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학생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시험지를 걷으면서 이름을 보게 된 루시아가 혹시 성당에 다니냐고 물었을 때 그애는 루시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니, 라고 짧게 대꾸했다.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때부터 요한은 매너도 재치도 없으면서 잘난 체만 한다는 이유로 루시아가 특히 싫어하는 남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안나는 아니었다. 아니, 라고 말하는 다음 순간 요한의 눈길이 자신을 향했고 그리고 분명 웃음을 지어 보였다고 생각했다. 짧긴 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안나의 얼굴은 그래서 빨개진 것이었다. 과외공부를 끝내고 돌아갈 때처럼 또 한번 안나와 루시아는 갈림길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안나에게로 오는 편지가 분명했다. (p.20)

















오래전에 '츠지 히토나리'와 '공지영'이 함께 쓴 <사랑 후에 오는것들>을 읽었을 때, 공지영 편을 읽으며 아 역시 이맛이야, 했던 기억이 났다. 여자가 연두빛의 트레이닝 복을 입고 조깅하는 장면에서였는데, '연두'란 단어가 그렇게나 좋아서였다. 연두색의 트레이닝 복이라니, 이건 한글로 쓰여졌으니 가능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츠지 히토나리라면 결코 자신의 등장인물에게 연두색 트레이닝 복을 입힐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 소설이 좋았는가 아닌가 하는것과는 별개로(기억나지 않는다) 그 연두색 트레이닝 복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국내 소설을 읽으면서 '이맛이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특히나 칙릿을 읽을 때는 그 글이 한글로 쓰여져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오랜만에 은희경의 책을 읽으면서 또 이 맛이야, 했다. 이 맛 때문에 결국은 국내 문학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특히나 위 인용문장 다음다음페이지에 나올 이 문장을 읽을 때는 그 맛이 더했다.



안나가 요한에 대해 알고 싶은 건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중략)키가 작고 마른 여자애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 어제 입었던 블라우스와 오늘 입은 조끼 중 어떤 게 더 어울리는지 말해줄 수 있는지 루시아의 말대로 커트머리에 핀을 꽂으면 촌스러운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갑과 하모키나 중에 무엇을 받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는 뭘 할 건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하느님이 잘못 포장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pp.23-24)



분명히 요한의 시선이 안나를 향했다고, 안나는 이번만큼은 그 시선이 자신의 것이었다고 확신했는데, 아 이런,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라니. 이 문장을 읽는데 덜컥, 철렁, 하는거다. 사실 나는 평소에 은희경을 좋아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그의 소설중 몇 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라는 간단하고 짧은 한 문장이 전해주는 충격이 너무나 커서, 아 이런것이 내공이구나, 했던거다. 은희경이 이걸 하고 있구나, 하고. 그리고 뒷장을 넘기고 또 넘기며 계속 읽는데도 자꾸만 저 문장이 생각나는거다.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아....싫어......



그때부터였다.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를 읽을 때부터 나는 내가 이 단편을 어딘가에서 읽었음을 알게됐다. 나 이거 읽었는데, 대체 어디에서 읽었을까, 뭘까, 하고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검색해봤는데 나오질 않았다. 아 정말 읽었단 말이다, 싶어 은희경의 이름을 넣고 그의 작품이 실린 책들을 훑어보다 발견했다. 바로 이거다! <2009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오, 이거였구나. 아..찾아냈더니 속이 다 시원해. 어쨌든 계속.



이 책은 은희경의 단편집인데, 실린 단편들중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주인공인 '이원'에게 너무 짜증이나고 답답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원은 태현이 말한대로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뭔가 남들 하는 방식하고는 핀트가 안 맞는'(p.161) 캐릭터이고, 물론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도 그 민폐를 끼치는 성격이 너무 짜증이 나는거다. 




이원은 실을 빨간색으로 골랐던 것과 같은 이유로 무늬가 안 들어간 목도리를 원했다. 원장이 지시했다. 그럼 한 줄은 겉뜨기로 뜨고 다음 줄은 안뜨기로 뜨세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이원은 그다음부터는 듣지 않았다. 원장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설명을 마친 원장이 아시겠죠? 라고 물었을 때 이원은 엉뚱하게 대답했다. 원장님, 저는 무늬를 안 넣으려고요. 그냥 겉뜨기로만 할게요. 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설명을 잘 들으셔야지 혼자 멋대로 생각하면 어떡해요. 겉뜨기로 뜬 걸 뒤집으면 안뜨기가 되잖아요. 뜨개질은 뒤집어가면서 왕복하는 거예요. 뒤집었을 때는 반대로 떠야죠. 네. 이원이 곧바로 대답하자 원장이 조금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성격이 급하세요. 급하신 분들이 설명은 잘 안 듣고 나중에 딴소리를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이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뒤집어 뜬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뿐이지 급했던 건 아니었다. 또 첫 단계에서 납득을 못했는데 다음 단계의 설명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들으나 마나 모를 것이라서 안 들은 거였다. 이원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은 대개 그런 경우였다. (pp.168-169)



