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K의 학교 후배다. K 가 어학연수를 가기전, 한 번 밥이나 먹자며 만나길 청했고 그 자리에 J 를 데리고 나온거였다. K와 내가 살갑게 늘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고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설사 어학연수를 1~2년 가있는 게 아니라 해도, 그러니까 그동난 내내 한국에 있었다해도 우리가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가기전에 얼굴 보자고 한 건 좀 웃기다. 어쨌든 나는 K 를 만나러 갔건만 K 는 J 를 불렀다고 했다. 예정에도 없는 추가된 멤버는 내 기분을 약간 상하게 했는데, 뒤늦게 도착한 J 를 보는 순간 기분이 더 망가지고 말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당당한 모습이었달까. 그래서 나 역시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 보다는 첫만남 첫대화부터 틱틱거렸다. 내가 불편한만큼 너도 불편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것도 같다. 그런데 웬걸, 하하하하하, J 를 만난지 한 시간도 채 되기전에 나는 J 에게 완전 흠뻑 빠져들고야 말았다. J 는 학교내에서 선배들로부터 '싸가지' 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게 그의 별명이라고 했다. 나를 만났을 때에도 그런 모습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수시로 꽤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거다. 나는 언제나 이런 남자들한테 강하게 매력을 느꼈다. 늘 그랬다. 당당하고 자신감있고 강하고 싸가지 없어 보이지만 '나한테는' 말투가 부드러워지는 그런 남자. 모든 여자들한테 다정하고 매너좋고 친절하고 살갑게 구는 남자들은 뭐 그러든지 말든지 하게 됐지만, 쌀쌀맞은 말투를 가진 남자를 보면 이상하게도 '나한테 다정하게 만들고 싶다' 는 생각이 막 자라나는거다. 하하하하. 여튼, J 는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 느끼는지를 잽싸게 파악하고 손을 들어 마늘을, 술을, 쌈장을 더 시켜주곤 했다. 그 날 그는 비니를 쓰고 왔었는데 열심히 삼겹살을 집어 먹다가도 내가 그거 한 번 벗어봐요, 라고 하면 눌린머리가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곧잘 벗었다. 나는 또 까르르 웃고 잠시후에 또 벗어봐요 하고 까르르 웃었다. 그 때는 눌린 머리가 우스워 웃는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키가 크고 몸이 좋고(응?) 당당하고 강한 남자가 내 말 한마디에 움직인다는 게 엄청 좋았던 것 같다. 2차로 옮기는 내내 J 는 내 옆에서 걸었다. 취한 나를 데리고 움직인거였는데, 2차에서는 내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따라와서는 화장실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 때까지 한 번도 같이 술마신 남자가 취한 나를 부축하겠다며 화장실 앞에서 기다린 적이 없었는데! 나는 취한 와중에도 녀석에게 완전 쑝 가버리고 말았다. 정말 정말 매력이 터지는 남자였다. K 가 나보다 어렸으니 J 는 나보다 더 어렸는데, 와, 이토록 강하게 '매력있는 남자' 를 만난 게 얼마만인가 싶게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와 어떻게 되기를 꿈꿨다거나 그를 향한 연정에 밤을 지새웠다던가 한 건 아니다. 그저 와 매력터져 매력터져 하면서 '남자'로 인식했던거지. 설사 그쪽에서 나를 여자로봤다 한들 그토록 자신감 넘치는 남자를 내가 과연 내 연애상대로 삼았을지는 의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강한 매력으로 나를 풍덩 빠지게 한 남자를 몇 번 만났지만 그들 모두와는 연애를 하지 않았다. 연애상대는 늘 다른 사람이었다. 왜 나는 강한 매력이 폭발할 듯 쏟아지는 남자와는 연애하기가 두려울까. 어쨌든 녀석은 나를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과정에서도, 취직을 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나에게 연락을 했으며 그 사이사이 녀석은 연애를 했고 헤어졌고 또다른 연애를 시작했다가 헤어지고를 했다. J 와 단둘이 만나면 거의 내가 얘기를 하는 편이었는데, J 는 언제나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내가 동생들과 우애가 좋은게, 내가 책을 읽는 게, 나의 학교 생활들이. 나를 만나고 돌아가노라면 너무 웃어서 얼굴이 아프다고 했고, 나는 J 를 많이 웃게 해서 아주 기분이 좋았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J 와 사랑하고 싶다거나 연애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지만 불순한 욕망이 여러차례 끼어들었던 적은 있다. 쿨럭.
시간이 흘렀고 J 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우리의 연락은 끊긴지 오래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를 잊고 살았다. 그와의 추억이란 게 별로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꿈에 그가 나온거다. 맙소사!! 이게 뭔일이람.
