이 글이 아니라 말이었어도 마찬가지. 만약 처음 만나는 누군가가 내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일까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할까?' 라고 물었다면, 나는 그 사람과 두번째 만남을 기약할 수는 없었을 거다. 글쎄요,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네요, 돈까스 좀 드셔보세요, 라고 나는 대꾸하지 않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레고리우스가 푹 빠진 책에 나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어서 이 책과 내가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두시간짜리 영화로 만드는 데는, 당연히 많은 생략과 각색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제 늦은밤까지 책을 다 읽은 지금, 마리아 주앙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스테파니아와 아마데우의 관계도 좀 달라 안타깝지만, 안과의사인 '마리아나 에사'에 대한 과도한 생략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처음 포스트잇을 붙였던 부분이, 이 마리아나 에사가 나오는 부분이었는데 말이다. 영화속에서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책 속의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다. 전문적이고 세심하며 따뜻한 여성인데, 이는 내가 오랜 기간 안경을 맞추면서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그녀가 포르투갈에서 행하고 있었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이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그런 안과의사를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아마 앞으로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 의사인 것이다.
지독한 근시인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갈에 도착해 그 낯선 곳에서 안경을 깨뜨린다. 그래서 안과를 찾아가는데, 마리아나 에사는 그곳에서 만난 안과 의사이다.
그는 의사가 보조안경을 재보고 일상적인 시력검사를 한 다음 안경점에 가져갈 진단서를 끊어주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선 온갖 단계적 상황과 불안을 포함하는 그의 근시 내력을 듣고 싶어 했다. 이야기가 끝난 다음 그가 안경을 내밀자 그녀가 주의깊게 살펴보며 말했다.
"잠을 푹 주무시지 못하는군요."
그러고는 기계가 있는 한쪽 구석으로 가라고 했다.
진찰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의사는 마치 새로운 풍경에 익숙해지려는 사람처럼 아주 세밀하게 검사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세 번이나 반복되는 시력검사였다. 그녀는 검사 도중에 잠깐씩 쉬면서 그를 왔다갔다 걷게 하고, 그의 직업에 대해 묻기도 했다.
"시력을 결정하는 건 여러 가지 상황이거든요." (p.83-84)
근시에 대한 내력을 듣고 싶어하고, 쉬는 시간을 줄 정도로 검사를 반복하는 게 내게는 정말 신기했다. 나는 라식수술을 할 때조차도 검사가 빠른시간내에 끝났으니까. 지금도 많은 안과에서는 예약만 하면 그날 검사와 수술까지 모두 마칠 수 있다는 광고를 하지 않는가. 안경을 쓰던 그 오랜기간, 나는 안과에 가서 시력 검사를 받은 기억도 없다. 그저 안경점에 가 후다닥 시력 검사를 하고 안경을 혹은 렌즈를 맞추었을 뿐. 안경점의 직원 그 누구도, 그리고 그간 몇차례 갔던 안과에서의 닥터들도 아무도 내 시력에 대한 내력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어서 빨리 진찰하고 다음 환자를 혹은 다음 손님을 받아야 하니까. 이건 비단 안과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비인후과, 내과도 마찬가지다. 나는 비염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곧잘 찾는데, 그곳에서 닥터가 나를 진찰하는 시간은 콧구멍을 들여다보고 콧물을 다 빼내는 일까지 다 포함해도 삼 분도 채 되지 않는다. 대기실에는 환자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쉬는 시간을 주고 말을 걸며 시력을 결정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고민하는 안과 의사라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런 의사를 신뢰하지 않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실제로 그레고리우스 역시 익숙한 것에 신뢰감을 갖던 사람이었지만, 이 안과 의사를 신뢰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검사가 모두 긑난 다음 나온 안경 도수는 다른 때와 아주 달랐고, 두 눈의 시력 차이도 평소보다 많이 났다. 의사가 어리둥절해 있는 그의 팔에 손을 살짝 대며 말했다.
"일단 한번 써보세요."
그레고리우스는 방어 심리와 신뢰감 사이에서 흔들렸지만, 결국 신뢰감이 이겼다. 의사가 안경 가게 주인의 명함을 주고,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포르투갈어를 듣자 키르헨펠트에서 만난 신비한 여자가 "포르투게스"를 발음할 때 느꼈던 요술 같은 감정이 되살아났다.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이 갑자기 의미 있는 일로 변했다. 물론 이 의미는 특정한 이름으로 불릴 수는 없었고, 또 말로 표현함으로써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는 의미였다.
