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와 헤어진 후 요기를 하러 새거모어 요트 정박장으로 갔다. 잡화상과 우편엽서 가게가 나란한 작은 항만이었다. 화창한 날씨에, 강렬한 색의 풍경과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닿을 정도로 물가에 인접한 색색의 작은 집들이 잘 손질된 작은 정원과 함께 눈에 띄었다. 우리는 말뚝을 박아 바닷물 위로 테라스를 만들어놓은 식당으로 들어가 스테이크와 맥주를 주문했다. (2권, p.163)
뭘 준다고 했더라, 여튼 뭘 준다고 해서 이 책의 1권을 사두고 있었다. 근데 뭐였지?... 여튼 1권 읽으며 2권을 살지말지 결정하자, 라고 생각하며 시작했는데, 와- 엄청 빨려들어가는거다. 재미있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 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어지는거다. 마구 속도가 붙고.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1권의 절반도 채 읽지 않았을 때 당일 배송으로 2권을 주문했다.
이 책은 재미있다. 팍팍팍팍 책장이 잘도 넘어간다. '조정래'의 <정글만리>도 그랬고, '스콧 스미스'의 <폐허>도 재미있게 팍팍팍팍 넘어갔다. 그러나 이 책,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포함해서 이들 모두를 내가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가 물으면 재미있다고 답할것이고,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달라면 이 책들을 추천해주기도 하겠지만, 누가 그 작품들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고민없이 '아니' 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그 작품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사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허를 찌르는 반전'이 있는게 아니라, '엄청난 속도감'이 있는게 아니라,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우아한 문장' 이 필요하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처럼 대단한 사건은 없어도, 그 인물이 되어 그 감정을 느껴볼 수있게 하는게 내게는 더 중요하다. 나는 그런 작품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기 보다는 '나였다면' 할 수 있는게 더 중요하다. 아, 그런데 내가 뭘 사랑하는지 얘기하려고 한 게 아니니까 이쯤하고.
위의 인용한 문장을 보며 나름대로 그 풍경을 상상하다가, 너무 좋아서 자지러질뻔 했다. 요트정박장과, 우편엽서 가게를 떠올려보니 너무 좋은거다. 현 빈같은 남자랑 손을 잡고 요트정박장 앞에 멈추어 한껏 요트와 바다를 바라보다가 우편엽서 가게로 들어가 엽서 몇 장을 고르는거다. 이거 좋지? 이건 어때? 이거 살까? 그리고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스테이크와 와인을 주문하고...홍홍홍. 완전 좋아. 나는 이곳의 풍경이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인지 궁금해져서, 새거모어 항만이 있는 뉴잉글랜드의 이미지를 검색해봤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1107/pimg_790343103921062.jpg)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1107/pimg_790343103921063.jpg)
밑에 사진은 출처를 모르겠고, 위에 사진은 출처가 써있는데, 저기에 써있는 대로라면, 뉴잉글랜드는 '대서양에 면한 미국에서 제일 작은 주' 란다. 아..좋다. 내가 떠올린 풍경은 위의 사진에 더 가깝다. 레스토랑에 들어가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천천히 꼭꼭 씹어 육즙을 느끼고, 그것을 와인으로 삼키고...아 쓰읍. 침나온다. 굉장히 행복한 그림이 떠올라서, 내가 살면서 언젠가는, 기필코, 꼭 한 번은, 단 며칠이라도 뉴잉글랜드에 가보겠다고 결심했다. 새거모어 항만으로 가서 레스토랑에 들어가야지. 불끈!
