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에겐 사랑하는 여동생 안나가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고 부모님의 집을 정리하려고 와있던 중, 에리카는 안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부모님의 집을 팔아서 그 돈을 반 씩 나누어갖자는 거다. 부모님이 이 집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는 에리카는, 안나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을텐데 이런 제안을 하다니, 그건 안나의 뒤에서 안나를 조정하는 루카스 탓이라고 생각을 한다. 에리카는 루카스가 싫었다. 동생이 왜 그 남자와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두 자식들을 돌보는 것은 다 안나의 몫이었고, 안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빼빼 말라가기만 하는데, 루카스는 전혀 도와주려고 하질 않았고 늘 자기 이익만 생각했으니까. 네 삶의 주인은 네가 되어야 한다고 에리카가 안나에게 몇 번이고 말해보지만, 안나는 그런 언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잔소리로 여기며 대화를 하고 싶어하질 않는다. 에리카에겐 집을 팔지 않을 권리가 없어, 어쩔수없이 집을 경매에 내놓기로 하는데, 그 집의 가격이 어느정도나 되는지 보려고 부동산 중개업자가 찾아왔을 때, 루카스가 갑자기 방문한다. 에리카는 그런 루카스가 꼴도 보기 싫어 집의 단점들을 하나씩 중개업자에게 말하고, 이 일은 장점만 부각해서 높은 값을 받으려던 루카스의 분노를 산다. 루카스는, 에리카가 짐작했던 것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남자였다.
그녀는 너무 무서워서 꼼짝도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알아들었어? 날 바보로 만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 조심하라고!"
루카스가 단어 하나하나를 너무 세게 발음하며 으르렁거린 나머지 그녀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에리카는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을 닦아 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녀는 소금기둥처럼 움직이지 않고 선 채로, 그가 집에서 나가 사라져 버리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렇게 했다. 그는 그러쥐었던 그녀의 목을 놓고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에리카가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려던 찰나, 루카스가 한 걸음 만에 돌아와서 다시 그녀 앞에 섰다. 그는 에리카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입술을 눌렀다. 루카스는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벌려 혀를 집어넣으면서 가슴을 꽉 쥐었다. 에리카는 브래지어의 언더와이어가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씩 웃으며 돌아서서 문으로 나간 뒤 겨울 추위 속으로 사라졌다. 에리카는 차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아서 넌더리를 내며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루카스의 키스는 목 조르기보다 더 위협적이었다.(pp.142-143)
목조르기를 당하고, 강압적인 성폭행을 당하고나서야 에리카는 안나가 루카스로부터 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를 알게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나가 자기 의지가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폭력적인 남편과 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리카는 운다. 이 무서운 일을 자신은 이번에 처음 당했지만 안나는 매일 당하고 살테니까. 이 무서운 남자를 어쩌다 한 번 만나는 게 아니라 안나는 함께 살고 있으니까. 그 지옥같은 생활이 짐작되어 에리카는 운다. 그동안 보냈을 지옥같은 시간과, 앞으로 보내게 될 지옥같은 순간들이 짐작되어 에리카는 운다. 그 고통속에 동생과 조카들이 있기 때문에 운다.
에리카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두 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울었다. 자신이 아닌 안나를 위해. (pp.142-143)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완전히 알 수없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 속깊은 이야기를 나눈다한들, 그것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전부일 리는 없다. 게다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엔 상대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는 상대가 하는 말만 듣고 판단해야 하고, 상대의 표정을 보고 짐작하는 것, 그게 전부다. 이 사실이 지독하게 끔찍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돕고 싶어도 '알아야' 도울텐데, 알지 못하면 도울수도 없을텐데. 상대가 내게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알 수가 없을텐데.
다음번에 여동생이 집에 오면 여동생에게 이 책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리카가 안나 때문에 울던 장면에서 책장을 덮고,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떠올려 보았다. 에리카가 울었던 장면 까지를 이야기해준 다음에, 동생에게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을 해야할 것이다. 물론 네가 어디에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지만, 혹여라도 누군가가 너를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준다면, 네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감추지 말고 바깥으로 드러내라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테니 나에게 얘기하라고. 물론 이런 얘기를 하면 동생은 무슨 소리냐며 콧방귀를 낄지도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혼자 고통을 느끼며 몰래 흐느끼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잔인한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고 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때, 어떻게든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겠지만, 손을 뻗었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지 않는 동생에게도 이렇게 얘기하고, 조카가 좀 더 자라면 조카에게도 말해야겠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너를 후려치려고 하면 반드시 나에게 말을 하라고.
자꾸만 에리카가 우는 장면이 생각난다. 안나 때문에 우는 장면이. 자신이 잠깐 동안 루카스로부터 그 공포를 맛보고, 그걸 매일매일 당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고통을 당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누군가 공포를 당할거란 걸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얼마나 더 끔찍한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 무서운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안나 때문에, 안나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에리카 때문에.
책 속에서 에리카는 와인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에리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파트리크는 와인을 사들고 에리카를 방문했던 날, 에리카가 하는대로 입안에서 와인을 굴려보다가 그 맛에 놀라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미칠듯이 와인을 마시고 싶어져, 어제 부랴부랴 마트에 나가 와인을 사가지고 왔다. 집에도 그제 사다 놓은 와인이 있었는데, 반 병 밖에 남질 않아 모자랄 것 같았고, 나는 뭔가 모자란 건 정말이지 딱 질색이라, 나가서 두 병을 사가지고 온 것. 저녁에 친구들을 만날 약속이 있었는데, 다녀온 뒤 집에서 혼자 와인을 마셔야지, 생각했었다. 입 안에서 굴려봐야지. 나는 너무 꿀떡꿀떡 삼키니까, 오늘은 입 안에서 굴려봐야지. 뭔가 다른 게 있나 느껴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신이 났었는데, 친구들을 만나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칵테일을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눈 떠보니 오늘 아침이었다. 하아- 와인을 마시지 못하고 어젯밤이 지나가 버렸........................제대로 기억도 나질 않아 ㅠㅠ 내 토요일 밤은 어디로 간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술 마신 다음날은 역시 내가 끓인 신라면이 짱이다. 해장엔 최고!
(이십대 중반에 나도 얼음공주 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