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삭줍기」의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허공을 바라본 채 그녀는 유려하게 그 구절을 낭송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다. 허리가 조금 구부정해진들 별수 있나. 어쩌면 그때쯤에는 병아리르르 키워 입에 풀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늙은이란 존재가 반드시 세상을 원망하라는 법은 없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히 시다가 그 노부인에게 했던 말과 일치했다. 뜬금없이 병아리 운운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하지만 내가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을 모두 외우고 있습니까?"

그렇게 묻자 시노카와 씨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요. 아니에요. 전부라니, 그 책에서 좋았던 부분을 몇 페이지쯤 외우는 정도인데‥‥‥."

"네? 그게 대단하다는 거죠. 그런 사람 처음 봤습니다."(p.123)
















시노카와는 고서점의 주인이다. 고서점의 주인이란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을 좋아한다. 아주, 매우 많이 좋아한다. 책만 살펴보면 이 책이 몇 년도에 초판이 나왔는지 그 출판사는 어떤 출판사인지 몇 부가 인쇄됐는지도 술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심지어 책을 읽다 좋아하는 부분을 '몇 페이지쯤' 이나 외운단다. 대박. 그..그..그게 가능한건가?


이 부분을 읽다가 뭔가 열듬감에 휩싸여 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그 책들 중 어떤 부분도 외우지 못하고 있었다. 한 페이지는 고사하고 몇 줄도 외우지 못한다. 지금 딱 외운다고 생각나는 부분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이 문장이다.



뭐 입고 자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게 내가 외우는 전부다. 그런데 몇 페이지씩이나 외우다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정말 페이지를 몽땅 외우기도 할까? 그러고보니 누군가가 블로그에 책 본문을 외웠었다고 썼던걸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외울만큼 책을 좋아하지 않는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게 아니라 이건 아이큐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난 안돼. 못외워. 외우는 시도 한 편도 없어. 하물며 소설의 몇 페이지를 어떻게 외워. 안돼. 그러고보니 나는 악보도 못외우는 사람인데. 뭘 이렇게 외우는 걸 못해. 아니, 근데 내가 정상인 거 아니야? 책의 몇 페이지를 외운다니, 그게 천재인 거 아니냐고. 아놔.. 난 역시 서점 주인이 되면 안되겠구나. 걍 독자로 머물러야겠어.. 쩝..







극한의 사랑이 극한의 절망을 가져온다는 건 명백한 진리다. 이 영화에서 리와 스콧은 서로에게 친구이며 애인이 되어주고 가족이 되어준다.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 이 되어주지만, 그 관계가 늘 그 감정 그대로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조금씩 마찰이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지치게 된다. 어느 순간, 다정한 리의 모습에 '이렇게 다정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며 스콧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 때는 서로에게 서로뿐이었는데. 


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스콧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 리는 자신의 집에서 스콧을 쫓아내려하고, 스콧은 집 안의 모든 물건을 부수고 던지고 소리지르고 몸부림친다. 그가 리를 그토록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특별하거나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분노와 절망은 오지 않았을 터. 저 극한의 절망은 극한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았다는 건, 위에서 말했듯이 서로의 모든 순간을 공유했단 뜻이다. 그러니 지저분하게 등을 돌렸다한들, 죽음의 순간에 생각나는 건 그 사람일 수밖에 없다. 리가, 죽음의 순간에 스콧에게 자기를 보러 와달라고 말했을 때, 그의 앞에서 '너랑 함께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내 태도를 좀 달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늘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나이지만, 그렇게 물러서만 있다가는 죽음의 순간에 어느 얼굴도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인생 혼자 가는 거라 해도, 마지막 순간에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상대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토요일부터 조카가 와있다. 세상에 태어나 해를 보고 달을 보고 구름을 보고 꽃을 본 지 고작 39개월밖에 안 된 아이가, 어제는 하늘을 보더니 나한테 이런다.


이모, 구름이 예뻐서 나가도 좋겠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뭐 이런 애가 다있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얘 왜이렇게 감정이 풍부해. 어쩌면 이렇게 감정 표현을 잘해. 넌 대체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갈비..먹고 싶은 날이다.

집에 가서 조카 데리고 갈비나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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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10-2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우기는 커녕 읽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도 안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저 같은 사람도 있는걸요.
ㅠ..ㅠ 이럴땐 진짜 책 뭐하러 읽나 싶고 뭐.....흠...흠...

구름이 이뻐서 나가도 좋겠다고 말하는 39개월짜리 조카라...
얼마나 예쁠지 상상도 안되요^^

다락방 2013-10-22 08:57   좋아요 0 | URL
읽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 안나는 경우가 대부분인건 저도 그래요. 심지어 과거 페이퍼를 보다가 어, 내가 이런 책도 읽었나? 할 때도 있어요. 책 표지 자체가 생소한 것들...하하하하하하. ㅠㅠ

무해한모리군 2013-10-23 15:30   좋아요 0 | URL
저는 읽고 있는 책 제목도 잘못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 =.=
나는 안나 카네리나 ㅠ.ㅠ

레와 2013-10-2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아아아앙 타미야.........................♡


다락방 2013-10-22 10:13   좋아요 0 | URL
내 조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ephistopheles 2013-10-22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더글러스는 참 대단한 배우 같아요. 젋어서는 아버지(커크 더글러스)의 후광의 스트레스에. 중년엔 섹스중독증을 극복하고 노년엔 구강암 말기를 이겨내고...미녀 아내(캐서린 제타 존스)맞이하고...(하지만 이혼한다네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라고나 할까요.

다락방 2013-10-22 10:18   좋아요 0 | URL
마이클 더글라스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마이클 더글라스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모습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아마도 변장을 엄청 잘한듯. 제가 본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영화중에 가장 인상적인 영화였어요. 가장 마이클 더글라스가 빛난 영화였고요.

에르고숨 2013-10-22 10:50   좋아요 0 | URL
변장ㅋㅋㅋ! 이럴 땐 '분장'이라는 말이 있지 싶은데효.

다락방 2013-10-22 10: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에르고숨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변장'이라고 써놓고 아..이 단어가 아닌것 같은데 뭐지, 뭐지, 이러면서 분장이란 단어는 절대 안떠오르고 '변신?' 이러면서 아 변신은 더 아닌데.......이러고 있었네요.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연 2013-10-2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블리아 고서당ㅎㅎㅎ 저도 이거 보고 싶어서 계속 장바구니에 짱박아놓았는데 우선순위가 자꾸 밀리네요. 조금 훑어본 정도입니다만.. 자꾸 이 책은 언젠가 봐야지, 하는 그런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이 책이 저한테 좀 그런 느낌이랄까

다락방 2013-10-22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여러분들의 감상을 보고서 흐음, 그렇다면 읽어볼까 하고 1권만 주문해서 읽었거든요.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나름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서 2,3권도 읽어야겠어요. ㅎㅎ
우선순위는 항상 '이번에 주문'하는게 우선순위인데, 그 책들을 다 읽기도 전에 또 주문을 하게 되니까 또 이번에 주문이 우선순위가 되고 또 주문하니까....이런 일의 순환이라 책 주문을 멈춰야 사 둔 책 다 읽을 수 있을것 같아요. ㅠㅠ