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동안 볼거라곤 짜장면집 밖에 없었던 차이나타운을 다녀왔고, 수목원을 다시 찾기 위해 대전엘 갔다. 대전에 도착했을 때, 대전역앞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는 걸 봤다. 나보다 일찍 도착한 친구는 나를 기다리며 알라딘 중고샵에 가있던터라, 나는 친구가 나에게로 오면, 친구와 함께 분향소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어쩌면 친구는 분향소에 가는걸 불편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유가 됐든, 그러니까 너무 아파서 혹은 슬퍼서 괴로워서 미안해서 등등,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친구에게는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그래, 나때문에 따라가느니 분향소라는 곳은, 원하는 때, 원하는 사람이 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서점에 간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나혼자 분향소를 찾았다. 입구에 마련된 국화를 한 송이 들고 앞에 놓으며 잠시동안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는데,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다짐해야할까. 그 다짐과 맹세들은 내것일까 남의것일까. 잠깐동안 남들이 다했을법한 다짐들을 속으로 되새기며 분향소를 나왔다. 분향소를 나오니 저 멀리에서 친구가 내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내가 여기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말했다. 분향소에 다녀왔다고, 너 오면 같이갈까 했지만 혹여라도 네가 불편할지도 몰라서 다녀왔다고. 만약 그때 친구가 자신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면 나는 다시한번 같이 가주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나를 기다리며 이미 다녀왔노라고 했다. 친구 역시 나를 기다렸다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고 그러나 자신은 그곳에 다녀왔다. 그순간, 나는 이 친구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그전보다 더 좋게 느껴졌다.
연휴동안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들이 몇 개 있었다. 대전에 놀러가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리 줄이 길어도 성심당에서 튀김소보로를 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평소의 나는 여러차례 대전에 내려갔어도 성심당에서 빵을 팔든 떡을 팔든 관심없었는데, 튀김소보로가 유명하다는 말에 여동생이 먹어보고 싶다고 했고, 마침 연휴를 이용해 여동생이 우리집에 오기로 되어있었던 거다. 기회는 이때다. 나는 대전에 가있다가 여동생이 왔다는 문자메세지에 기차표를 이십분 뒤로 미뤄 성심당의 그 긴줄에 섰고, 드디어, 득템을 했다. 게다가 어린이날을 맞아 조카에게 '뭐갖고싶니' 라고 물었더니 '리본 머리띠' 라는 답을 들은터라 그래, 직접 리본 머리띠를 선물로 줄 수도 있겠다 싶어, 부랴부랴 조카가 좋아하는 분홍빛의 리본 머리띠를 골랐다. 튀김소보로와 리본 머리띠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만족스러웠다. 이 두 가지를 다했어!
조카는 감기를 앓고 있었고 기침이 매우 심했다. 전날 초저녁부터 잠이든터라 다음날인 어제 일찍 일어난 조카는 신나게 놀다가 점심무렵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여행과 반복되는 음주, 일찍 일어나 조카와 놀았던 그 모든것들까지 피곤했던 나는 조카 옆에 함께 누워 잠을 청했다. 조카는 자다가도 기침을 했고, 그때마다 나는 번쩍 눈을 뜨고 자는 조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이가 기침을 하면 등을 두드려줘야 한다고 여동생이 말했었고, 좀전에 조카를 재울때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하는걸 보았던터다. 몇차례, 조카는 기침을 했고 나는 등을 두드려주었다. 조카의 기침 소리가 유독 컸다고 느껴질즈음, 나와 조카가 잠든 방의 방문을 빼꼼 열고 여동생이 들어왔다. 둘째를 재우고 거실에 나왔다가 기침 소리가 들려 들어온건데, 내가 조카를 두들겨주는 걸 보더니 '언니 있었구나' 했다.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그 한마디 말에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언니가 있어서 안심이라고, 잘해줘서 고맙다고.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뒤로 미루고 미루던 줌파 라히리의 책도 연휴동안 읽자고 다짐했었는데, 낮술과 저녁술까지 빽빽한 일정들 속에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잠깐 까페에 들러 읽으면서 몇 문장을 가슴에 담고, 딸기바나나 스무디와 함께하는 이 온전한 시간에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머지 부분들을 읽어나갔다. 자정 무렵에야 독서는 끝났고,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잠들면서, 잠이 깬 오늘 아침까지도 나는 슬프고 아프고 외로워서 가슴이 쿡쿡 쑤셔옴을 느꼈다.
자신의 의도가 옳았으나 자신이 시도한 방법이 잘못된 것을, 죽음이 임박해오던 시점에 깨달았던 우다얀. 동생을 향한 열등감에 시달렸으나 동생을 사랑했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언제 바스라질지 몰라 겁내하던 수바시. 엄마의 불행을 온몸으로 느끼며 결국 버려짐을 감당해야 했던 벨라. 그리고 이 모든 중심에 자리 잡았던 가우리.
가우리가 야속할 때가 있었다. 그 야속할 때는 내 가슴을 탁탁- 치고 싶었다. 가우리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하고 싶었다. 그런 선택을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렇듯이. 어떤 시절의 나. 그때의 나는 그 잘못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거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채로 저지르고 있었다. 이 선택에 후회는 없을거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이 나를 점점 더 조여왔고, 나는 어느날 악몽을 꾸었고, 반복되는 나쁜 일들에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이라는 생각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먼훗날,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런 정도의 일을 저지르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고.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그때는 멋도 모르고 저질렀다고.