아...진짜 빡친다. 어차피 모를거라 안듣고 나중에 딴소리 하는 캐릭터라니. 이원의 이런 성격은 수시로 묘사되는데, 정말 싫다. 물론 어떤 면은 나와 같기도 해서 더 싫은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해된다고 해서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는 이해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다. 아, 작가가 너무 잔인해. 이런 캐릭터를 이토록 잘 그려놓다니. 아, 이 단편을 읽는게 이 책을 읽는 시간을 통틀어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 ㅠㅠ



마지막 단편 <금성녀>에 이르러서는 마치 요리의 하이라이트 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그 맛이 극에 달했다. 처음 단편과 그 다음 단편, 그 다음 단편을 읽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연관성이 맨 마지막 단편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보였으니까. 그 어렴풋이 보이던 것이 책장을 넘길수록, 끝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아, 이 맛이야.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게다가 금성녀의 주인공 '마리'와, 그녀를 장지까지 모시고가는 '완규'와 '현' 모두가 마음에 든다. 둘 다 모두, 어른들께 잘하는 청년들인 것 같아 괜히 좋았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간절히.



비는 그쳤지만 숲과 땅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나무 사이를 뚫고 질척질척한 흙길을 올라가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담배를 사겠다며 가게에 들어간 현이 묵직해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와 접이식 의자 한 개를 들고 나왔다. 완규가 뒤따라 들어가서 간이탁자를 날라왔다. 마리 할머니는 의자에 앉고 현과 완규는 뒤에 선 채로, 세 사람은 비닐봉지 속의 캔맥주를 한 개씩 꺼내들었다. 갈증이 났었는지 미지근한 맥주가 제법 시원하게 넘어갔다. (p.222)



화장실을 자주 가는게 너무 불편해서 맥주를 잘 안마시게 되는데, 어휴, 저 장면 읽는데 어찌나 갑자기 맥주가 땡기던지. 나도 그 자리에 앉아 맥주를 한캔 마시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차 타고 가다가 나 때문에 자꾸 휴게소 들르면..난 민망하고 무안할거야. ㅠㅠ그렇지만 자꾸 쉬마려울 텐데.. ㅠㅠㅠㅠㅠ




새벽에 깨서 잠이 오질 않았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새로 읽기 시작한 책이 너무 휙휙 넘어가서 기분이 좀 좋아졌다. 결정적으로 책 속의 여자가 평소에 흠모하던 연예인과 초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호텔을 가서 잠을 자게되는..........하하하하하. 이런 일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얘기는 다음 페이퍼로 패쓰.



게다가 커피가 가득 든 머그잔을 양 손에 잡으려니 따뜻한 게 아닌가. 이게 좋았고, 다른 부서 남자직원들이 아침부터 올라와서는 화이트데이라고 초콜렛을 주고 갔다. 풍성해진 나의 간식. 게다가 사탕이 아니라서 더 좋아. 난 사탕 안먹으니까. 초콜렛 완전 사랑♡ 초콜렛 하트뿅뿅이다. 알러뷰뿅 ♡








그나저나 생일 선물로 스탠드를 받고 싶은데 생일이 5개월이나 남았다...우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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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4-03-1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지금 위시리스트에 몇번까지 있어요?!

다락방 2014-03-14 14:33   좋아요 0 | URL
6번까지 있다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4-03-15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스탠드가 필요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누군가 사주기를.. 그런데 제가 못참고 사버릴것 같아요. 워크램프요 ㅠㅠ

다락방 2014-03-17 13:20   좋아요 0 | URL
좋은 스탠드 검색했으면 추천 좀 해줘요. 전 도무지 고르지를 못하겠단 말입니다! ㅎㅎ

그렇게혜윰 2014-03-15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개월 남은 저를 보고 위안을 삼으셔요ㅋ 전 9개월동안 목록을 꾸준히 채워 남편에게 청구하려구요. 작년에 무방비로 맞았다가 빈손으로 지나갔어요ㅠㅠ

다락방 2014-03-17 13:21   좋아요 0 | URL
흐음. 9개월이라니..아이코야. 그렇게헤윰님, 너무나 까마득합니다. 5개월 남은 저는 그나마 행복해해야 하는겁니까!! 아무래도 못기다리고 제가 제 돈 주고 사지 싶어요. ㅎㅎ

건조기후 2014-03-17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가 요한에 대해 알고 싶은 건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중략)
저는 저 중략에 있는 말들이 참 좋더라고요. 진짜 궁금한 건지 그냥 뭐든 물어보고 싶어서 막 내지르는 건지 모를 말들. 결국엔 크리스마스에 뭘 할 건지로 끝맺기 위한 길고 긴 과정이요.. ㅎ
결국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으니까, 요한이 루시아 남자친구라도 좋아요.

다락방 2014-03-18 08:52   좋아요 0 | URL
저도 중략에 있는 말들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다 옮길까 생각했었는데, 키보드 열나 두들겨야 되겠더라고요. 힘들어 힘들어 포기 ㅎㅎㅎㅎㅎ

저는 요한과 루시아가 혹은 요한과 안나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가 아니라서 좋아요. ㅎㅎ 그런거 딱 싫거든요. 어릴때 남자 한 명 만나서 결혼해서 그 남자랑 오래오래 사는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