꿈에서 나는 어찌된일인지 지금 현재를 살고 있었는데 대학생이었다. 늙은 대학생인거지. 아주 약한 비가 내렸고 또 나는 어찌된일인지 집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키가 작고 늙고 소심해 보이는 남자가 몇 살이냐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처음에 뭔가 도를 아십니까를 물으려고 하나 싶어서 무시하는데 그는 계속 내 옆에 걸으면서 작업을 거는거다. 현실의 나라면 완전 매몰차게 저리 꺼지라고 했을텐데 꿈속의 나는 왜 가만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짜증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몇 개의 질문에는 대답해주면서 걷고 있는데, 정말이지 마법처럼!! J 가 나타났다. 여전히 키가 크고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강한 모습이었다. 꿈에서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와, 너 몇년만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고 녀석도 오랜만이라며 웃으며 다가왔다. 누가먼저랄것 없이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를 끌어안았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J 는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옆의 저 늙은 남자는 누구냐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자꾸 따라온다고 좀 싫은티를 냈다. 그랬더니 J 는 갑자기 멈춰서서 그 남자에게 저리 가라고 말했다. 싫어하니까 저리 가라고. 그러자 그 남자는 사라졌다. 나는 J 가 반갑고 또 좋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J 가 이끄는대로 J 의 모교로 가서 그 안에 자리한 이상한 골방같은 데로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심하게 다정했다. 그 방에 K 가 뜬금없이 들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좀 안좋았지만...대체적으로는 좋았다. 그리고 꿈이 깨서는 와- 엄청 반갑네, 진짜 매력 터지는 녀석이었는데, 하면서 기분이 막 좋았다. 현실에서도 한 번 안아보고 싶다고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만년만에, 뜬금없이, 그가 꿈에 나온거지?
어제 퇴근하며 읽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아, 이 책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초반에 이런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한에 잠겨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던 그들 사랑의 초기 시절을 생각했다. 그녀를 정복할 필요도 없었다. 첫 번째 순간, 그녀는 정복되었다. 그녀를 돌아본다고?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그녀는 그의 곁에, 코앞에,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다. 그들 사랑의 기반에는 이런 불평등이 깔려 있었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 부당한 불평등. 그녀는 연상의 여자였기 때문에 약했던 것이다. (p.46)
아침에, 출근준비하느라 그 바쁜 와중에 다시 책을 펼쳐 보았다. 아, 이것 때문이었나봐. 이것 때문에 그런 꿈을 꾼건가봐. 이래서 꿈에 J 가 나온건가봐. 나는 순간, J 도 오늘 똑같은 꿈을 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J 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을테고, 설사 이 책을 읽었다고 해도 저 부분을 읽고 꿈을 꾸게 되는 상대가 내가 아닐 수도 있을테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불멸』에서도 '연상의 여인은 자수정'이란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이 책, 『정체성』에서는 단순히 연상의 여자 뿐만이 아니라 상대보다 조금 더 나이든 육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연상의 여자는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연하의 남자에게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 혹은 초조하거나 신경쓰이거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아, 물론 이건 연상이기 때문에만 생기는 건 아니지만, 어떤 젊은 육체 앞에서는 속절없이 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는 문 옆에 서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녀로부터 여섯 발자국 떨어져 있었는데 이 짧은 거리가 무한히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빨갰고, 불타고 있었으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녀 앞의 남자는 거만하게 젊었고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으니 자신의 육체가 그 시선 아래 환한 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p.114)
사실 내가 가장 이 책 속에서 놀라웠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신뢰를 느낀 그는 말했다. "혹시 호텔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샹탈이 와 있는지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습니다."
를르와는 아무 말도 없다가 물었다. "샹탈이 가르쳐 주지 않던가요?"
"아니오."
"그렇다면 죄송하군요." 그는 정중하다 못해 거의 아쉽기까지 하다는 투로 말했다.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 (p.161)
장마르크는 샹탈의 애인이며 현재 같이 살고 있다. 그리고 를르와가 샹탈의 회사 동료임을 알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으니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것도 당연할 터. 그러나 를르와는 장마르크에게 샹탈이 묵는 호텔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장마르크가 아무리 샹탈의 애인이라 한들, 샹탈이 장마르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샹탈이 자신의 애인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을 자신이 말해주는 것은 선을 넘어가는 일일테니까.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었다. 뉴스나 드라마속에서 두드려맞는 여자에게 사람들이 쉽게 손 내밀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 남자가 '내가 이 여자 남편이야' 라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대체 남편이라면 아내를 함부로 다루어도 좋단 말인가. 그게 합당한 이유가 된단 말인가. 다른 부부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일이야, 란 말로 그들을 방치하기 보다는, 아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제삼자도 말하지 않아주는 게 합당한 게 아닐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이제 J 의 연락처도 모르는 데, 어쩌면 좋담. 뭐 연락처를 안다한들 오만년만에 네가 꿈에 나왔단다 하고 연락하기도 좀 뭣한 일이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J 를 떠올리며 히죽히죽 웃게될 것 같다. 나에게 건넸던 맥스봉 소세지와-그러고보니 내가 강하게 이끌렸던 두 남자 모두 나에게 소세지를 줬네!!!!!!!!소름돋아!!!!!!!!!!!!!!!!!!- 술취한 나를 바래다 주겠다며 내 핸드백을 대신 들고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일 같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른다. 다 밀란 쿤데라 덕이다.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한 한 남자가 대한민국의 여자를 추억에 잠기게 했고 꿈 꾸게 했다.
밀란 쿤데라는 정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