"이틀 후면 된답니다. 세자르 말로 더 빨리는 도저히 안 된다는군요." (p.84)
시력 검사를 하고 이틀후에야 안경을 찾아 쓸 수 있다니, 너무 오래걸리는 바람에 나라면 아마 미쳐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모든걸 잽싸게 진행하는 이곳에서 내가 지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지, 만약 내가 포트루갈에서 오랜시간 살고 있었다면, 이틀후의 안경은 아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듯 안경점에서 안경을 맞출 진단서를 다 끊어주고 나서 안과 의사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안경이 다 되면 한번 들르세요. 제가 올바르게 진단했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p.85)
아...진짜, 너무 멋지다! 나를 진찰한 닥터와 조금 더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그것이 더 나은일인지 혹은 옳은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한 명의 환자 라고만 대하는게 아니라 시력이 나쁜 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 같아 다정하게 느껴지는거다. 멋지다. 이런 닥터를 만나는 게 이 곳에서도 가능할까? 포르투갈에 가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나가 더 추가되는건가?
그리고 마리아 주앙.
아, 마리아 주앙.
마리아 주앙은 아마데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였다. 오랜 시간 그의 친구였고, 그녀는 그에게 언제든 부엌을 내주어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며, 그의 글을 보관하고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데우는 마리아 주앙이 아니라 파치마와 결혼했고, 마리아 주앙이 아니라 '에스테파니아'를 사랑했다. 에스테파니아에 대한 아마데우의 사랑이 어떠했는지는 '주앙 에사'가 잘 말해준다.
그전에는 눈치만 챘다고 한다면 난 이때 확실하게 알았소. 아마데우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 그와 파치마 사이가 어땠는지 난 당연히 몰라요. 그때 브라이턴에서 두 사람을 본 게 다니까. 하지만 에스테파니아를 향한 그의 마음이 그때와는 아주 다르다는 건 확실했소. 훨신 거칠었고, 폭발하기 전의 들끓는 용암 같았지. (p.370)
거칠었고, 폭발하기 전의 들끓는 용암같은게 어떤 것인지, 나는 충분히 짐작한다. 몇해전의 여름에 나도 들끓는 용암 같았으니까.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해 힘이 들었으니까. 이 마음을 조금쯤은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 억지로 입술을 깨물면서도, 그러나 그게 잘 되질 않아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했던 때가 있었으니까. 소파에 가만히 앉아, 그 힘든 시간을 눈물로 보내던 때가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때 폭발했어야 했는데. 폭발하고 터뜨려서 가라앉았어야 했는데..
아마데우는 에스테파니아를 향해 들끓는 용암 같았고, 마리아 주앙은 아마데우의 플랫폼에 서있는 여자였다. 학창시절부터 그와 친구였고, 오랜 시간을 그의 친구로 남아있는 여자, 마리아 주앙. 그러나 나 역시, 에스테파니아 보다는 마리아 주앙이 되기를 선택했을 것 같다. 오랜 시간을 옆에 머무를 수 있도록. 그의 '여자'가 되기보다는 그의 '친구'가 되어, 한때 옆에서 뜨겁게 불타오르다 사라지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을 것 같다.
"오페라글라스로 날 찾던 귀족 집안의 아들. 그건‥‥‥, 뭔가 특별한 일이었어요. 이미 말했듯이 희망을 품게 했지요. 그 희망은 아직 순진한 형태였고, 또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물론 확실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흐릿하기는 해도 함께하는 삶에 대한 희망이었어요." (p.459)
물론 마리아 주앙이 선택한 게 아니었다. 나는 너의 여자 대신 너의 친구가 될게, 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마리아 주앙은, 만약 아마데우가 그렇게 하자고만 했다면,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함께하는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희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마데우는 저기, 저 창문 옆에 앉아 있었어요. 모두 아는 내용이라 심심했던 그는, 저에게 짧은 편지를 써서 쉬는 시간에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곤 했어요. 그건‥‥‥, 그건 연애편지가 아니었어요. 내가 바라던 게 쓰여 있는 편지가 아니었어요. 늘 아니었죠. 아마데우는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적었어요. 아빌라의 테레사나 그것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어요. 그는 나를 자기 사유세계의 주민으로 만들었던 거예요. 그가 말했지요. '그곳에는 너밖에 없어. 나 말고는.'