가우리가 그런 나같았다. 그당시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그녀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선택했다. 그러나 그 선택들이 가져온 결과들은 결코 최선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게도 그랬고, 그녀가 사랑했고 또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그리고 그녀의 그 선택은 모두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외로웠고, 수바시도 외로웠고, 벨라도 외로웠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할 일을 묵묵히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찾아 그 길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걸어가면서, 가끔은 누군가를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그들은 외로웠다. 그들에게 깊이 박힌 그 외로움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수바시의 유학시절 룸메이트가, 죽어가는 그때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고통을 알렸던 그 장면에서, 나는 이 모두의 외로움이 마치 내것처럼 느껴져서 슬펐고, 어쩌면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사는것이, 그리하여 내가 혹은 상대가 고통스러울 때 그렇게 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 최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면서 혼자 지내는 것은, 분명 내가 추구해왔던 것이고 결국 내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결혼을 생각했다. 결혼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제도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열이 끓어오르면 내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다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내가 늙어 죽어갈 때, 내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대전에 집을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다고 말하던 내게 친구가 하던 말도 떠올랐다. 결혼을 하는건 어때? 그렇다면 너의 절반의 부담은 그가 짊어질 수 있잖아, 하던. 나는 그때, 그렇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내 그 절반 때문에 그랑 사는 기분이 들 것 같아 싫어, 라고 말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앞으로 살아가면서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그때 절반을 늘 내 옆의 상대가 부담해줄 수 있는게 아닐까. 수바시와 우다얀과 가우리와 벨라가 너무 슬퍼서, 나는 이런 생각까지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볕이 좋은 날이었고, 딸기바나나 스무디는 맛있었다. 책속 문장들은 감탄스러웠고, 나는 포스트잇을 붙여나갔다. 마침 그 볕에, 마침 이런 문장이었다. 약속 장소에 약속된 시간에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 이미 한참 늦어버린 가우리, 그런 그녀를 기다리던 우다얀이 만나던 이런 문장.
그는 거기 있었다. 영화관 밖, 벌써 영화의 1부를 보고 난 소감을 나누는 몇몇 무리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우다얀은 손을 들고 고개를 그녀의 얼굴 쪽으로 기울이며 둘의 머리 위에 조그만 손차양을 만들었다. 그 동작에 그녀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그와 단둘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인들과 이 도시의 인파로부터 안전하게 비켜나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그의 표정은 짜증이나 조바심이 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게 된 기쁨만 서려 있었다. 그녀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던 듯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일부러 터무니없이 늦게 나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의 영화 내용을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그가 영화표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는 내내 인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갈 대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p.103)
이 책을 읽는 동안 줌파 라히리의 단편 <지옥-천국>도 자꾸 생각난다. 수바시가 홀리를 만날때, 특히 그때 그랬다. 이 시점에 이 책을 읽으니 이런 문장만 눈에 띈다던, 이 책을 먼저 읽은 친구 생각도 났다. 그 친구가 말한 문장은, 아마 이 문장이었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친구가 몇 개의 문장을 눈에 담고 또 내가 그렇게 몇 개의 문장을 눈에 담았다면, 이 문장에서 우리는 겹치지 않았을까. 아프고 조심스러운 문장, 조심스럽고 아픈 문장.
부모님은 장티푸스가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가 홀리에게 말했다. 부모님은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며칠 동안 애를 태웠지요. 그 얼마 전에 동네에 사는 어린아이가 죽은 것처럼 말이에요. 부모님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할 때면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변해요. 아직도 우리 몸에서 열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예요.
그게 바로 당신이 아빠가 되면 일어나는 일이에요, 홀리가 말했다. 자식이 위험에 처할 땐 시간이 멈춘답니다. 의미도 사라지고요. (p.131)
얼마전에, 아주 오래전의 연인을 오만년만에 만나고 후회한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당연히 모습이 변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마주 앉아서는 '아, 연애는 역시 타이밍이구나, 만약 지금 이 사람을 만났다면 사귀지 않았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을 했다. 만나는 내내 대화는 즐거웠고, 분위기도 좋았다. 음식도 맛있었고 술은 술술 넘어갔다. 그래서 즐겁게 웃으며 호기롭게 2년에 한번쯤은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 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헤어지기전, 내가 타야하는 버스를 기다릴 때, 그때 그가 모든걸 다 망쳐버렸다. 그 순간이 너무 끔찍해서, 나는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 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생각하는 게 이렇듯 달라져버리고 말았다. 던져버린 돌을 다시 주워올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느닷없이 홀리가 떠올랐고, 그녀의 부엌 식탁에서 먹었던 저녁 식사가 생각났다.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그 짧았던 격정이 지금은 사소하게 느껴졌다. 로드아일랜드에서 열심히 모으다가 그만둔 돌멩이처럼 사소해 보였는데, 잠깐 돌멩이를 움켜쥐었다가 해변을 따라 걸어가면서 바다에 던져버리듯이 그는 그렇게 그녀를 보냈다. (p.160)
일전에 나는 '강도현'의 《착해도 망하지 않아》라는 책의 리뷰를 쓰면서 모두가 낯선 사람들인 까페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을, 인도를 떠나 미국으로 온 가우리가 느낀다.
가우리는 남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우다얀의 아내가 아니라 수바시의 아내였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는 로드아일랜드에서도, 심지어 대학 교정에서도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한 행동을 힐난할 것에 대비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러 테라스에 나가 햇볕을 쬐며 얘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실내나 휴게실이나 오락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거나 당구 경기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았다. (pp.213-214)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다시, 손차양을 만드는 우다얀이 있다.
그는 그녀에 맞추어 몸을 가누었다. 고개를 그녀의 얼굴 쪽으로 기울였고, 햇볕으로부터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려고 손을 올려 둘 사이에 손차양을 만들었다.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오직 정적뿐. 햇볕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p.538)
아직도, 쿡쿡, 모두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