"내 조카 중에 보스턴에 사는 애가 있는데, 금융 쪽 일을 하지. 매달 엄청난 돈을 벌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셋이고, 아름다운 아내와 멋진 차가 있고, 이를테면 이상적인 삶이었어. 그런데 그애가 어느 날 자기 아내에게 떠나겠다고 선언한 거야. 사랑을 찾았다고, 강연회에서 만난 딸 또래의 하버드 대학생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이야. 다들 정신이 나갔느냐고 펄쩍 뛰었지. 청춘에 대한 회한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하지만 난 그냥 사랑을 찾은 거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보통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결혼을 하잖아.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랑이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찾아오고, 그렇게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되지. 주위에서는 욕을 하고 난리가 나고 말이야. 수소가 공기와 섞이는 순간처럼,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면서 모두 휩쓸려 가지. 30년의 결혼 생활이 한순간 날아가버리는 거야. 거대한 분뇨 정화조가 끓어오르다가 폭발해 주위 사람들한테 오물을 튀기듯이 말이야. 사십대의 위기, 중년에 찾아오는 육신의 유혹이라는 건 결국 사랑의 중요성을 너무 늦게 깨닫는 사람들, 그로 인해 삶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사람들 얘기인 거야." (2권, p.190)
오래전에. 짧은 연애가 끝났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슬펐다. 다시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 같지 않아서, 내 삶에 사랑이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서. 그 연애 전에도 그랬다. 이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거야. 그 생각이 차오르면, 그게 슬펐다. 그러나 그 뒤로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거나 내가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나타났고, 그 뒤로도 연애는 이어졌고 헤어짐은 반복됐다. 이제는 앞으로 내 남은 삶에 얼마나 다른 남자가 나타나고, 얼마나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하게 될까를 기대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설렌다. 정착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랑은 한가지 종류가 아니고, 상대가 바뀔때마다 그 사랑의 빛깔도 달랐다.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랑들이 많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느 남자도 놓치고 싶지 않아지는거다. 그 다양한 남자들을 만나서 숱하게 사랑 고백을 주고받고, 또 내가 그들에게 미칠듯한 사랑을 느껴 뒤로 넘어가고도 싶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어느 날에는, 그게 당장 내일이든 일흔넷이 되었을 때건간에, '엄청난 폭발' 이라고 느껴지는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내가 그 때 그 순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건간에, 모든걸 뒤로 내팽개치고 그 사랑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주변 누군가가 뜯어말릴지도 모르고, 손가락질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도, 다 감당하며 그 폭발속으로 걸어들어갈지도 모른다. 이건, 진짜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만약 내가 그 때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로 묶여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을 지키고 내 사랑을 포기하겠다'고 감히 단언할 수가 없다. 만약 그게 진짜, 진짜, 진짜 사랑을 찾은거면 어떡해. 그런데 어떻게 이를 악물고 남편 옆에 있기로 할 수 있느냐고. 아이까지 낳은 상황이라면 결정은 더 힘들어지겠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할지,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지금은 정말이지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쉽게 예로 들자면,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가 그렇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연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 우아- 만날 사람들이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브래드 피트는 결혼한 상태였고, 졸리를 만나면서 이혼해야 했다. 그 이혼은 그의 아내에게 상처를 주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졸리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 때문에 속상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트와 졸리가 서로 '사랑을 찾은'거라면, 거기다대고, 바람을 핀 나쁜놈이라고 무조건 욕하기가 너무 어려운 게 아닌가 싶어지는거다. 그래도 되나.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남편과 아내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살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가정을 지키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쉽게 비난해도 될까. 나는 이걸 잘 모르겠는거다. 물론 가정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랑을 찾았다'는 이유로 가버리는 건 아니니까, 대부분은 순간적인 욕망이나 욕심 때문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외도는 나쁜짓이 되어버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이들은, 정말 어떤이들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랑을 맞닥뜨린 게 아닐까. 아, 이런게 사랑이구나, 이게 사랑이야, 하는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면. 그러면 어떡해. 할 수 없지 우리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야, 이렇게 늦게 만나면 안되는 거였어, 하고 뒤돌아 가야하나. 아, 젠장. 뭘 어째야하는거야!!
가족 때문에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언젠가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젊은 남자랑 바람도 피고 연애도 하고 그러면서 살어. 뭐라고 안그럴게. 엄마도 새로운 남자가 있고 새로운 사랑이 있다는 걸 알아야지. 많은 남자를 만나봐야 할 거 아냐. 그러자 엄마가 내게 말했다.
미친소리 하지말고 너나 잘해.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도 남자 없었는데 엄마한테 남자 생기라고 그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해놓고 웃겨서 웃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니. 사랑이 도대체 뭐니. 사랑이 뭘까. 모든일의 이유가 되고 변명이 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쑤셔놓기도 하는, 대체 그 사랑이 뭘까.
"사실 전 별로 소심하지 않은 편인데, 이상하게 제니만 보면 말문이 막혀요. 왜 이러는지 저도 ‥‥‥"
"사랑이지."
"그럴까요?"
"그럼."
"제니는 너무 멋져요. 부드럽고, 똑똑하고, 아름답죠! 이런 얘기까지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전 이따금 제니를 보려고 일부러 클락스 앞을 지나가요. 그냥 보기만 하죠‥‥‥ 제니를 보고 있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 사랑인 거죠?"
"그렇다니까." (1권, p.337)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으면 어떡해야할까. 그 사랑을 드러내고 숨통을 트이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럴 때면 차에서 내려 클락스에 들어가서 인사를 건네고 싶고, 혹시 일 끝나고 같이 극장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요. 하지만 용기가 안 나요. 이것도 사랑일까요?"
"아니, 그건 바보라서 그래. 그런 식으로 했다간 사랑하는 여자를 놓쳐버리지. 소심하게 굴면 안 돼. 넌 젊고 잘생겼고 능력도 뛰어나잖아." (1권, p.337)
나는 많은 순간 바보였고, 바보가 아닌 용기를 택했을 때 절망을 맛보았던 적이 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쓰라린 실패로 기억되는데, 그러니 나는 어쩌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또 바보가 될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뒤늦게 '이거구나!' 하는게 찾아왔을 때도, 바보가 되어 바이, 사요나라~ 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내 자신을 찔러댈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랑이 오지 않는 것보다는 오는 게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