하지만 그는 내가 자기 인생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았어요. 난 그걸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지요. 설명하기 무척 힘들긴 한데, 그는 내가 바깥에 있길 원했어요." (p.460)
오페라글라스로 날 찾는 게, 쉬는 시간에 쪽지를 넣어주는 게, 왜 사랑이 아니었을까.
"아마데우는 기차를 좋아했어요. 기차는 그에게 삶의 상징이었어요. 난 같은 칸에 함께 타고 싶었지만, 그가 원하지 않았어요. 아마데우는 내가 플랫폼에 있기를, 그래서 창문을 열면 내가 언제든지 자기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길 원했어요. 그리고 그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플랫폼도 함께 떠나길 바랐어요. 난 기차와 완벽하게 똑같은 속도로 달리는 플랫폼에, 그 공중의 플랫폼에 천사처럼 서 있어야 하는 거였죠." (p.460-461)
마리아 주앙은 그와 하나의 부엌을 함께 쓸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내 부엌은 니 부엌, 그것은 우리의 부엌, 이 될 순 없었다. 그러나 나의 부엌을 그에게 빌려줄 수는 있었다. 그는 잠깐 들러 내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아 자신이 쓰고 싶은 말을 쓸 수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마리아 주앙이 희망했던 함께하는 삶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렇게 되기는' 했다.
"어쨌든 그렇게 되기는 했지요. 함께하는 삶 말이에요. 가깝지만 먼 곳에서, 멀지만 가까운 곳에서 둘이 함께한 삶‥‥‥,"(p.460)
내가 은근히 품고 있는 희망이 절망이 될 것임을 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함께하는 삶을 꿈꿨지만, 그것이 내가 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켜보는 것도 슬픈 일이고.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가 내 옆에 오래 머무른다는 건,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은가. 그 다른 방식에서 의미를 찾고, 또 그 의미가 행복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안다. 함께 기차를 타고 그렇게 옆자리에 앉는 것만이 사랑은 아닌 것이다. 우정도 사랑의 수많은 갈래들 중 하나이고, 플랫폼에 서 있는 것, 그것이 그가 편하고 또 내가 편하다면,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사랑인 것이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가슴속에 무한한 사랑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던 것처럼, 내 이름이 그의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온 순간, 내게 닿아 미소를 불렀던 것처럼, 나는 그마음 그대로를 담아 플랫폼에 서 있으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는 함께 기차에 타는 것이 내자리일 것이고, 그리고 그를 만났을 때에는 플랫폼에 서 있는게 내 자리일 것이다. 나는 지금의 내 자리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내가 이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 행복했다.
돌이켜보면 내 행복은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내가 선택할 것이다. 때로는 기차에 올라탈 것이고, 때로는 플랫폼에 서있을 것이다.
금요일과 토요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자꾸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 다이어리를 펼쳐 일기를 썼다. 잊지 말아야지, 지금 이렇게 행복하다는 생각, 잊지 말아야지. 금요일과 토요일에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들, 그들이 건넨 말들, 그리고 내가 건넨 말들, 함께 앉았던 순간들, 함께 걸었던 순간들. 모두 기억해야지.
어젯밤 23:42. 나는 이 책을 읽다말고 책에서 시선을 들어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 시간, 어딘가에 나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까, 하고 궁금해했다. 이것은 외로움이 아니었다. 다만 순수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이 늦은 시간, 잠을 자는 대신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할까? 하는.
일요일인 어제는 날이 좋았고, 땀을 줄줄 흘리면서 일자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행복했지만, 올라가는 길에는 전효성의 노래를 들었다. 키야-
그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놀랐고, 그의 괴상한 성격에 머리를 가로젓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레고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정말 알고 있었다. (p.101-102)
"옷을 좀 사지 그래요?" 첫 줄에 앉은 학생이었던 플로렌스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그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내가 되었을 때, 이런 태도는 곧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스어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아요." 다시 혼자 살게 된 19년 동안 옷 가게에 간 적은 두세 번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도 옷 때문에 잔소리를 하지 않는 생활을 즐겼다. (p.118)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친자식을 동물처럼 도살하라고 요구했음을.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느끼는 분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과 논쟁하려 한다고 욥을 비난하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기가 겪는 상황을 도저히 이애할 수 없는 욥을? 욥을 그렇게 만든 게 누구던가? 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불행에 빠드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그러는 것보다 덜 부당할 이유는 뭔가? 욥이 풀평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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